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mzxinwen.com/news/28414
발행일: 2026/03/19  이자성
아버지가 물려준 재부

최정옥

32년전 아버지는 우리곁을 영영 떠나셨다. 궁색하던 그 시절, 아버지는 아무런 물질재부도 물려주지 못 하셨다. 그때는 거개가 다 그랬다. 하지만 보석같은 정신적 재부를 물려 주셨다. 그 찬란한 정신적 재부는 나의 몸에 살아 숨쉬고 있다. 

 

아버지는 훤칠한 키와 준수한 용모에다 인테리다운 기질이 력력했다. 게다가   정직하고 선량한 마음의 소유자이시다.

 

아버지는 조선의 한 대바위골이란 곳에서 태여나셨다. 어릴적 째지게 가난하여 아버지를 공부시키지 못하였다. 너무나도 공부하고 싶은 아버지는 한 부자집 아이가 듣는 강의를 구새목에서 가만히 훔쳐 듣고 그 아이를 초과하셨다.개성최씨 집안에서 수재가 나올 것이라며 온 집안에서 돈울 모아 고소까지 공부시켰다. 1920년, 그때쯤이면 지식이 있다고 할수도 있다.  광산에서 뼈빠지게 일하셨다. 그때 고질병을 얻은것이 늘 허리를 잘 쓰시지 못하셨고 한평생 기침으로 고생하셨다.

 

그후 일가친척들이 압록강을 건너 연길 하남으로 이주하였다. 하여 아버지의 중국 고향은 지금의 연길 하남가여서 그때 성분은 “성시빈민”이였다. 토지개혁의 거세찬 파도에 밀려 시가지에서 촌으로 의란향 신광촌에 이주하였다.

 

해방후 문맹퇴치때 늘 교원질을 하셨다. 토지개혁때 석현종이공장 인사부문에 갈수있는 기회도 거절하고 기세 드높은 토지개혁 열조에 몸을 담갔다. 로년에 들어선후 모든 보장이 없게 되니깐 매우 섭섭해 하셨다.

 

그후 아버지는 춘흥촌과 신광촌 두촌의 총회계로 공작하셨다. 한번은 당시 연길시에서 회계들의 시험이 있었다. 학교 나왔던 사람들을 제쳐놓고 1등을 하셨단다. 1959년, 내가 만네살을 잡았을때 공작의 수요로 춘흥촌에 전근하시여 선후하여 대대 당지부 조직위원、생산대 정치대장、집체호 정치호장 등 직무를 맡으셨다.

 

아버지는 남을 돕는것을 락으로 대공무사한 분이시였다. 그리고 표리가 일치하고 원칙성이 강하셨다. 원칙앞에서는 추호의 양보도 하시지 않고 한평생 량심、도덕、의리를 지키며 살아왔다. 또한 시비가 바르고 공정한 분이시였다.

 

대약진때 집체식당 관리원질을 하면서 식당에 식량이 부족한것을 보시고 엄마 몰래 신광에서 갖고온 쌀전부 심지어 동생 암죽감마저도 식당에 바치여 촌민들의 식량난을 다소나마 해결하시였다. 사원들의 식량난을 얼마라도 해결해 주기위하여 그 추운 겨울에도 쉬지않고 북데기속에서 알곡을 들추어 모은것을 전부 사원들에게 분배해 주셨다.

 

아버지는 비록 농민이셨지만 유식하고 학문을 탐구하시는 분이셨다. 머리가 총명하고 견식이 넓었다. 아버지가 늘 외우시던 절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해방전에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다는 것이였다.그 친구의 얘기를 하시면서 “나도 시기를 잘 만났으면 대학에 붙을 자신이 있다.”고 늘 장탄하시는 것이였다.집식구들이 모일때면 언제나 아이들한테 “누가 수학머리가 총명한가 보자” 그리고는 시험을 치군 하셨다. 제갈량산법 、 1원1차、 2차방정식 수수께끼문제를 내시였다. 그리고 수자계산을 할라치면 베아링처럼 돌았다. 내가 보기에도 지금이라면 무조건 대학에 붙을 지력상수(IQ)가 된다.

 

아버지는 붓글씨와 글씨도 아주 멋지게 쓰셨다. 시구를 보시고 그 뜻풀이를 척척 하실때면 옛시인과 문인을 방불케 하였다.그리고 천자문도 통달하시였다. 그래서 삼촌과 여러 친척들은 아버지를 가문의 “지식분자 、수재”라고 일컬었다.

 

 지금 시대라면 관리보다 학문을 닦으실 분이시다. 학문에 “지상(智商)”이 높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사람들과 잘 어울리시였다. 겸손하시고 남을 잘 배려해 주셨다. 늘 자신보다 곤난한 사람들을 관심하고 돌봐 주시였다.

 

예전에 조카의 혼사말을 건넬 때 아버지에 대해 잘알고 계시는 조카 며느리 될 부친은 조카를 보지않아도 외모와 위인이 삼촌의 절반쯤만 되여도 만족이라고 한일도 있었다.

 

로년에 아버지는 어느곳에 가시든지 주위의 로인들이 빙둘러서서 아버지의 옛말을 흥미진진하게 듣군하였다. 후에 어떤 작가가 아버지의 민간이야기를 수집하고저 찾아 갔더라는 것이였다.

 

아버지는 토개때 로당원으로서 언제나 자신을 높은 요구로 단속하시면서 손색이 없도록 노력하셨다. 엄마가 아버지와 다툴때 당원이라는 것이 어떠어떠하다고 하면 제일 노여워 하시였다.

  

그러나 생활상에서는 요구가 매우 낮으셨다. 남을 잘 배려하시지만 남의 저그마한 관심과 배려에도 쉽게 감격해 하셨다. 1986년, 한번은 10원짜리 랑주(郎酒)를 사가지고 갔다. 온동네 사람들과 자랑하시면서 그렇게도 행복해하시였다. 80년대초에 한번은 길림 부대에 있는 조카네 집으로 가셨다. 난생 처음으로 승용차에 앉아보신 아버지께서는 너무나도 감격되였다. 그 시각, 행복의 눈물이 마치 줄끊어진 구술처럼 두볼에서 흘렀다.

 

아버지는 항상 도덕품성상에서 우리 자식들에 대해 엄격히 요구하셨다. 또한 민주적이시였다. 가정에서 마음 편히 자기의 관점을 발표하게끔 격려하셨다. 항상 자식들을 믿어주시고 자식들의 의견을 존중하시였다. 항상 긍정적인 사유로 자식들을 교육하시였다. 하여 우리자식들은 항상 밝고 적극적이고 자신감있게 살아왔다.

 

 아버지는 늘 일기를 쓰셨다. 그때 그때 발생한 일、생각, 감수에 대해 늘 일기로 적으시군 하셨다. 세상뜨신후 두고두고 기념하려고 일기책을 남겼다. 그런데 얼마후 동생의 꿈에 아버지가 일기책을 찾으시더라는 것이였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보냈다. 아마 하늘나라에 가서도 일기를 쓰고 계실것이다.

 

 아버지는 매우 깔끔하고 부지런한 분이시였다. 집주위는 언제나 질서정연하였다. 여유시간을 리용하여 늘 버려진 묵밭을 쾌황하여 파、 참깨、고구마 등 농작물을 심었다. 70고개를 넘은후 아버지는 늘 산으로 가시는 것이였다 .산에 가면 심정이 그렇게도 개운하시다는 것이였다.

 

아버지는 나를 특별히 총애하셨다. 소학교 3학년 때 전교우수생이 되였다고 돈20전을 장려하셨다. 오빠가 삐여져서 “인젠 아들인 나를 믿지말고 걔를 콱 믿읍소.”하고 성을 낸 일도 있었다.

 

 늘 반급 1등, 전교 1등, 전현 수학경색 1등, 전현학생대표 발언, 대학생으로 된 나를 자랑거리로 삼으시면서 행복해 하셨다.

 

대학다닐때 온집에 1년수입이라곤 별로 없었다. 어느 일요일날 집으로 갔는데 약뿌리를 판수입은 엄마한테 바치고 나니 그나마 일전한푼씩 모은돈 4원을 주시면서 나한테 돈을 푼푼히 주지못하여 안타까워 하시였다.

 

 12세쯤 되였을때 내가 아글타글 가마니를 짠돈으로 그릇을 사고 나머지로 비닐신을 샀는데 그만 아버지가 옥수수껍질과 함께 소먹이로 작두에 썰어 세토막이 되였다. 나는 막 울면서 아버지와 떼를 썼다. 나를 달래면서도 너무도 가슴이 쓰리고 안타까와 하시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한바늘 한바늘씩 기우셨다. 어찌도 까근히 기웠는지 그 신을 몇년간 신었댔다.

 

아버지는 몇십년 동안 집체호 정치호장질을 하면서 집체호 청년들을 친자식처럼 관심하시고 이끄시였다. 집체호청년들은 모두 “최아바이”라고 친절하게 부르면서 존중하였다. 매번 연길로 오실때면 서로 앞다투어 초대하군 하였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에 붙었다고 그렇게도 기뻐하셨지만 이 철모르는 딸과 언제한번 1전 한푼의 요구도 없었고 도리여 시댁 처사를 잘하면 그것으로 만족하시고 시름놓았다. 왜서 아버지를 좀 더 기쁘게 해드리지 못했는지? 그렇게 소박하고 선량하고 아무런 요구도 없으신 아버지를 잘 돌봐 드리지 못하고 철없이 세월을 보내다가 모든기회를 다 놓쳐 버렸는지?

 

 그토록 연길로 오시고 싶은것도 몸이 불편하셔서 쉽게 떠나시지 못하셨다. 그나마 1986년도 다행히 연길로 오셔서 우리 집도 보시고 동생이 아버지를 모시고 온 시내를 구경시켰다. 당시 웬간해선 택시를 탈수없었지만 온하루 택시에 모시고 시내구경 시키셨다. 1987년도 회갑잔치도 성대히 차려 드렸다.

 

  1989년, 춘절에 몇백리되는 친정에 (후에 오빠따라 대소 과수농장으로 갔음)갔다. 무슨 예감이라도 있으신지 “보고 싶은 너희들을 보았으니 원이 없다.”는 것이였다. 돌아오게 될 때 매우 아쉬워하시면서 “좀더 놀다가면 안되겠니.”라고 하시면서 리별의 아쉬움을 금치 못하셨다. 그런데 그번 걸음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작별일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그때 아버지는 향년 77세였다.

 

마지막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을씨년스러운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눈확에 자꾸만 경련이 일어났다. 무슨 상서롭지 못할 일이 생길는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자꾸만 스쳤다.아니나 다를가 집으로 돌아온 이틀후에 아버지께서 세상뜨셨다는 청천병력같은 비보를 접하였다.나의가슴은 갈기갈기 찢겨지는 것만 같았다. 며칠 청가를 맡아서라도 아버지를 더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것이 한스럽고 후회되였다.

 

나는 종종 명상에 잠기군한다. 드라마같은 아버지의 일생을 되새기면서 마음속으로 높이 웨친다. 저 멀리 창공에 은은하게 메아리 친다. 아버지는 비록 보통 농민으로 소박하고 평범한 인생을 마치셨지만 그 어떤 높은벼슬을 한 아버지들보다 더더욱 위대한 아버지시라고! 아버지 영원히 존경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우리들에게 인간의 도리를 알려주셨고 또그렇게 키우셨다. 사람은 정직하고 성실하고 남을 배려할줄 알고 대바르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도리를! 나는 꼭 아버지가 물려준 정신재부를 대대손손 전해가리라!

/최정옥

 

 

 

 

엄마는 현처량모였다.

최정옥

 

세월은 류수와같이 흘러도 엄마 생각은 하냥 나의 뇌리에서 희석되지 않는다. 우리엄마는 안성맞춤한 키와 날씬한 몸매에 갸름한 얼굴, 쌍겹질진 호수처럼 그윽한 두눈이며 상큼한 코마루에 얄팍한 입술을 가지신 매력적이고 인자하신 현처량모였다.

엄마는 세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생활난을 못이겨 엄마가 재가했는데 얼마 안되여 어린 딸을 이붓아버지에게 남겨놓고 세상떴다.동생이 있었는데 엄마가 세상뜨는 바람에 부득불 남한테 보냈었다.어린 엄마는 동생의 나이와 이름조차도 몰랐다 .그저 “삭불”이라는 별명밖에 몰랐다.그래서 엄마는 혈육 한점없는 고아로 되였다.갖은고생을 다하면서 시집갈 나이가 되자 어린나이에 시집을 갔단다.

 그 애어린 손으로 싸리나무 해다 팔아 이불과 가장집물들을 일구고 억척스레 일했다.엄마는 없는 살림에도 알뜰하여 집안에 항상 기름기가 돌았다 .그때 아버지가 대대회계질하면서 춘흥으로 도시락을 싸가지고 출근했는데 아버지의 도시락은 항상 감칠맛 돌게 챙겨주셔 동네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찼다.그리고  항상 아버지의 공작을 지지하고 내조해 주셨다 .

그전에는 1년내내 땀흘리면서 일해 봤댔자 식량난을 겪고 수입이 변변치 못하여빈곤이 꼬리를 물고 다녔다.그나마 엄마가 살림을 알뜰히 한덕에 같은 량을 분배받았지만 식량난은 덜하였다.엄마는 없는 살림에  어린 자식들을 키우면서 하루도빠짐없이 생산대로동에 참가하셨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짓고 낮에는 밭에나가 일하고 땅거미가 질때면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저녁짓고 또 밤에는 빨래하고 옷깁고 집을 거두는 등 매일 팽이처럼 돌아쳤다 .그럼에도 엄마는 항상 동네 아줌마들과 우스개도 피우고 오락판도 벌리군 하였다.어떤때면 온몸이 아프고 쑤셔나도 웬간해서는 누워 앓는 법이라곤 없었다 .엄마는 그렇게도 강의하시였다.

엄마는 비록 힘들었지만 오빠, 나, 동생이 모두 학교에 가서 공부도 잘하고 품덕도 좋고 일도 잘한다고 늘 칭찬이 자자하여 항상 행복해 하시는 것이였다 .아마 자식밖에 모르는 엄마에게 삶의 보람과 힘이 되였을 것이다.

 혹시 동네에 나갔다가 맛나는 음식이 생기면 종래로 입에 대는 법이라곤 없이 우리한테 주군 하셨다. 연길시장으로 나물 팔러 왔다가도 점심도 대충 떼우고는 차비돈이 아까와서 50리길을 걸어 한 밤중에야 집에 들어설 때도 많았다 .그 돈을 아껴서 우리 자식들한테 쓸려는 것이였다.

오빠가 소학교 졸업때 전학급 50여명 가운데서 5명 가운데 한사람으로 공립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그때 공립중학교에 붙으면 출세한 셈이였다.엄마는 너무도 기쁜나머지 그 담임선생님에게 산나물을 캐다 감사의 뜻을표시하였다.엄마는 오빠가 시험칠때 꼭붙으라고 찰밥을 해놓고 응원했다.오빠가 중학교에 입학한후 조짚을 팔아 솜저고리를 해가지고 갔다.기숙사가 너무도 습하여 관절염에 걸렸다. 도처에서 약재를 얻어가지도 약을 만들어 치료해 주었다.

나는 소학교 4학년때 불시로 다리가 저려나면서 까무러치군 하였다. 엄마는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침식을 잊으면서 뛰여다녀 신용대부금을 꾸기도하고 얼마안되는 식량에서 덜어내여 연길에 와 큰 어머니가 수소문하여 판돈으로 나의 병이 완쾌될 때까지 몇년을 하루와 같이 치료해주었다.그것도 연길중의원에서 유명한 김인묵 중의한테서 병을 보이기 위해 엄마는 늘 새벽 2--3 시에 병원에가 줄을 서서 호마를 가진후 꼭 그 명의를 보이군하였다 .엄마의 정성끝에 병은 끝내 완쾌되여 다시 학교로 등교하게 되였다 .

   한번은 엄마와 함께 연길로 병보러 왔다가 길옆에서 “궈즈”파는 것을보고 먹고 싶다고 하였다. 엄마는 약지을 돈밖에 없는지라 나를 달랬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숱해 모인 곳에 이르렀는데 엄마의얼굴이 새파랗게 찔렸다 .내가 그렇게 먹고 싶다던 “궈즈”도 사주지 못하고 약지으려던 돈 십몇원을 몽땅 도적맞혔다 .그돈은 엄마에게 있어서 명돈이였다. .하늘 땅이 맞붙는것만 같았다.엄마는 그자리에서 돈잃어 버렸다고 막헤매며 다니던중 동시에 다른사람 호주머니를 털다가 붙잡힌 도적을 붙잡고 파출소까지 가서 끝내 그 돈을 되찾았다. 엄마는 병근원을 뽑아버려고 늘 약을 써주셨다. 동생이 앓을 때도 돈이 없으니 신용사에 가 사정사정하여 돈을 꿔다가 치료하여 완쾌시켰다. 날마다 생산대 일을 할라니 병보러 다닐라니 돈과 량식이 다 변변치 못할라니 엄마의 가냘픈 어깨에 짊어진 짐은 천근같았다 .이렇게 엄마는 자식들을 위하여 로심초사하시고 자식이라면 물불을 가리지않고 나섰다.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여 두주일간 입시준비를 하게되였는데 대대당지부 정당으로 인하여 압력이 매우 컸다. 모순되는 심리에서 방황하면서 늘 엄마에게 불평을 부렸다. 엄마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어쩔바를 몰라하면서 안스러워만 하시는 것이였다. 위자구시험장으로 떠난후 엄마는 떡을 해가지고 와서 응원하셨다.그번시험에서 나는 맥을 버렸다 .이 정도로 시험치고 어떻게 그렇게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칠수 있겠는가! 시험결과가 발표하던날 엄마는 너무도 기뻐 덩실덜실 춤을 추셨다.정말 눈물겨운 행복한순간이였다.전촌에서 유일하게 대학에 붙었던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후 딸이 공부하고 있는 대학을 가보고 싶은 심정이 불붙듯했지만 손에 쥔돈이 없고하니 개암철에 개암을 뜯어가지고 학교로 오신다는 것이 그만 보따리를 차에 두고 내렸다. 엄마는 허겁지겁 다시 차를 쫓아가서 보따리를 찾았다. 그리고 숙소에 찾아오셔서 동학들에게 맛보였다. 나는 엄마의 진심에 가슴이 아려났다.

나이 들어 대학에 가다나니 졸업하자 바람으로 인차 결혼하게 되여 엄마한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였다. 엄마는 결혼준비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속을 태웠다. 평소에 돼지를 잡아 팔아도 고기한근 떠자시지 않고 한푼두푼 한견지 두견지 모아서 결혼준비를 하였다. 결혼식을 남 못하지 않게 치러 주었다 .

동생의 결혼준비를 위하여 엄마는 힘든일 궂은일 가리지않고 일하면서 한푼두푼 모았다.동생 결혼식까지 치른 엄마의 어깨는 홀가분해졌다.그러나 엄마는 항상 예전에 우리자식들을 잘해주지 못했다고 가슴속에 자책감을 가지고 계셨다.

한번은 엄마가 나에게 (92년도좌우)돈200원을 주시는 것이였다. 제 살림을 하느라 엄마에게 푼푼히 드리지 못 했는데 어찌 엄마의 그 뼈돈을 받겠는가! 기를 쓰고 사양하였다. 엄마는 “네가 받지않으면 나는 죽을 때까지 마음속에서 내려가지 않는다.네가 대학 다닐때 어쩌면 그렇게도 방법이 없고 무능했는지?네가 집에왔다가 학교 돌아갈때 말이 떨어지지 않아 주저하다가 차가 오게될 림박에야 차비돈 50전이 없는가고 하던일이 그냥 잊혀지지 않는다 .” 그 일을 언녕 잊어버렸는데 엄마는 그때까지 항상 가슴 속에 묻어두고 계셨다. 할수 없이 그 돈 200원을 받은 후에야 엄마는 한시름 놓으시는 것이엿다. 엄마의 마음은 받아들이고 엄마에게 동베리도 한복을 해드리려고 하니 엄마는 한사코 만류하셨다. 내가 얼마나 더 살겠다고 그비싼 한복을 사겠니? 그럼 그걸 그때가서 내가 입겠다고 하면서 한사코 해드렸다.

1984년1월에 연길로 전근한후 이미 62세가 된 엄마는 외손녀를 업고 매일 두번씩이나 그 추운 겨울에 왕복5리나 되는 길을 오가군 하셨다. 그러다가 농망기가 되면 아들집에 가서 일을 도와주군 하면서 자식들에게 급시우가 되군 했다.

손녀가 연길에 와서 공부할 때 뒤바라지를 하면서 거주증 떼러 파출소로 학교가장회 등 어디에 가나 일처리를 척척 잘하셨다. 한어말 한마디도 잘몰랐지만 혼자서 길림도 다녀오시군 하셨다.또 어떤때면 우리가 즐겨 먹는 음식들을 사다가 단위까지 가져다 주시군 하셨다.

그시기 대학졸업생이라면 경제상에서 대우가 우월했다. 엄마는 농촌에서 산나물과 채소 판돈 몇푼으로 겨우겨우 생활하면서도 언제 한번 일전한푼의 요구도 없었다.엄마는 딸이 시댁처사를 잘한다는 치하를 들으시니 최대의 만족을 느끼시였다.나는 모든 정성과 심혈을 시부모가 아들을 장가 보낸후 8촌이 되지않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로인으로 되도록 무등 애를 썼다.그러나 이철없는 불효녀는 왜서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들에 대해 그렇게도 몰인정하게 처사하였는지?!그렇게 구차하게 지내는 부모에 대해 돌봐 드리면서도 시댁처사를 할수 있지 않았는가? 이제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말인가?!보상해 드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그러나 엄마는 항상 마음의 부자였다. 늘 만족스러워 하시였다. 늘 공원에 가시면 사람들과 잘 어울려 오락판에서 새장구를 치면서 락천적으로 지내시였다.늘 남을 관심하고 배려하고 방조해주는것을 락으로 삼는 엄마였다.엄마는 70세가 넘어서도 옷을 챙겨입으시면  맵시가 났다.언제나 생활을 다채롭게 영위해 가시면서 다른 농촌할머니들보다 시체를 따랐다.

명절 때 ,딸과 사위들이 가게되면 언제나 창고마저도 깔끔히 거두어놓고  마른 명태라던가 평시에 쉽게 맛볼수 없었던 물건들을 깊이 간직했다가도 내놓군 하셨다. 혹시 우리부부간에 다툴 때면 딸이 아무리 가슴아파도 언제 한번 사위한테 말씀을 하신적이 없었다. 그저 담담히 모르는척 하셨다.

1996년, ,엄마는 뇌경색에 걸렸다. 사위들이 업고 다니면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한후 자립할수 있게되였다. 병이 좀 호전되니 도문에 있는 친손군들의 걱정에 그성화를 못이겨 엄마를 도문까지 모셔다 드렸다. 그때부터는 셈이 좀들었는지 나와 동생이 주말마다 엄마한테 가서 챙겨드렸다.

엄마는 오빠의 부담을 덜려고 두애들을 돌봐주었다. (그때는 이미 76세였다)엄마는 나와 동생은 시름 놓으셨지만 농촌에서 힘들게 사는 오빠가 항상 마음에 걸렸다.나와 동생은 늘 오빠를 잘해주는 것은 하늘나라로 가신 엄마가 시름놓게 하는것이라면서 오빠를 잘해 주었다.

1997년 6월달 엄마의 병이 또다시 도졌다.치료를 거쳐 좀 호전되였다. 대소에로 모셔간후 약을 지어다가 계속 다그쳐 치료하여 나들이도 하시게 되였다. 그 사이 우리는 2--3일에 한번씩 몇백리길을 약을 지어가지고 가 보군하였다. 엄마는 늘 웃마을 정거장에 가서는 나와 동생을 애타게 기다리군 하셨다. 지금 내가 통탄하게 후회되는 것은 그때 왜서 좀 더 엄마와 함께 있으면서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시던 엄마를 마지막까지 지켜드리지 못 했는지 !

얼마후 엄마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와 동생은 제정신없이 엄마한테로 향해 도착하자마자  달려가서 엄마의 두손을 꼭잡고  목놓아 울면서 불렀다.엄마는 나와 동생을 번갈아 보시고는 운명하시는것이였다.엄마는 아마 마지막힘을 모아 우리를 고대히 기다린 것이였다. 그때 향년 75세였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고 하늘땅이 무너지는것만 같았다. 그나마 겨우 오빠네 집에 닿아서 마지막 림종을 짧게라도 지키고 엄마를 운명시킬수있어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나와동생은 엄마의 마지막 처리를 손수 다 하였다. 그로서 마음이 좀놓이는 것같다. 그후 나는 반년넘게 그 어떤 장소에서도 웃음을 거두었다.

어릴적 사람은 꼭 이 세상을 떠나는 법인데 엄마도 아무때건 이세상을 떠날거라고 생각하니 나는 “그건 안 돼.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엄마는 못 가.” 하면서 마음을 졸리군 했다. 성인이된 후에도 엄마가 아프면 내가 아픈 것도 잊고 애간장을 태우군 하였다.

엄마가 떠나신지도 인젠 23년이 되였다. 기쁠때나 힘들때나 늘 함께 나누고 기대고 싶고 울바자가 되여주시던 엄마가 저의 곁을 영영 떠나셨다. 마음속으로부터 얼마나 부르짖었는지 모른다! 엄마, 그립습니다!  엄마는 나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계실것이다!

 

                                   고요한 밤 딸 정옥 글

 

 



기사 출력  기사 메일전송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포토뉴스

사진작품

미술작품

한중방송 라디오방송
음악감상
사진은 진실만 말한다
방습거울

 가정여성 

한민족여행사

 동포사회 

TV광고

영상편지

한민족신문 韩民族新闻
 
  l   회사소개   l   광고안내   l   구독신청   l   기사제보   l   개인정보보호정책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