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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6/01/13  이자성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농민이였다. 
   

아버지는 보통 농민이였지만 "대장"과 "보관원"이라는 책임을  짊어지고 한생을 고스란히 집체 일에 바쳐오신 명실공히 마을의 "간부"였다.
   

아버지는 촌지도부의 결정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대장이였다.
   

우리 집은 아주 오래 전에 외지에서 연변 화룡현 룡수공사 룡해촌으로 이사해 왔다.  그 촌은 여덟개의 작은 동네들이 질서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빈곤한 촌이였다.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원도 아닌  반평원 지대에 속하는 곳이였다.
   

이사 온 뒤 우리 집은 그 여덟개 동네 가운데  다섯개 동네를 옮겨다니며 살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사가는 동네마다에서 아버지는 대장으로 계셨다.
   

다람쥐 채바퀴 돌 듯 왜 그렇게  가까운 곳을  여러번 이사하는지 그 이유를 물으면 아버지는 노상 "그냥 일이 그렇게 돼서 그랬다."라고 얼버무려 넘기군 하셨다. 
   

내가 소학교 4학년이던 1974년 여름이였다. 그 시절에는 학교마다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집체 일을 돕것이 흔히 있는 일이였다. 
   

어느날 오후, 우리 반 애들과 함께 호미를 들고 촌사무실 앞마당을 지나가는데 당지부서기가 열려 있는 사무실창문으로 나를 보더니  소리쳤다.
     

" 너, 이대장의 아들이 아니야?"
   

내가 옳다고 대답하며 다가가자 그는 많은 애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치켜세우며 물었다.
   

"너도 앞으로 아버지처럼 대장을 할거지?" 
"아니요, 저는 축구선수 되고 싶어요."
   

그 말에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축구선수보다 일을 잘해서 대학에 가야한다고,  그러면서 나의 아버지는 능력은 대단한데 세월을 잘 못 만나서 대학을 못 가고 이 동네 저 동네  돌아가면서 대장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때 그 당서기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 못한채 멍 해 서있으면서도  아버지를 높이 평가하는 어조에서 알수 없는 자부심을 느꼈다. 함께 있던 남자애들은  선망의 눈길로  나를 빙 둘러 쌓고  여자애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저희들끼리 수군거렸다.
   

손바닥에 장알이 박히면 일 많이 했다는 증거이고 그 장알이 대학 입학 합격증 상징이라고  영화에서도 선전하던 시절이였으니 그 서기의 말이  아주 근거 없는것만은 아니였다.
   

그럼에도 국가 간부도 아닌 농민 아버지를 촌에서 간부배치를 하듯이 이곳저곳 옮겨 세우는 일이 당시의 내겐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후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 집이 여러번 이사한것은 촌 지도부의 결정에 따른것이였다. 어느 동네 연말 수입이 크게 줄어들거나 대장을 맡을 사람이 없으면 으레 우리 집을 그 동네로 이사시키고 아버지를 대장으로 임명했다는 것이다
   

형제들이 "아버지는 자기 집 살림은 안 챙기고 집체 일만 한다"며 구시렁거리면 아버지는 늘 이렇게말씀하셨다.
 "다 촌에서 내린 결정인데 어떻허냐?  딴 말 말거라"
그것이 아버지의 삶의 철학이였다.
   

아버지는 이사 다니며 대장 일을 하면서도 단 한번도 불평하거나 더 많은 보수를 요구한적 없었다. 룡해촌에 이사 온 뒤 네번째, 마지막 이사는 특별했다. 그 이사는 어머니의 "전략"에 의한 이사였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가 살던 룡해 5대는 "자성"이라고 불리는 한족동네였는데 쉰여 호 가운데 조선족은 고작 4호 뿐이였다. 다른 한족동네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는 어머니는 더는 한족들과 어울려 살기 힘든 모양이였다.
   

아버지와 달리 민족심을 늘 강조하던 어머니는 조선족은  자기 민족풍속과 조선말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고 버릇처럼 외우군 하셨다. 그것이 어머니의 신조였다.  동생인 큰 외삼촌이 연변고중 1기 졸업후 연변인민출판사를 거쳐 중국국제관광국 일본처 처장으로 일하게 된것도 " 조선족이였기에 가능 했다."며 자식들의 장래를 늘 민족과 연계시켜 생각하셨다.
   

내가 두살 되던 해 겨울,  아버지가 산으로 겨울목재하러 가고 없는 기회를 노리신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조선족동네인 6대로 이사하기로 결심했다. 아래 동네에 살고 계시던 큰 아버지를 설득하여 큰 아버지의 "명령"을 핑계 삼아 이사하는 것이 "전략"이였다. 
   

여섯 딸을 키우며 한번도  아버지에게 말 대꾸 않던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마음 굳힌 데는 오랜 인내의 시간이 쌓여 있었을 것이다. 
   

큰 아버지는 여러 날 고민끝에 결국 어머니의 부탁을  받아들였고 그해 겨울 우리 집은 아버지 없는 이사를 단행했다.
   

산에서 돌아오신 아버지는 텅 빈 집을 보고 깜짝 놀라 호통치며 달려와서 어머니를 죽일듯이 몰아붙이며 호랑이같이 날뛰였다.  다행히 동네 어른들이 나서서 이사한 이유를 변호해 주고 큰아버지가 아버지를 훈계하며 눅잖치고 촌 지도부에 설명하면서 폭풍같던 이사사건이 겨우 수습되였다.
   

하지만 예고된 운명처럼  6대로 옮긴 뒤에도 대장의 짐은 아버지를  외면하지 않았다. 정치대장은 있었지만 업무대장이 없어 아버지가 그 일을 맞게 된것이다.
   
장 장 30여년, 대장일을 하면서 쉼이라고는 모르던 아버지는 환갑을 넘기며 손을 놓았지만 곧 "보관원"이라는 또 다른 책임이 맡겨졌다.
     

보관원 일은 강한 책임감과 한치의 사심도 허락되지 않는 자리였다. 작은 바오라기부터 큰 농기구까지 생산대의 온갖 잡동사니들은 아버지의 손을 거쳐 창고에 보관되였다.
 

아버지는 사심이 없는 분이였다.
   

내가 열살 무렵, 겨울이면  화약총을 만들어 새를 잡군 하던 나는 쇠파이프가 필요했다. 어느날 해질 무렵 우연히 아버지를 따라 창고에 갔다가 그 안에 쌓여 있는 파이프를 보고 가슴이 뛰였다. 몰래 짧은 파이프 하나를 옷속에 감추고 나왔지만 눈 덮인 창고 앞에서 아버지는 단번에 그것을 알아보셨다.
   

"너 뭣하는 짓이야, 집체 걸 다치면 못써!"
   

아버지는 늙었어도 완력이 대단하셨다. 내가 뺏기지 안으려고 온 힘을 다해 움켜잡았지만 아버지가 한번 힘 쓰자 나는 저쪽 눈속에 허망 나가 넘어지고 말았다. 내가 울면서 애원했지만 아버지는 미동도 하지 않으셨다. 다만 나를 일으켜세우며 오래도록 바라보시던 그 눈빛에는 안타까움과 원망이 뒤섞인 말 없는 슬픔이 담겨있었다.
   

다음날 우리 집 구들에는 전날 내가 훔치려 했던 것보다 더 길고 좋은 파이프가 놓여 있었다. 아버지가 돈을 주고 야장간에서 사온 것이었다.
   

1983년, 전국적으로 호도거리책임제가  실시되면서 아버지가 사랑하던 보관원 일도 끝이 났다. 
   

40여년을  집체 일에 바쳐온 아버지는 졸지에 백수로 되였다. 허리병으로 지팡이에 의지해 동네며 야산을 배회하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였다.
   

집체 일을 할 때 넘치던 활역도, 열정도 더는 볼수가 없었다. 
기분도 말이 아니였다. 내가 가끔씩 배동해서 산보하기는 했으나 아버지는 별로 내키지 않아 하셨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생전 마시지 않던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혈압이 높고 80에 가까우신 아버지가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고 내가 극구 말렸으나 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내 인생은 집체 때가 더 좋았네라" 
   

그 말만 되풀이 하시던 이버지는 여든 되던 해 가을 , 산에 갔다가 돌아오신 뒤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란많은 생을 마감하셨다.
  
지금 내가 일하는 한국의 공장에는 아버지 따라 창고에 갔을 때 보았던 것보다 더 좋은 파이프가 산더미로 쌓여 있다. 쓰고 남은 잔재들은 고철더미에 버려지군 한다. 
   

한생을 집체에 바치신 농민 아버지,  개인보다 공동을 먼저 생각하시던 보관원 아버지,   "집체 때가 더 좋았네라." 하시던 아버지가 오늘의 발전을 보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가
   

그날 눈밭에서 나를 바라보시던 그 애잔한 눈빛이 지금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를 울린다.
 조금만 더 일찍 철이 들었더라면,  조금만  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렸더라면 하는 자책에 나는 가끔씩 때늦은 후회를 한다.

/이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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