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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6/10/12  이자성
우리 문학의 뿌리를 더듬어

 

 

 

 

 

우리 문학의 뿌리를 더듬어 

리정림


지난 9월 26일 토요일은 우리 “석화문학원” 가을학기 제4차 학습일이였다. 이날은 또한 우리의 전통명절인 추석 바로 이튿날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리욱시인과 함께 중국조선족문학의 정초자의 한분으로 추앙받고 있는 소설가 김창걸선생의 문학비를 찾아보고 그 앞에서 현장학습을 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문학의 뿌리를 찾는 작업을 꾸준히 펼쳐왔다. 해마다 청명 혹은 추석이면 꼭 우리 문학 개척자들의 유적지와 기념비를 찾아 첨앙하고 주변을 정리하면서 그 뜻을 기리였다. 화룡 호곡령의 ‘리욱시비’를 찾아보고 명동의 윤동주생가를 둘러보았으며 중국조선족의 첫번째 공산당원인 ‘한락연화가박물관’을 참관하는 등 선구자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올해는 ‘김창걸작가문학비’를 첨앙하고 주변을 정리하기로 하였는데 이번은 벌써 다섯번째이다. 

자박자박 내리는 가을비가 초가을의 청량함을 더하는 아침나절, 우리 일행은 연길동북아랭면부 앞에 모여 자가용 다섯대를 나누어 타고 현장으로 출발하였다. 연길 도심을 벗어나 모아산을 넘어가서 세전이벌의 풍요로운 전야를 가로질러 달리는 30 ~ 40분 동안 차창 너머로는 안겨드는 가을풍경이 무척 아름다웠다. 비에 젖은 황금의 들판은 물감번지듯 안겨오고 스쳐가며 차례차례 차창밖으로 흘러갔다. 초가을 찬비에도 고개 숙이지 않고 활짝 핀 코스모스와 알알이 여물어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벼이삭들이 오래 기다린 손님을 맞듯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김창걸문학비’는 룡정시내에서 한 20리쯤 떨어진 장재촌부근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었다. 맑은 물결의 륙도하를 사이두고 저쯤에 두뚝 솟아있는 유서깊은 선바위를 마주바라보고 있어 정취를 더하였다. 

문학비 앞에 다가가보니 우리보다 먼저 찾아온 문학인들이 두고 간 생화 묶음과 과일, 명태 등 제물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아마 그들도 이 자리에서 김창걸 선생과 술 한잔을 나누고 작가가 즐겨부르던“적기가”를 함께 불렀으리라.

우리 일행은 숨 돌릴 새도 없이 추적추적 흩날리는 가을비 속에서도 우산을 접은 채 온 몸으로 비를 맞으며 문학비 주변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낫과 삽으로 일년 내내 질서없이 자란 풀을 베고 뿌리를 쳐내는 동안, 여든이 넘는 김영자 선생님도 이마에 흐르는 것이 땀인지 빗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채 부지런히 잡초를 걷어냈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학비는 단정한 모습을 드러냈다. 장엄하지 않고 오히려 보기좋게 아담한 문학비는 가을비에 촉촉히 적셔지고 있었다. 비에 젖은 비석에는 그의 대표작인 소설 “암야”의 한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이 어두운 밤이 밝으면 빛나는 대낮이 되듯이 나의 고분이와의 앞길에도 이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밝은 해발이 비쳐주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나는 어두운 이 밤길을 빨리하였다.”

‘김창걸문학비’는 연변의 작가들과 연변대학 교수들에 의하여 2000년도에 세워졌다. 이제는 20년이 훨씬 넘는 세월에 씻겨 새겨진 글이라 비바람 눈보라를 맞고 다소 희미하였지만 우리 일행의 마음속에는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이 소설 “암야”는 당시 우리 민족 이주민들이 간도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온갖 고난으로 이겨가며 짓눌려 살던 어두운 삶을 담았다. 그리고 그 리면에 ‘명손’이라는 젊은이와 ‘고분이’라는 처녀의 사랑 이야기를 엮으며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의 사회적, 계급적 모순을 강렬하게 드러낸 훌륭한 작품이다.  소설 “암야”를 비롯한 김창걸 문학은 단순히 시대를 기록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주초기 우리 민족이 겪은 정체성의 혼란과 삶의 고통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김창걸 선생은 1911년 2월 20일,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여나 6세에 룡정에 이주했고 1934년4월부터 명동의 집에서 농사도 짓고 소학교 교원을 하다가 1937년부터 문학창작을 시작하여 해방전에 이미 소설 20여편을 비롯하여 수필, 평론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는 온몸으로 격변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그 시대의 고통과 희망을 문학으로 형상화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대부분 가난한 교원, 농민, 회사원, 여급 등 사회 최하층의 인물들이다. 그는 이들 인물을 통해 당시 우리 민족이 겪은 극심한 빈곤과 차별, 그리고 그 속에서도 살아남으려 했던 굳센 의지를 그려냈다. 가난은 그의 문학의 핵심주제였다. 김창걸은 그  시기 만주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활동하며 우리 민족문학의 뿌리를 내린 개척자가 틀림없다.

우리 단체에서 몇 년째 이어져온 우리문학 개척자들의 유적지와 기념비 방문은 이제는 우리에게 문학현장의 순례라는 의미를 넘어 우리 회원 모두가 문학적 자양분을 얻는 소중한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 덕분에 그동안 우리 회원들은 시, 수필, 소설 등 많은 작품을 써내 “연변문학” 등 여러 잡지, 신문에 발표하며 나름대로 이 시대 작가의 사명을 다하고자 애써왔으며 앞으로도 이처럼 최선을 다할것이다. 

추적추적 흩날리는 가을비는 그치지 않았다. 우리 일행의 머리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문학비에 묵도를 올리고 소원을 빌며, 다음 만남을 약속하고 돌아섰다. 비속을 운전하면서 전옥선 소설가는 “오늘이 개인적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문학적 려정을 시작하는 뜻깊은 계기가 되었다.”며 앞으로 이 시대 우리의 삶을 반영한 묵직한 소설을 더 많이 펴내겠다고 다짐했다. 

‘김창걸문학비’ 방문, 가을비에 젖은 륙도하 기슭에서의 하루는 우리 문학의 뿌리를 더듬고 그 뿌리를 이어갈 새 힘을 얻는 참으로 뜻깊고 의미있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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