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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8/12/13  이화실
고향의 시내물

날 낳아주고 키워준, 또 칠색무지개 같은 꿈도 심어준 고향을 떠난 지도 어언 2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나는 고향의 시냇물을 늘 잊지 못하고 있으며 당장이라도 달려가 품속에 안겨 물장구라도 치고 싶다.


지금도 내 시냇물은 그때처럼 맑을까? 그때처럼 청아하게 노래하면서 흐를까? 인정 많던 고향의 사람들도 그립건만 고향의 시냇물에 대한 그리움은 늘 짓궂게 내 마음을 파고들 때가 많았다. 언제쯤 고향에 가야 하겠는데 하면서 벼르고 별렀건만 50여년이나 앉은 석동으로 자리를 굳건히 틀고 살아오시던 어머니마저 13년 전에 내가 사는 도시로 이사오시다보니 그 후로는 다시 고향 갈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지난 가을에 동창모임을 고향의 학교에서 가진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 내가 살던 고향! 그래 고향에 가면 시냇물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토록 그립던 고향의 시냇물! 전화기를 놓은 나의 입에서는 어느새 노래까지 흘러나왔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고향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이튿날 오전 우리 동창생들을 앉힌 버스는 고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헤아릴 수도 없는 산과 들을 지나 한 시간 반이나 달려서야 버스가 목적지인 만보중학교에 도착했다. 나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학교에서 백여 미터 떨어져있는 고향의 시냇물로 향했다.


내가 살던 고향은 금광촌이라고 하는 물 좋고, 인심, 좋았던 동네였다. 인제는 대부분 조선족들은 다 한국 아니면 시내로 이사를 가서 오늘은 한족동네로 되었지만 그러나 마을 앞에 있는 깨끗하고 맑은 시냇물은 변함없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고향의 시냇물은 금방 돋아난 봄풀처럼 새파란 나의 동년, 감미로운 추억 속으로 나를 끌어들였다.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나는 옆집의 송월이, 그리고 뒷집의 철옥이를 불러서는 시냇물에서 놀기가 일쑤였다. 비오는 날을 제외하곤 매일이다시피 시냇물에서 놀았는데 정오의 해를 바라보며 시냇물가로 달려가는데 난 다리가 부실하다보니 맨 나중에 도착하군 했다. 그때면 벌써 송월이와 철옥이는 이미 물속에 들어가서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나도 옷을 벗어서는 풀 위에 활 던지고는 물속에 들어선다. 그러면 우리 셋의 물싸움이 또 시작된다. 그 놀이가 싫증나면 우리는 또 물가에 나와서 진흙으로 여러 가지 동물도 만들고, 집도 짓고 허물고, 또 짓기도 했다. 우리는 이렇게 실컷 놀다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서야 아쉬운 마음으로 집에 들어서면 엄마의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너 그 옷을 좀 봐. 흙이 가득 발리었구나. 또 풀물도 들었고… 이 옷들을 내가 씻어 못 대겠다.”


욕먹을 때는 입이 한자나 나오다가도 이튿날 또다시 시냇물을 만나면 그렇게도 좋았었다. 물이 어찌도 맑고 맑은지 얼굴을 비춰보면 거울처럼 환히 들여다보였고 신으로 시름없이 헤엄치며 오르내리는 아기고기떼들을 살짝 담으면 신안에 가득 담겨졌다. 좁은 신안에서 맴돌아 치는 고기가 불쌍하여 다시 물속에 넣으면 좋아라고 헤엄치는 그 재미로 해서 우리는 잡고는 놓아주고 하면서 놀았다.


나는 여자애였고 또 지체장애인이었지만 장난이 심했다. 쩍하면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에 기어올랐고, 쩍하면 큰 강에 가서 헤엄을 쳤다. 한번은 만보의 넓은 벌판 중간을 가로질러 흐르는 고동하에서 헤엄치다가 키 넘는 곳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나온 적이 있었다. 이 일을 알게 된 엄마는 빗자루로 나를 때리시면서 다시 고동하에 가는 날에는 가만두지 않겠다고 야단치셨다. 그래도 엄마 몰래 가만히 큰 강에 가서 헤엄치면서 놀았는데 그때는 엄마의 마음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 엄마는 늘 한 조각의 엷은 불안이 가슴의 구석구석을 연기처럼 채웠으리라.

그 어느 날, 내가 나무에서 떨어질 것 같아, 또 내가 익사할 것 같아 엄마의 조바심은 여간 하셨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점쟁이한테 찾아가서 나의 액운을 방토를 해달라고 하셨다.


점쟁이는 물귀신이 날 부르고 있으니 방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것인즉 귀신한테 밥을 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 잔잔한 비가 내리던 날 아침, 엄마는 잡곡밥에서 새하얀 이밥만 따로 떠서 찬장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그 세월에 이밥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지라 나의 눈길은 자꾸만 찬장 위에 쏠렸다. 그러면서 점심에 귀한 손님이 우리 집에 올 거라고만 생각했다. 밥을 다 먹은 후, 엄마는 나에게 깨끗이 씻은 옷을 입히고 그 밥그릇을 들고 어데론가 날 데리고 가셨는데 그곳이 시내물가였다.


“오늘 정성스레 해온 밥을 먹고 제발 우리 딸애를 데려가지 말아주소.”
엄마가 이렇게 밥을 물에 던지며 빌던 모습이 지금도 나의 눈에 선하다.

그 후에도 나는 계속 나무에 바라 오르고 큰 강에서 놀 때가 많았지만 사고 한번 없었다.


고향의 시냇물은 언제나 나에게 삶의 지혜를 배워주었고, 또 내 꿈을 살찌게 해주었다. 시냇물처럼 깨끗하게 사는 법,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노래만 부르며 사는 법, 시냇물처럼 모든 걸 품어줄 줄 아는 그런 너그러움…


열 살 때의 어느 저녁, 나는 송월이와 철옥이와 함께 시냇물에서 물장난을 하다가 건너 편 생산대남새밭에 눈길이 멎었다. 거기에는 새빨간 토마토들이 탐스럽게 달려있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애들아 우리 저 토마토를 따먹자.”
내가 먼저 이렇게 외쳤다.


그러자 담이 작은 송월이가“그러다가 한족 아바이한테 붙잡히면 어떡해? 그 아바이 막 때릴 거야.”라고 주저앉는 바람에 셋은 잠시 요지부동했다. 그랬다. 바로 초막 안에서 한족 아바이가 창문으로 밭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대로 집에 돌아가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우리 집은 이십 평방이 되나마나한 채마전이 있었지만 다른 채소를 많이 심느라고 토마토는 심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먹을 돈도 없었다. 토마토가 무척 먹고 싶었던 나는 어떻게 하나 오늘 반드시 토마토를 훔쳐 먹어야겠다고 윽별렀다.


“봐라, 저 아바이가 소변보러 간다. 이럴 때 뜯으면 된다.”
철옥이가 소리쳤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아바이는 바지춤을 움켜쥐고 변소로 가는 것이었다. 좋은 기회였다.


우리 셋은 제꺽 감자밭을 지나 토마토 밭에까지 접근하였다. 나는 재빨리 제일 큰 것으로 다섯 개를 따서 옷 앞섶에 감쌌다.


“요 계집애들 어디 맞아봐라.”
별안간 그 아바이가 막대기를 휘두르며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우리 셋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죽기내기로 뛰기 시작했다. 그때 다리가 불편했던 나는 빨리 달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애들보다 뒤에 떨어졌다. 그래도 붙잡히지 않겠다고 절뚝대며 죽기내기로 그 애들을 뒤쫓아 갔다. 하지만 원래 불편한 다리가 막 떨려나면서 더구나 말을 듣지 않다보니 그 아바이한테 곧 붙잡힐게 뻔했다.


(아 이걸 어쩌나? 오늘 영락없이 얻어맞게 되었구나.)
나의 가슴은 쉼 없이 두근거리면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 아바이는 정말 성격이 사납기로 이름이 있었다. 한 달 전에 형식이가 참외를 훔쳐 먹다가 붙잡혀 귀싸대기를 얻어맞았고, 또 며칠 전에 다른 애가 땅꽈리를 훔치다가 단단히 혼뜨검 당했다.


나는 막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행여나 하고 최대의 노력을 다해서 달았다. 그러나 그 아바이는 금방 나를 뒤쫓아 오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아바이가 내 곁을 지나 앞에서 달리는 철옥이를 붙잡는 게 아니겠는가?


철옥이는 울상이 된 채로 그 토마토를 몽땅 빼앗겼다. 물론 송월이도 붙잡혔는데 그 애들은 매는 맞지 않았지만 된욕을 먹은 후 밭에서 쫓겨 갔다. 나도 인제 그 애들의 신세를 면치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겁이 더럭 났다. 그래서 머리를 수그리고 멍하니 서있었다.

조금 후, 그 아바이가 밭고랑으로 되돌아 올 때 나는 겁기 어린 눈으로 토마토를 꺼내는데 그 아바이는 아직도 분이 내려가지 않는지 씩씩대며 이렇게 말했다.
“넌 토마토를 가지고 어서 집에 가거라.”
“?……”


“너 다시는 이렇게 훔치면 안 돼! 알았지?”
그 아바이의 목소리는 퍽 온화했다.


그날 저녁 나는 훔쳐온 토마토를 먹으며 낮에 있었던 일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늘 다른 애들은 훔친 토마토를 모두 빼앗겼지만 내 것은 그 한족아바이가 안 빼앗으면서 집에 가져가라고 했어요. 날 생각해주는 그 아바이가 참 좋아요”


나의 말에 아버지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시더니“그 아바이가 널 해쳤구나.”하고 혼자말로 중얼거리셨다.
이튿날 아버지는 날 데리고 가서 토마토 값을 물어주셨다. 우리가 그 도랑둑을 따라 집으로 올 때 아버지는 날 보고 이렇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이 시냇물을 좀 봐라. 얼마나 깨끗하니? 때론 사람들이 빨래하거나 쓰레기를 던져서 물을 흐려놓아도 부르던 노래는 그냥 부르면서 앞만 보면서 달려가고 있지. 너는 불쌍한 애지만 그렇다고 동정만 바라면 안 돼. 이 시냇물처럼 항상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야하고 모든 걸 이겨내는 그런 사람이 돼야 해.”


그랬다. 간혹 창살같은 비 줄기가 내리 꼰질 때면 시냇물은 흐린 모습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다. 비온뒤 하늘이 맑으면 시냇물은 그 작은 가슴으로 넓다란 푸른 하늘을 안을 줄 알았고, 밤이면 별들이 돌다리 위에서 깡충대다가 시냇물 속에 들어가서는 나올 줄 모르는 그런 놀이터기도 했다. 가담가담 괴로워지는 마음을 달랠 길 없어서, 아픈 마음을 토하러 시냇물을 찾아가면 잠시나마 그런 마음을 삭일 수 있었고, 다시금 고운 꿈을 키워주던 시냇물이었다.


시냇물은 또 온 동네의 생명줄이었다. 자연의 풍화 예측키 어렵다고 어떤 해에 가물이 들어 옥토들이 아우성 칠 때면 시냇물은 온 마을의 밭을 적셔주는 감로수였다. 깨끗한 시냇물을 실컷 마신 곡식들이 미풍에 춤추는 자태를 보면서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였었다.


시냇물은 또 이 동네 저 동네의 개구쟁이들의 좋은 놀이터였다. 잠간이라도 시간만 있으면 애들이 찾아가서는 마음껏 동년을 즐기는 웃음천국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동네아줌마들이 빨래하면서 서로가 재미나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빨래터기도 했으며 마을의 부지런한 어른들의 좋은 목욕 터이기도 했다.
어디 이뿐이랴! 너무나 깨끗해서 지나가던 해님도 달려가던 구름도 홀랑 뛰어들어 목욕을 했고 또한 여름한철이면 물고기들이 많기도 했다. 돌종개, 버들치, 메사구… 그래서 동네 어른이고, 애들이고 반두를 가지고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렇게 많이 잡아도 줄어들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엄마와 같이 엄마의 친구네 집에 가서 놀다가 돌아오는데 시냇가에서 나지막이 우는 소리가 들려와서 엄마와 같이 다가가 보니 봉규엄마였다.


“아니 웬 일이요? 무슨 속상한 일이 있어서…”
엄마의 물음에 봉규엄마는 잠간 말이 없더니 입을 열었다.
“애 아버지가 어데서 술 많이 마시고는 와 주정을 하길래서… 내 왜 저런 나그네를 만났는지 하고 생각하니까 자꾸 눈물이 나오는데 애들 앞에서 눈물 보이기 싫어 여기 나와 가만히 운다는 게… 그 누구와 말하기보다 그래도 여기 시냇물에 와서 이렇게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오.”


이렇게 시냇물은 아줌마들의 하소연도 묵묵히 들어주었다.
오늘날 우리 동네는 초가집들 대신 덩실한 기와집으로 변했고 또 사람들도 다 바뀌어 더는 고향의 정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고향의 시냇물은 여전히 옛 모습을 잃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서 흐르고 있다. 또 여전히 변함없는 목청으로 노래 부르고 있어서, 여전히 깨끗한 모습이어서 다소마나 위안이 되었다.

/박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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