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토템시인 남영전입니다.”
어느 날 휴대전화 대화창에 이 한 문장이 떴다.
나는 한동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몇 번이고 이름을 다시 읽었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싶었다. 남옥란 선생님의 연변 오덕된장술공장 견학 수필을 읽고 독후감을 쓴 직후였다. 그 글에는 남영전 선생님의 토템문화에 대한 내 생각도 짧게 담겨 있었다. 그런데 책 속에서만 만나던 남영전 선생님이 작은 휴대전화 화면에 나타나 먼저 말을 걸어오신 것이다.
뜻밖의 만남은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한다. 반가움이 앞서면서도 선뜻 믿기지 않고, 기쁜 마음 한구석에는 내가 이런 인사를 받아도 되는 사람인가 하는 쑥스러움도 생긴다.
그날 내 마음이 그랬다.
남영전 선생님은 내가 오래전부터 존경해온 시인이다.
1980년 《장백산》을 창간해 오랫동안 이끌었고, 《길림신문》 사장 겸 주필을 지냈으며, 토템시라는 독특한 시세계를 개척했다. 그의 작품은 중국의 대학과 학계에서도 연구되었고 여러 문학상을 통해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나에게 선생님은 그런 이력만으로 기억되는 분이 아니다. 나는 다른 문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분의 사람됨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1996년 겨울이었다. 당시 문학애호가였던 나는 정세봉 선생님을 통해 소설가 박선석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남영전 선생님의 이름이 나왔다. 박선석 선생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민족의 태양 같은 분이오.”
그때는 그 말이 조금 크게 들렸다. 한 사람을 두고 어떻게 저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까 싶었다. 문학계에서 이름난 분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를 태양에 비유할 만큼 깊이 존경한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 그 말의 뜻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얼마 전 남영전 선생님이 쓰신 박선석 선생의 추모문을 읽었다. 그 글에는 한 농민작가가 문학을 찾아 길을 나섰던 모습이 담겨 있었다.
1980년, 《장백산》을 막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박선석 선생은 먼 길을 찾아와 자신이 쓴 소설 원고를 남영전 선생에게 내밀었다고 한다. 남영전 선생은 그 원고에서 한 사람의 가능성을 보았다. 자신의 일을 제쳐놓고 오전 내내 박선석 선생과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의 작품을 《장백산》에 실었다.
그때 박선석 선생이 어떤 마음으로 원고를 들고 먼 길을 찾아갔을지 나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자신의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원고를 내미는 손에는 기대와 함께 망설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그 원고를 진지하게 읽어주고 작품 속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한나절을 함께 이야기해준다면 어떨까. 그것은 단순히 글 한 편을 발표할 기회를 얻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자신의 글이 누군가에게 가닿았다는 사실, 앞으로도 써볼 만하다는 믿음을 얻는 일이기도 하다.
박선석 선생은 그 뒤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꾸준히 작품을 써나갔다. 《술고래 남편》, 《털 없는 개》 같은 작품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장편소설 《쓴 웃음》은 7년 반 동안 《장백산》에 연재되었다. 이후 여러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중국 소수민족 문학의 준마상도 받았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래전 박선석 선생님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민족의 태양 같은 분이오.”
그제야 그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태양은 자기만 빛나는 것이 아니다. 주변을 밝히고 다른 것들이 자랄 수 있도록 빛을 나눈다. 이름 없는 풀 한 포기에도 햇살을 보내고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묵묵히 빛을 내린다.
남영전 선생님에게 《장백산》도 그런 빛이 아니었을까.
《장백산》의 시작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창간 당시에는 출판기관도, 전문 편집인도, 필요한 자금도, 정식 등록번호도 갖추지 못한 이른바 ‘4무’의 상태였다. 잡지를 만들겠다는 뜻은 있었지만 그것을 현실로 이루기에는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몇몇 사람들은 낮에는 자기 일을 하고 밤이면 원고를 붙들었다.
김수영 선생은 다섯 식구가 사는 단칸방에서 밤마다 주방의 불을 밝히고 부뚜막을 책상 삼아 원고를 편집했다고 한다. 남영전 선생 역시 낮에는 선전부에서 일하고 밤늦게까지 《장백산》 원고를 보았다.
지금처럼 컴퓨터로 원고를 주고받고 휴대전화로 소식을 나누는 시대도 아니었다. 잡지 한 권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서는 사람의 발품과 손길이 필요했고 돈이 없으면 돈을 마련해야 했으며, 길이 막히면 다시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무’에서 시작한 잡지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조금씩 자리를 잡았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누군가 힘을 보탰고, 남영전 선생은 발이 닳도록 길림성의 관련 부문을 찾아다녔다. 마침내 ‘4무’에서 ‘4유’로 나아갔다고 한다.
외국의 한 지인이 수척해진 그의 몸을 추스르라며 보내준 1만 달러를 잡지 운영에 보탰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문인들에게는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술 한잔을 대접했다. 이름난 문인뿐 아니라 농민작가 박선석 선생처럼 자기 삶의 자리에서 글을 쓰는 사람의 가능성도 소중히 품었다.
《장백산》에는 김학철 선생과 정판룡 선생 같은 문단의 거장들의 글이 자주 실렸고 정세봉 선생과 박선석 선생을 비롯한 많은 작가의 작품이 독자들을 만났다.
나는 한 권의 잡지를 생각하기보다 그 잡지 안에서 자라난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좋은 문학지는 단순히 글을 싣는 지면만은 아니다.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 자신의 글을 세상에 내놓을 기회를 주고, 자신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가능성을 일깨워주는 곳이기도 하다.
때로는 원고 한 편을 받아주는 일이 한 사람의 문학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박선석 선생의 이야기가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나는 그와 비슷한 마음을 내 작은 휴대전화 대화창에서도 느끼게 되었다.
남영전 선생님은 첫인사와 함께 중국어로 이런 말씀을 보내셨다.
“新认识一位知己文友非常高兴,往后互相交流,共同探讨问题,也是有意义的事,期待着.”
새로운 지기 문우를 알게 되어 매우 기쁘며, 앞으로 서로 교류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知己文友’라는 네 글자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선생님을 문학의 아득히 높은 곳에 계신 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나를 한 사람의 ‘문우’라고 불러주셨다.
그 말이 참 고마웠다.
나는 그동안 선생님의 작품을 읽으며 존경하는 마음을 키워왔지만, 선생님에게 나는 아직 이름도 생소한 한 문학애호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네고, 앞으로 서로 교류하자고 하셨다. 상대가 누구인지보다 문학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반겨주시는 것 같았다.
그 뒤로 우리는 가끔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대화창에 글을 올리면 읽어주시고 “좋은 글입니다”라고 격려해주셨다. 한국 신문에서 새로운 문학상 소식이나 문인들의 소식을 발견해 대화창에 올리면 선생님도 읽어주시고 함께 기뻐해주셨다.
어느 날에는 이런 답이 왔다.
“@이자성(경기 화성), 좋은 소식 🌷🌷🌷”
또 어느 때는 내가 올린 한국의 한 문인의 문학 관련 글을 읽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자성(경기화성), 문학의 본질에 딱 맞는 통찰이네요 🌷🌷🌷”
짧은 문장이었다.
장미꽃 세 송이가 붙어 있는 작은 답장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꽃 세 송이를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평생 문학을 해온 큰 문인이 한국에서 살아가는 한 평범한 사람의 작은 관심까지 문학의 일처럼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참 묘한 일이다.
한때는 《장백산》이라는 큰 지면에서 이름 없는 작가들의 원고를 받아주던 분이, 세월이 흐른 지금은 작은 휴대전화 대화창에서 한 사람의 글을 읽어주고 있는 것이다.
큰 지면과 작은 대화창.
시대도 공간도 달라졌지만 사람의 글을 대하는 마음은 그대로인 것 같았다. 누군가의 글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사람에게 다시 써볼 용기를 주는 것. 나는 그것이 남영전 선생님이 평생 문학을 대하는 한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토템시를 읽으면서도 나는 선생님의 그런 시선을 느끼곤 한다. 오래된 신화와 전설, 자연과 생명의 흔적처럼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것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그 속에서 인간의 정신을 바라보는 눈이다.
토템이라는 오래된 문화의 뿌리에서 오늘의 인간과 세상을 읽어내는 시인의 눈. 나는 그 눈이 시 속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이어져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내가 더 깊이 존경하게 된 것은 시인의 눈만이 아니었다.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나는 40여 년 동안 문학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시작해 신문사 특약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 한국에 와서 철을 다루는 일을 시작했다.
문학과 멀어져 있던 시간에도 삶은 쉴 새 없이 흘러갔다. 철판을 재고, 도면을 읽고, 쇠를 자르고 붙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눈앞의 치수를 맞추고 틀어진 부분을 바로잡는 일에 익숙해졌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오래전에 놓아둔 글쓰기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도 가끔 생각했다.
‘내가 다시 문학을 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놓았던 일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젊은 시절처럼 마음만 앞선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글을 한 편 써놓고도 자신이 없을 때가 있었다. 내가 쓰고 있는 문장이 다른 사람에게도 읽힐 만한 것인지, 오랫동안 문학을 떠나 있던 사람이 다시 글을 쓴다고 해서 누가 관심을 가져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럴 때 선생님이 보내주신 짧은 한마디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좋은 글입니다.”
참 짧은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시 써보고 싶어졌다.
‘다시 써도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꼭 긴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때로는 짧은 한마디가 오래 꺼져 있던 마음속 불씨를 다시 살려놓기도 한다. 말한 사람은 가볍게 건넨 인사였을지 몰라도, 듣는 사람에게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격려가 될 수 있다.
박선석 선생의 첫 원고에서 가능성을 보았던 분이 이제는 내 작은 글도 읽어주신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내 글뿐이 아니다. 선생님은 대화창에 올라오는 매 편의 글을 보시고는 격려와 평어를 주시곤 한다.
물론 내 글이 그분의 눈에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그러니 그 칭찬을 지나치게 크게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선생님이 내 글을 어떻게 평가하셨는지 내가 함부로 짐작할 수도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한마디가 나에게 다시 쓸 힘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남영전 선생님을 단순히 유명한 토템시인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의 글을 읽고 그 글 뒤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아직 피어나지 않은 가능성을 기다려주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을 오래 한다는 것은 좋은 작품을 쓰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읽고, 그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아직 서툰 글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발견해주는 일 또한 문학을 지키는 방법일 것이다.
나는 박선석 선생의 이야기를 통해 그것을 보았고, 내 작은 글을 읽어주시는 선생님의 답장을 통해 다시 느끼고 있다.
그러면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문학은 혼자 쓰고 혼자 읽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쓴 글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닿고 그 마음이 다시 누군가에게 건너갈 때 문학은 종이 위의 글자를 넘어 살아 있는 것이 된다.
내가 요즘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기쁨을 새롭게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나는 가끔 선생님의 토템시를 생각하면서 또 다른 소망을 품어본다.
남영전 선생님의 수많은 작품과 토템시가 더 많이 영어로 번역되어 세계의 독자들에게 소개된다면 어떨까.
중국 조선족의 역사와 삶, 오래된 신화와 전설, 자연과 생명의 흔적 속에서 길어 올린 선생님의 시세계가 다른 언어를 통해 세계의 독자들과 만난다면, 그들은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의미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한 민족의 삶과 기억은 그 민족의 언어 속에 깊이 스며 있다.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안에 담긴 정서와 정신을 온전히 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번역은 단순히 말을 다른 말로 바꾸는 작업이 아닐 것이다. 한 문화의 뿌리와 한 시인의 정신을 다른 언어의 독자에게 건네는 일에 가깝다.
좋은 문학은 한 언어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다른 언어로 옮겨질 때 더 넓은 세상과 만나고, 서로 다른 문화와 마음을 이어주기도 한다.
누군가 선생님의 작품을 정성껏 영어로 번역해 세계에 소개해준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참 기쁠 것 같다. 세계의 독자들이 남영전이라는 이름을 알고 그의 토템시를 읽으며, 그 속에 담긴 자연과 생명, 인간에 대한 성찰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뜻깊은 일일까.
더 나아가 언젠가 세계 문학계가 남영전이라는 이름과 그의 작품에 주목하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웨덴 한림원에서 그 이름이 거론되는 날을 상상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물론 그것은 나의 소박한 바람일 뿐이다. 나는 어떤 상을 받을 수 있을지 예측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오랫동안 한 길을 걸어온 한 시인의 작품이 언어의 국경을 넘어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기를 바랄 뿐이다.
책 속에서만 만나던 시인을 작은 대화창에서 만난 한 사람의 문학적 소망이라고 해두자.
나는 아직 선생님을 직접 만나 뵙지 못했다. 차 한 잔을 마주 놓고 앉아본 적도 없고, 술잔을 기울이며 문학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꼭 얼굴을 마주 보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책으로 만나고, 어떤 사람은 한 문장으로 만나고, 어떤 사람은 작은 대화창을 통해 마음으로 만난다.
나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장춘에 가고 싶다. 남영전 선생님과 마주 앉아 차 한 잔을 나누며 그동안 책으로만 만나던 시인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다. 그분이 어떤 마음으로 《장백산》을 시작했는지, 토템시라는 자신만의 시세계를 어떻게 일구어왔는지, 그리고 문학을 하면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 여쭙고 싶다.
무엇보다 1996년 박선석 선생님이 왜 그분을 두고 “민족의 태양 같은 분”이라고 했는지도 다시 생각해보고 싶다.
그런 분과 마주 앉아 문학을 이야기하고 인생을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뜻깊고 행복할까.
그러나 지금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처음 대화창에 떴던 그 한마디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저는 토템시인 남영전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한 문인의 자기소개인 줄 알았다. 돌이켜보니 그것은 내게 오래 닫혀 있던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그 문이 다시 조금씩 열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나는 다른 사람의 좋은 글을 만나면 예전보다 더 기쁘다. 누군가 문학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반갑고, 좋은 작품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기쁘다. 한국 신문에서 문학과 관련된 좋은 소식을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대화창에 올리고 싶어진다.
아마 내가 받은 따뜻함 때문일 것이다.
한 사람에게 건너온 마음은 그 자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가 어느 순간 다른 사람에게도 흘러간다. 누군가에게서 받은 격려가 다른 사람의 글을 더 정성껏 읽게 만들고,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내 일처럼 반기게 한다.
《장백산》이라는 큰 지면에서 시작된 마음이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 나의 작은 휴대전화 대화창에까지 와 있다.
생각해보면 참 아름다운 일이다.
나는 그날 대화창에서 유명한 시인 한 사람만 만난 것이 아니다. 문학을 위해 오랫동안 한 길을 걸어온 사람, 다른 사람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눈, 그리고 다시 써보라고 등을 가만히 밀어주는 따뜻한 마음을 만났다.
언젠가 장춘에서, 혹은 한국에서 선생님과 마주 앉을 날이 온다면 그동안 받은 마음에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러나 만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이미 나는 책으로 선생님을 만났고, 글로 만났고, 작은 대화창에서 마음을 만났으니까.
오늘도 나는 작은 대화창을 바라보며 글을 쓴다. 화면에 꽃 세 송이가 피어나는 날이면 기쁘게 웃을 것이다. 하지만 꽃이 없어도 괜찮다. 선생님에게서 받은 마음은 이미 내 안에 오래 남아 있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만 만나던 시인을 작은 대화창에서 만난 것.
그 만남으로 다시 문학을 바라보게 된 것.
그리고 내가 받은 따뜻함을 다른 사람에게도 건네고 싶어졌다는 것.
나는 그것만으로도 참 고맙고 행복하다.
/이자성
2026. 10. 11일
화성 장안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