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슬픔도 아픔도 헤아리지 않은 채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덧없이 흘러갔다. 강물이 돌을 만나면 돌을 감고 돌아가듯 세월도 슬픔을 만나면 슬픔을 감고 돌아가면서도 멈추지 않고 흘렀다. 돌아보면 그렇게 흘러온 시간이 참으로 길고도 짧다.
올해로 시어머님 년세가 구순을 훌쩍 넘기셨다. 얼굴에는 그리움을 삭여낸 주름이 깊게 자리했고 귀도 어두우시지만 등은 별로 굽지 않으셨다. 본래 왜소하시던 몸이 이제 더 야위여 옷을 입으시면 옷만 남은 듯하다. 그 여린 몸으로 일주일에 한 번은 당신 절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씩 5층에서 1층까지 계단을 오르내리는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으신다.
무엇보다 우리 가족을 놀라게 하는 것은 시어머님의 기억력이다. 시어머님 댁의 출입문 비밀번호를 시어머님은 언제 한번 다시 입력한 적이 없다. 하기야 그럴 만하다. 그 수자가 바로 큰아들 전화번호 뒷자리이기 때문이다. 문을 열 때마다 짚이는 그 수자 속에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배여 있다.
올여름 로인절에 시어머님을 모시고 둘째 아들 부부와 딸 그리고 시어머님의 시조카들과 친정 조카들까지 십여명이 해당화식당에 모였다. 그날 시어머님은 여느 때보다 멋을 부리신 듯 하늘색 적삼에 하르르한 연분홍 고운 수건을 목에 두르고 자그마한 가방까지 메고 오셨다. 아들이 없는 며느리를 늘 그러하듯 시어머님은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내 손을 잡고 당신 옆자리에 앉혔다. 빙글빙글 도는 자동 밥상에서 나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시어머님이 즐기시는 돼지고기, 물고기 찜, 떡을 집어 드렸다. 평소 소식하시는 분인데 그날은 맛있게 잡수시는 것 같았다.
자리가 무르익자 시어머님은 일흔이 넘는 시조카를 바라보며 문득 입을 여셨다.
“내가 막 시집왔을 때 네가 겨우 세 살이였지.”
그 조카는 2살에 친어머니를 잃고 우리 시어머님이 4살까지 보살펴 주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시어머님을 '엄마'라 부르며 따랐다. 시어머님은 그 조카가 신혼방에 들어와 당신 팔을 베고 잠들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냈다. 칠십년도 더 된 옛날 일인데 어제일처럼 생생했다. 시조카는 어린 시절이라 그때 기억은 희미하지만 마음은 기억하고 있다고 웃으며 받았다. 그러자 시조카 아내가 "작은엄마는 백세도 문제없다"고 장담했고, 둘째 아들 부부가 "우리 어머니 기억력은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했으며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문득 지나간 겨울들이 떠올랐다.
겨울의 마지막 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슬픔이 깔린 눈길을 발 가는 대로 걸었다. 시어머님 댁이다. 시어머님은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어 주시더니 눈사람이 된 며느리의 옷에 앉은 눈을 손수 털어 주셨다. 나는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았고, 시어머님은 뜨거운 물 한 컵을 따라주며 내 옆에 말없이 앉으셨다. 긴 침묵 속에서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 들렸다. 말없이 흐르는 그 침묵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이요 아픔이였다. 시어머님 눈빛에 비낀 그리움을 나는 읽을 수 있었고 내 눈가에 맺힌 눈물의 깊이를 시어머님도 알았을 것이다.
내 남편은 예고도 없이 쉰아홉 나이로 사랑하는 가족과 어머님의 곁을 떠났다. 해마다 그날이면 이렇게 시어머님을 뵙고 왔다. 문을 닫고 돌아서면 시어머님은 "하늘도 무심하지. 나이 먹은 어미를 순서대로 데려갔으면 좋으련만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귀신이 눈이 멀었지!" 하고 통곡하며 하늘도 땅도 원망하셨다.
하얀 눈은 사정없이 내려 쌓이고 녹기를 반복하며 겨울은 여러해 지나갔다. 올해의 겨울은 유난히도 포근했다. 눈은 변함없이 펑펑 내리는데 내리는 족족 녹아버렸다. 오늘은 남편의 기일이다. 벌써 십년이 지나고 오년이 더 지나갔다. 나는 올해도 어김없이 시어머님 댁을 찾았다. 지난 겨울처럼 시어머님이 내 발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 주시리라 했는데 안에서 기척이 없었다. 남편의 전화번호 뒷자리 수를 입력하고 집에 들어섰다. 백발이 성성한 시어머님은 오늘따라 더 작고 가여워 보이셨다. 얼굴과 이마의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로 언제나 슬픔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오랜 세월 우리는 오늘이면 말없이 서로의 눈빛 속에서 같은 그리움과 슬픔을 다독였다. 그런데 오늘은 웃으며 반갑게 저를 맞이하시는 시어머님의 표정이 예년과 달랐다. 십수년 만에 처음 보는 시어머님의 모습에 나는 흠칫했다.
"어이구, 큰며느리가 오늘은 무슨 날이기에 공부하러 가지 않고 나를 보러 왔네."
시어머님은 잡수시던 과자봉지를 활짝 열어 내밀었다. 나는 내가 무슨 공부를 다시 하느냐고 물었다.
"모르지…"
아마도 내가 문학 공부를 하는 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 듯했다. 시어머님은 오늘이 어떤 날인지 도무지 모르고 계셨다. 예전과 달리 아무런 슬픔도 보이지 않으셨다. 밥상머리에서 딸에게 잔소리를 하고 동네 이야기를 꺼내시는 모습을 보며 순간 허탈함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세월이 흐르니 아픔마저 무뎌져 이렇듯 담담해지신 것일까. 그러나 이내 백세를 올이추니 기억이 흐려지는 것은 물 흐르듯 당연한 일이라고 속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시어머님의 집 문을 나섰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문 뒤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었지만 예년의 그 통곡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올해 6월의 어느 아침, 핸드폰이 울렸다. '시엄마'라는 세 글자가 화면에 떴다. 시어머님께서 소뼈를 고았으니 와서 먹으란다. 아침을 잘 먹지 않는다며 안 가겠다고 하자 전화 너머로 시어머님의 서운함이 삐죽이 느껴졌다. 그 서운함이 어쩐지 반가웠다. 세상의 모든 서운함이 다 사랑에서 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시어머님의 서운함만은 사랑에서 오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이 네 남편 생일이여서, 너라도 보고 싶어서 그런다."
순간, 몸이 움찔했다. 아들이 돌아간 날짜도 잊으셨으니 오늘의 생일 날짜도 당연히 잊으셨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어머님은 유독 '생일'이라는 단어에 목소리를 높이셨다. 수십년 전, 첫아들이 세상에 태여나 울음을 터뜨리던 행복한 설렘이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였다. 흐릿해진 기억 속에서도 아들의 생일을 기억해 내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성애이자 그리움일 것이다. 앞날이 얼마 없는 한 로모가 흐려져 가는 기억을 간신이 잡고 잊음의 틈새에서 먼저 간 아들을 잊지 않으려는 엄마의 본능에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사실 남편이 예고 없이 돌아갔을 때 세상에서 내가 가장 슬프고 아픈 줄 알았다. 아들을 먼저 보낸 어머님은 며느리 앞에서 죄인처럼 내가 먼저 울음을 터뜨려야 그제야 소리 없이 통곡하곤 하셨다. 이제 와서 보면 아들을 먼저 보낸 지옥 같은 세월동안 매년 아들의 기일이 돌아오면 가슴을 찢어놓는 그 고통을 감당 할 수 없어 끔찍한 리별의 순간을 뇌리에서 지워버리셨을 것이다. 그저 로년의 망각의 아니라 한 로모가 아들을 기억하는 또 다른 방식이였을 것이다.
기억과 잊음 사이, 시어머님의 마음속에는 떠남의 아픔보다 태어남의 기쁨이 깊이 자리 잡은 것이 아닐까. 열아홉에 낳은 아들이 세상에 첫울음을 터뜨리던 행복한 날 만을 붙잡아 둠으로써 돌아간 날의 슬픔을 덮어버린 것이다. 기일을 잊은 것이 아니라 ‘기일’이라는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생일’이라는 날을 더 강하게 끌어안은 것은 아닐까.
슬픔의 늪에 갇혀 과거의 둑을 맴돌던 나에게 시어머님은 삶의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 나는 오래도록 남편이 이 세상에 머물렀던 날들보다 하늘나라로 떠난 날을 더 길에 애도했다. 시어머님이 처절한 몸부림으로 가르쳐 주신 기억과 잊음의 미학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식임을 이제야 알았다.
잊은 것 같으면 잊은 것이 아니다는 말처럼 아들이 돌아간 날은 엄마의 가슴에서 정말 지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길을 걷으며 무심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저녁별이 하나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별에서 시어머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에서 꺼지지 않는 사랑의 빛을 보았다.
/리정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