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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6/05/10  소은 김순희
오월의 바람

초여름의 문턱, 오월이 오면 세상은 온통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투명한 연두색으로 채워집니다. 사계절 중 가장 찬란한 이 계절을 완성하는 것은 당연히 '바람'입니다. 

 

겨울의 칼바람처럼 날카롭지 않고 한여름의 열풍처럼 끈적이지 않는 오월의 바람은 마치 공기 중에 보이지 않는 비단 실을 풀어놓은 듯 부드럽고 매끄럽습니다.

 

창문을 열면 기다렸다는 듯 오월의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듭니다. 그 바람 안에는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온 아카시아 향기가 묻어 있고 갓 돋아난 잎사귀들의 생경한 풀냄새가 담겨 있습니다. 

 

이 바람은 단순히 기온의 차이로 이동하는 공기의 흐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잠들어 있던 감각을 깨우고 먼지 쌓인 기억의 갈피를 슬며시 넘기는 다정한 손길입니다.

 

문득 수십년전 잔디밭에 누워 바라보던 하늘이 떠오릅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바람이 불면서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는 그 촉감에 우리는 세상 모든 고민이 해결될 것 같은 근거 없는 락관에 젖기도 했습니다. 오월의 바람은 이렇듯 과거의 가장 눈부셨던 순간을 현재로 불러오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눈으로 좇아보면 가로수의 우거진 잎들이 일제히 몸을 뒤집으며 은빛 물결을 만들어냅니다. 사람들은 흔히 '흔들림'을 불안의 상징으로 보기도 하지만 오월의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유연하게 휘여지는 가지들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자연이 부르는 무언의 찬가입니다.

 

만약 바람이 없다면 숲은 얼마나 적막할가요. 바람이 있기에 숲은 노래하고 꽃가루는 먼 여행을 떠나며 고인 공기는 신선한 생기를 얻습니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 아닐가요. 평온하기만 한 삶보다는 때때로 오월의 바람 같은 자극이 있어야 마음에도 새잎이 돋고 꽃이 피는 법입니다. 너무 강해 부러뜨리지도 너무 약해 머물러 있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시련과 변화가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현대인의 삶은 늘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와 같습니다. 에어컨 바람에 익숙해진 우리는 자연이 주는 고유한 온도를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공원 벤치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들리고 느껴집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의 결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적당한 서늘함 그리고 그 바람이 실어다 주는 이름 모를 들꽃의 안부까지 이 짧은 찰나의 경험은 어떤 값비싼 명상 프로그램보다 깊은 위로를 건넵니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 이대로 충분히 아름답다"
라고 바람은 속삭이는 듯합니다.

 

오월은 금세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곧 습하고 뜨거운 여름의 공기가 이 자리를 대신하겠지요. 하지만 이 짧은 계절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오월의 바람은 우리에게 '환기'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정체된 생각, 무거운 마음, 굳어버린 표정을 이 투명한 바람에 잠시 내맡겨 보는 것은 어떨까요.

 

오늘 퇴근길에 혹은 산책길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어깨 위로 머리카락 사이로 오월의 바람이 지나갈 때 그 속에서 당신만의 초록빛 평온을 찾으셨으면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오월의 바람은 언제나 변함없이 다정한 온도로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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