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기사스크랩
기사 출력  기사 메일전송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http://www.hmzxinwen.com/news/28413
발행일: 2026/03/13  함길자
오늘도 어머니를 그립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색바래져가는건 기억이라지만 마음속깊이 점점 더욱 진하게 느껴지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하늘나라에 가신지 30년 넘게  되는 저의 자애로운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사남매중 맏이로 태여났고 시집문턱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시부모님을 모시면서 시동생 다섯이나 손수 출가시켰답니다. 원래부터 말수적고 묵묵하신 어머니는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며느리로서, 안해로서,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 하신 현처량모였습니다.

 

어머니는 슬하에 년하차가 아홉살인 두 딸을 길렀는데 저는 막내딸로 자랐습니다. 응석둥이로 곱게 자란 저는 고집이 아주 셌답니다. 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자 앞집 인자랑 뒤집 미숙이랑 다 한족학교에 붙게 되자 “어머니, 나도 한족반에 가겠습니다.” 고 떼질썼습니다.“조선사람은 그래도 조선글을 배워야한다.”며 딱 잡아뗐기에 이튿날부터 저는 울며겨자먹기로 조선족반에 입학하여 우리 말 우리 글을 익혔습니다.   

 

십여년간의 학업을 끝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교편을 잡던 날 어머니는 동구밖까지 나를 바래다주면서 “선생님은 인내심이 있어야 된다. 아이들을 고와해야 한다.”하며 등을 밀어주던 일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어머니 가르침, 격려가 계셨기에 저는 사업에 참가한 이듬해부터 “우수교원’, “선진공작자”, “사덕모범” 등 영예를 안아왔고 오늘날의 어엿한 인민교원으로 성장되여 우리민족도 아닌 한족애들에게까지도 아름다운 우리말 우리글을 가르치고 있어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어려서부터 우리 글에 대한 애착을 갖고 노력하게 된것은 어머니 영향이 큰것 같습니다.  당년 그 간고한 경제형편속에서도 어머니의 철칙으로 매년마다 “연변녀성” 같은 잡지들을 주문하였고 저녁 밥 드시기 바쁘게 언니더러 랑독해라 재촉하셨습니다. 그 때 단편소설 “하고싶은 말” 언니는 아마 열번도 더 읽은 것 같슴다. 녀주인공이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아오면서 일만 묵묵히 하는 소재였 던것으로 기억됩니다. 온종일 농사일에 분망히 보내시고도 피곤도 하실테지만 한페지라도 꼭 읽고 직성이 풀리셨던 어머니였습니다. 아침이면 라디오방송도 참 즐겨들으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고향친구들은 우리 집이 부유했다고 부러워했답니다. 어머니 영향을 받은 저는 어렸을 때부터 조선어문에 특별한 흥취를 느꼈고 조선어문작문경연, 랑독경연에서 여러번 수상하여 어머니는 몹시 흐뭇해 하셨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열번 생각할 때 자식이 한번 생각해도 효자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학교를 필업하고 저는 고향과 백리 떨어진 현성학교에서 기숙사생활을 하게 되였습니다. 호도거리가 시작되고 이미 예순에 가까왔던 아버지는 위병으로 시름시름 앓았기에 어머니는 집일을 끝내고는 소일거리를 하면서 저의 뒤바라지를 하였답니다. 어느 한번은 어머니께서 검정귀버섯따기 부업에 갔다가 개에게 허벅다리를 물리기도 하였답니다. 하도 심해서 처음엔 살이 쩍 갈라지면서 피도 흐르지 않더랍니다. 그런것도 모르고 저는 집에 생활비를 가지러 갔습니다.

 

어머니는 꼬깃꼬깃 말아둔 오원짜리 넉장을 손에 쥐여주면서“이번 달에 이 돈으로 생활소비하거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옆에서 지켜보시던 아버지께서 “여보, 당신의 다리는 어찔 예산이요?” 안타까움과 원망조로 물었습니다. “어머니, 이 돈 어데서 마련했습니까?”제가 다그쳐묻자“아이들이 알 일이 아니다. 빨리 돈을 넣어라”며 어머니는 저를 재촉하셨습니다.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이 돈은 개주인집에서 치료값으로 준 돈이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일전 한푼 쓰지 않고 비누를 갈아붙이면서 자신절로 소염했답니다.

 

그때로부터 어머니 오른쪽 허벅다리에는 푹 패인 개 두이발자국이 흔적을 남겼습니다. 어렵게 아문 상처를 보는 마음도 짜릿해났는데 그당시 약 한첩 쓰시지 않고 집에서 재약으로 치료하면서 하루도 휴식하지않고 일밭에 나가신 어머니 아픔을 어떻게 말로 형언할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이 글을 쓰노라니 눈물이 앞을 가리우며 목이 멥니다.

 

“부끄럽습니다.”

“ 미안합니다.”

 

크게 출세도 못하면서 공부한다는 핑계로 부모님 속 썩이고 집일엔 물 한방울도 묻히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1991년 그해 초가을, 어머니는 몹쓸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였습니다. 저의 속셈을 알아차린 어머니는 “아버지가 나를 돌보니 너는 시름놓고 학교에 출근하여라.”고 저를 독촉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스물날동안 점적주사로 치료받던 어머니는 호전을 가져오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점점 식어가는 어머니 시체에 쓰러져 가슴치며 통곡해도 어머닌 58세를 일기로 영영 돌아가셨습니다.

 

30년세월 아픈 추억에 모대기는 저는 일년에 두번, 청명과 추석에는 어머니묘지를 찾아가 정성껏 성묘를 할뿐입니다.

 

“어머니, 막내딸이 찾아왔습니다. 무고하셨습니까?”

묵묵무답입니다. 살아생전에 효도한번 할 기회마저 주지않고 총망히 북망산에 가신 어머니, 난 너무나 가슴이 미여집니다.  이 불효자식은 오늘도 부모님을 그리며 웁니다. 어머니 보고싶습니다. 꿈에서라도 한번만…

/함길자



기사 출력  기사 메일전송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함길자의 최신기사   [ 다른기사 더보기 ]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포토뉴스

사진작품

미술작품

한중방송 라디오방송
음악감상
사진은 진실만 말한다
방습거울

 가정여성 

한민족여행사

 동포사회 

TV광고

영상편지

한민족신문 韩民族新闻
 
  l   회사소개   l   광고안내   l   구독신청   l   기사제보   l   개인정보보호정책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