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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9/02/14  이화실
백설지 (白雪纸)에 그린 꿈

봄…봄…봄이 왔다. 겨우내 설한풍을 이겨낸 나무들은 불어오는 봄바람의 애무에 파르르 몸을 떤다. 나무는 새로운 싹을 틔워야 할 봄이건만 겨우내 눈이 오지 않아 대지의 메마름에 목마름의 갈증을 하늘 향해 호소하고 있었다. 나도 시골 태생이라 밭농사 하는 사람들이 가물어서 씨붙임이 잘 안될가봐 은근히 걱정되기도 하였다.

날이 희붐히 밝아온다. 따근따근한 커피잔을 들고 페부에까지 스며드는 향기를 음미하면서 창밖을 내다 본다.

와! 동화속 같은 눈부신 은빛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창턱에 소담히 싸인 눈은 기다렸다는 듯이 눈부신 미소로 반겨준다.

“하늘에서 겨울내 눈을 안 주시더니만 하늘의 눈 꽃 창고가 넘쳐나 봐’ 마음을 녹이는 눈꽃 향기에 이끌려 새벽 산책에 나섰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눈은 봄이 오는 길목에서 산과들을 순백의 옷으로 입혀 주었고, 오염으로 뒤덮인 인간 세상을 맑고 청신하게 정화시키고 있었다.

봄은 어느덧 우리 앞에 성큼 와 있었건만 아기 마음같은 눈송이들은 마치 겨울을 봄에게 내어주기 싫어서 겨울의 치마자락을 부등켜 안고 놓지않으려고 아등바등하는 어린애의 모습 같았다. 희망의 새봄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건만 살같이 빠른 세월에 늘어나는 주름결을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이 울적해진다.

대동강이 풀린다는 우수 경첩이 지났건만 옷깃을 여미게 하는 쌀쌀한 날씨다. 청신한 굴맛나는 공기를 한껏 들이 마시며 동 터오르는 보라빛 아침 노을을 바라 보느라니 간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뽀드득, 뽀드득 투톤우드블럭을 연주하는듯한 절주속에 만물이 해산하는 생명의 환희가 천상의 멜로디가 되어 메말라 가는 나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며 갈한 목을 축인 숲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기지개 펴는 소리가 나의 귀를 즐겁게 한다.

지금껏 두 자녀의 어머니로 한 남편의 안해로 생활의 의식주를 위하여 아글타글 천방지축 앞만 보고 달려온 나는 감성에 무딘 사람으로 변해 버렸었다. 그런데 이 새벽에 처음 느껴보는자연의 황홀함에 흥분되었다. 나는 소녀가 된 듯 두손으로 하이얀 눈을 모아쥐고 하늘 높이 날려본다. 봄날에 피여 난 꽃잎처럼 하롱하롱 날리는 눈송이는 석양의 얼굴에 소담히 내려 앉는다.녹아내리는 꽃잎은 젊음의 정기가 되어 메마른 마음 구석구석에 불어넣어 주었다.

‘와! 하트구나’

여름이면 효녀 심청이의 영혼을 담은듯한 련꽃을 선물하던 련못에 오늘은 하눌애서 펴놓은 백설지에 누군가 하트를 그려놓고 아이러브(ILOVE) 라는 글자도 적어 놓았다. 이 세상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사랑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순이 넘는 나이지만 사랑의 하트를 보니 마음이 설레인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설레임, 기다림, 슬픔, 기쁨, 에너지 ,동력….하이얀 눈꽃 향기에 흠뻗 취하여 사랑의 신비를 운운하다니… 꼭꼭 숨어있던 감성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며 나의 가슴을 콩콩 뛰게 했던 첫사랑이 하이얀 눈꽃 속에서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스쳐간다.


신묘막측한 인간의 심리를 어찌 다 글로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표현할수 있으랴. 그 사랑에 울고 웃는 것이 인간이 아니던가. 남편과 사십년을 가까이 살아오면서 지금도 첫 사랑을 마음에 담고 있으니 참 내가 한심 한것같다., 그래서 남편과 지금까지 티격태격하며 승부없는 전쟁을 하였었는가? 누군가가 내 마음을 훔쳐보는 것만 같아 주변을 둘러 본다.

 

앙증맞은 다람쥐 하나가 반짝이는 동그란 눈으로 나를 훔쳐 보더니 기쁜듯 나무위를 오르락 내리락 한다. 마치 하늘이 주신 하얀꽃 선물에 즐거워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나는 하트를 다시 바라본다. 이 사람은 첫 사랑이 그리워서일까? 아니면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것일가? 아니면 뜨거운 사랑속에 빠져 행복해서일까? 이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아마 얼움 왕국으로 되어버리겠지, 그래서 톨스토이는 “사람은 결국 사랑을 먹고 산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순에 무성한 가지를 치지만 사랑의 하트는 내 마음의 한기를 몰아내고 금새 마음이 따뜻해 진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감사하며 사랑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도 사랑하며 살기를 기도했다. 하트를 그린 사람의 사랑도 진실된 사랑으로 꽃피여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하트에서 눈을 떼며 조금 걸으니 광장무를 추던 곳에 펼쳐진 백설지에 한 사람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낮고 높은 산, 세개의 봉우리, 산에는 앙상한 나무들, 채 녹지 않은 얼음들 사이로 조잘조잘 흐르는 물---

“와! 그림을 참 잘 그리시네요. 화가이신가봐요”

“예. 화랑에 다니며 배우는 중이랍니다.” 이순이 넘어보이는 아저씨가 걸걸한 목소리로 하는 말이다. 한참이나 열심히 그리시더니 “다 그렸다”하면서 아저씨가 허리를 편다.

”아저씨, 동물들과 나무에 잎새와 새들은 안그리세요” 중학생쯤 돼 보이는 남자애가 운동을 하다가 아저씨의 그림을 한참이나 들여다 보더니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

“음, 그건 네가 그려보거라”라고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자리를 뜬다. 그 학생은 머리를 갸우뚱하더니 계속 운동을 하러가는 것이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림을 바라 보았다. 완벽하다고 생각하면 감탄뿐이겠지만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은 단순하게 살아가는 나를 사색속에 잠기게 했다. 미완성인 우리의 인생, 나의 지나온 삶은 어떤 그림이였을까 ? 지금부터는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

내나이 어느덧 중년이라기에는 염치없는 것 같고 로년이라기에는 서글픈 이순이다. 이제야 이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만 같다. 덤불속에 피여난 손톱만한 꽃송이가 보이고, 하롱하롱 춤추는 잎새에 마음 설레고, 바다가의 고래들의 아름다움 몸짓에 매료되고, 불타는 단풍든 산을 보고 환호한다. 그런데 허리를 펴고 거울을 보니 얼굴에는 주름결이 일렁이고 머리에는 은실만 토해 내였다. 헤쳐온 가시밭길 반추해 보니 죄로 얼룩진 흔적뿐이다. 아련한 마음으로 뒤돌아보니 흠도 티도 없는 백설이 어느덧 어지러운 발자국 살포시 덮어 놓았다. 하이얀 눈은 세파속에 찌든 상처진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며 하늘에서 피여나는 하얀 향이 되어 나의 지친 영혼을 위로해주고 있었다. 나는 대자연이 주는 신비한 선물에 흠뻑 빠져 마음이 탁 트이며 울적했던 가슴은 한결 상쾌해진다.

중년이면 어떠랴 노년이면 어떠라 일본에 시인 시바타 도요할머니는 백세에 시집을 출판하여 일본 열도를 감동시키지 않았던가! 그 할머니처럼 뛰여나게 못하더라도 남은 여백을 풍요로움으로 채워야겠다.

칠순이 넘는 노부부같아 보이는 두 노인이 나무가지마다 만발한 눈꽃을 가리키면서 마주보며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혹시 넘어질세라 팔장을 끼로 백설지에 비뚤비뚤한 발자국을 나란히 찍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걸어온 삶이 어떠하였던지 황혼을 아름답게 물들여가는 알콩달콩한 모습이 참 부러웠다.

“나도 이젠 낲편과 함께 산책해야지”라며 아름다운 구상도 해 보았다. 운동하는 사람, 아침 시장으로 향한 발걸음도 찍혀지기 시작했다.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람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있으랴” 라는 어느 시인의 글처럼 비록 온당한 걸음은 아닐지라도 새벽을 꺠우며 삶을 정열로 불태우며, 희망찬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이 존경스럽기만 하다. .

앙상하고 벌거벗었던 나무들에는 가지마다에 생명의 꽃이 하얗게 피여 서로 예쁘다고 자랑이다. 그 꽃들은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얼굴이되어 웃음지어 반겨주며 시린 마음에 훈훈한 사랑으로 감싸주고 있었다. 나도 두 손으로 하트를 날려 ‘사랑해’ 라며 나의 마음을 전했다.

만물이 태동하는 봄, 봄, 나의 인생 석양이지만 앞에 펼쳐진 백설지에 나의 꿈을 한획한획 그려야겠다. 그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야지, 달려가다가 녹아 내릴 때 메말라가는 풀 한포기의 목마름을 해소할수있는 한방울의 물이 되여도 나는 뿌듯할 것이다. 마음속에 품고만 있던 꿈을 이 새벽에 하늘에서 선물한 백설지에 그려갈수 있다는 것이 참 고마울 뿐이다. 나는 담담한 마음으로 나의 앞에 펼쳐진 백설지에 핑크빛 꿈을 열심히 그렸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울만 시인님의 시 한구절을 적어놓았다.

‘나이를 먹었다고 사람은 늙지 않는다

리상을 잃을 때 비로소 늙는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은 더하지만
정열을 잃으면 마음이 주름진다.
…..
머리를 놓이 쳐들고 희망의 물결위에 올라 있는 한
여든 살이 되더라도 사람은 청춘으로 지낼수 있다’.

불타는 아침 노을은 백설지에 그려놓은 그림에 어우러져 서서히 핑크색으로 물들어 갔다.

 

/연길시 리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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