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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6/02/05  이정림
격리 일지

1. 어쩌면 나에게도 이런 일이.

   (2022년5월14일 토요일)

 

후둑후둑 창문을 두드리는 비소리에 아침잠을 깼다. 눈을 비비며 커텐을 제치고 창밖을 내다보니 마당안의 검스레한 땅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있었다.여느날과 마찬가지로 미지끈한 물 한컵을 마시고 나서 간단히 잠자리를 정리하고 핸드폰을 열었다. 사회구역그룹(社区群)에 다음과 같은 긴급통지가 올라와 있었다.

 

“5월6일 이후 도문에 다녀온 사람은 우선 집에서 나가지 말아야 하며 즉시 사회구역에 련계하시요.”

 

이 몇 글자를 읽는 순간 내 마음이 찜찜해났다. 내가 바로 며칠전 도문에 다녀왔던 것이다. 그런데 도문이라고는 하지만 시내에는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않았고 시교어구에서 한 10여분 머물다 돌아왔던 것이 전부이다. 이쯤하면 별문제 없겠지 하며 습관대로 핸드폰 화면을 바꾸어 여기저기 다른 그룹을 돌려보았다. 그래도 어쩐지 마음이 찜찜해 나서 다시 사회구역그룹에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이런 글이 떡 안겨왔다.

 

“이 긴급통지를 읽은 사람의 전화번호는 이미 자동적으로 담당 책임자에게 련결이 되였다. 만약 본인이 먼저 신고하지 않아 어떤 후과가 초래되면 모두 본인의 책임져야 한다. 이럴때에는 공안 등 부문은 법과 규정에 따라 엄숙하게 처리한다.”

 

이번에는 가슴이 섬찍해 났다. 몇구절 안되는 문구지만 무섭게 한눈에 안겨왔다. 가슴이 뛰고 숨결이 거칠어 진다. 혹시 격리라도 당하게 되면 어쩌지. 그렇지 않아도 단조로운 내 일상이 더 무미건조해 질것이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방에만 갇혀 이 두주일을 어떻게 혼자서 보내야 한단 말인가. 거기에 또한 이미  5월말 날자로 초대받은 지인 가족의 아기첫돌생일잔치와 또 다른 지인의 자제분결혼식에도 참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참으로 막막하지 않을수 없다.

 

예순살을 넘어 먹어도 여전히 담이 콩알만큼 작은 나는 가슴이 콩당거려 한참 궁리하다 끝내 사회구역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그날 도문에 다녀왔던 과정을 구구히 설명하며 어쩌면 좋겠는가 하고 문의하였다.

그러자 사회구역책임자는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였다.

 

“일단 도문방향으로 가셨다면 안 됩니다. 자동차에서 내리지 않아도 2주간 격리해야 됩니다. 우리가 오후 1시좌우에 문에 봉인지(封条)를 붙이러 가겠으니 지금부터 밖에 나가지 마세요. 그리고 마트에 련락하여 물이랑 채소랑 음식물부터 모두 준비하세요”

 

꼬물만한 여지도 없다. 이 말을 들으니 더욱 당황하기도 하고 무엇부터 준비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였다. 그저 혼자 말로 이렇게 중얼거려볼 뿐이였다. 

 

“세상에, 별일 다 있네.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긴다니…”

 

참말로 어이가 없다. 나는 지금까지 “코로나19”사태가 터진 2020년도에 처음 무한에서 도시봉쇄(封城)가 실시되고 서안에 이어 최근에는 상해에서 도시봉쇄가 진행되었다는 이야기는 그저 저녁에 텔레비죤에서나 보는 신문보도의 기사거리인줄 알았다. 시내에서도 어느집 출입문에 봉인지(封条)가 붙었다는 말을 듣고서도 그건그저 남의 일로 그집 사람들이 외국이나 다녀와서 그런줄 알았다. 그런데 그 남의 일이 곧 나의 일이 되었다. 그 일이 나에게 들이닥치고 그 봉인지(封条)가 내 집 출입문에 붙혀진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당황하여 대뜸 핸드폰을 열고 일본에 있는 딸을 영상통화로 불러내였다. 그러자 딸은 곧 전화를 받고 차근차근 이렇게 말하는 것이였다.

 

“엄마, 두 주일이란 시간은 금방 지나갑니다. 우선 먹을 것부터 준비하세요. 먼저 생수를 푼푼하게 들여다 놓고 다음 닭알이랑 채소랑 쌀이랑 하나하나 덤비지 말고 준비하세요”

 

딸은 예순살을 넘어 먹은 이 엄마를 마치도 막내 동생을 타이르듯이 차근차근 일러주었다. 둘러보니 정말 생수가 세병밖에 남지 않았고 닭알도 대여섯알만 남았다. 긴장하니 뭐가 먼지 어리벙벙해 나고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딸이 시키는 대로 마트에 전화하여 생수와 닭알을 보내달라고 하였다.

 

어수선한 마음을 정리하고 시계를 보니 11시가 가까워오는 점심시간이 다 되였다. 별로 음식을 만들어 먹을 기분도 아니여서 전날 먹다남은 된장국을 대충 데워 밥 둬술을 말아 점심을 떼웠다.

 

초여름의 날씨라지만 밖에 비가 와서 그런지 오늘은 방안이 많이 쌀쌀하다. 바람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창문밖으로 보이는 연두빛 가느다란 나무가지들이 나처럼 무슨 근심이 있는지 자꾸만 흔들거린다.

 

오후 1시가 다가오니 마음이  초조해 진다. 정확히 오후 1시45분이 되자 흰 방역복으로 무장한 사회구역 일군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자가격리관찰승락서”와 “연길시코로나방역자가격리의학관찰고지서”를 나에게 넘겨주었다. 내가 격리기간 일이 있고 아프면 어디에 련락하는지 등 몇가지 문의사항을 물어 보려고 하니 그 사람들은 무작적 문을 밀어닫고는 출입문에 봉인지(封条)를 붙이고는 부랴부랴 층계를 뛰여 내려갔다. “코로나19”가 터진지 몇해가 되지만 올해는 봄부터 좀 특별했다. 돌연히 들이닥친 색갈도 없고 형체도 없는 코로나 19보다 더 전파력이 강한 오미크론이라는 바이러스발생 상황으로 하루밤 사이에 온 도시의 시민들이 생활절주를 잃고 일상이 멈춰서는 “정지버턴”이 가동되였다. 오로지 “힌 방호복”을 입은 방역일군들만이 철없는 꽃쌤 추위를 무릅쓰고 시민들의 핵산검측을 하느라 분주했다.

 

지금까지 나는 검측을 할 때마다 당당했다. 별로 밖에 나가지 않는 나는 감염될리 없고 격리하는 일은 더욱히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상 일은 정말 알고도 모르겠다. 나의 집 출입문에 봉인지(封条)가 붙고 내가 자가격리대상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렇개 된 이상 어떻게 하여야 한단 말인가. 고민해도 달라질게 없다. 그러면 어떤 원망도 하지 않고 심플하게 생각하며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이 시간에 그동안 읽고 싶던 책이나 읽으면서 후회없이 부딪혀 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지만 생각하면 아득하다. 소리소문으로만 듣던 자가격리, 코로나시대의 나의 첫 하루가 이렇게 소란스럽고 긴장하고 두렵게 저물어 간다.      

 

2. 텔레파시가 통하는 친구의 정

    (2022년5월15일 일요일)

 

새벽이 밝았다. 자가격리 두번째 날이다. 아파트2층 창문으로 하늘을 보니 아침부터 맑은 하늘가의 구름모양이 참 예쁘다. 마당가의 나무가지들은 앞뒤로 부는 부드러운 바람결에 연두색 잎파리를 추켜세우고 춤추듯이 한들거린다. 나는 창문 너머로 그 나무잎들이 춤을 한참 바라 보았다.

 

이렇게 오늘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나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였다. 어제의 고민과 갈등, 산란한 마음을 시원히 씻어 버리고 싶었다. 샤워를 마치니 몸도 마음도 한결 가볍다. 촉촉한 머리를 내 스타일로 다듬고 기초화장을 하고 옅은 립스틱도 살짝 바르고  핸드폰을 켜고 사진 한장도 남겼다. 웬지 여름 옷들을 꺼내 입어 보고 싶어진다. 긴 치마와 짧은 치마, 끈치마에 어울리는 상의도 맞추어 입고 거울앞에서 뒤태도 앞태도 비추어 보았다. 몸은 지난해와 같이 늘지도 않고 쭐지도 않아 맞춤하여 기분이 참 좋다. 혼자 피씩 웃고는 내친김에 옷장 정리를 간단히 하였다. 옷걸의 색깔로 마추어 옷을 걸어놓으니 옷장이 정연하다. 돌아서 생각하니 내가 이상하다. 지금 자가격리라는 것을 잊었나. 아니다. 이는 내가 다년간 터득한 어지러운 마음을 추스리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오전 10시쯤 따뜻하고 향기로운 모닝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어제의 당황한 시간을 돌아보았다. 순간, 왼지 한 친구의 모습이 내 머리속을 스쳐갔다. 그 찰나에 핸드폰이 울렸다. 텔레파시가 통했나?  화면을 보니 내가 금방 떠올렸던 바로 그 친구의 이름이 뜬다. 이틀이 멀다게 통화하고 한주 한두번씩 밥을 같이 먹는 친구이다. 오늘도 첫마디가 “아침을 먹었니?”로 시작하여 “오늘은 뭐하니?” 라고 물어보며 꼭 끼니를 챙겨 먹으라고 부탁한다. 친구의 목소리를 듣자 “어쩌지… 나는 어제부터 감금되었어.”라고 말하며 울상을 하였다. 친구는 놀라며 “왜 왜, 어디에!”를 련발한다. 자초지종을 다 듣고서는 키득키득 웃으며 자기네 아파트 층집에서도 봉인지(封条)가 붙은 집을 보았다면서 십여일이 금방 지나니 괜찮다면서 가끔 우리 아파트 울안에 와서 창문 넘어로 보고 가겠다며 위안을 한다. 진짜 친구답다. 

 

그 동안 강산도 몇십번 변하고 우리의 모습도 많이 변하였다. 하지만 초록의 순수한 우리들의 마음만은 변하지 않았다. 40여년 함께한 세월만큼 지금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뜻을 알수 있는 친구이다. 지난세월 서로가 삶이 팍팍해서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슬픔과 기쁨, 아픔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었다. 내가 예고 없이닥친 불행앞에서 통곡하고 방황할때 친구가 한걸음에 달려와 눈물을 닦아 주고 같이 울어 주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나에게 따뜻한 국물이라도 한술 먹으라며 숟가락을 손에 쥐여주었다. 친구는 오래동안 음식가계를 경영하였다. 나도 친구가 힘들고 지칠때면 항상 내 일처럼 팔을 걷고 도와주군 하였다. 몇해전 부터는 친구가 가계를 그만두면서 가끔씩 만나 밀린 이야기를 쏟고 밥도 먹는다.

 

친구는 만나면 첫 마디가 “배 안 고프니?” “뭐 먹을래?”라고 한다. 항상 혼자 밥 먹는 나를 안쓰러워 하기 때문이다. 메뉴는 늘 내가 정한다. 밥 먹을 때면 맛있는 반찬은 서로 밀어 주고 밀어 놓으며 밥 다 먹을 때까지 그러고 있다. 진심을 나누고 마음을 털어 놓을수 있는 친구가 있어 나는 외롭지 않았다. 친구와 나는 가리는 음식이 비슷하고 또한 따뜻한 음식을 즐겨 먹는다. 그래서인지 따뜻한 음식을 먹을 때마다 친구가 생각이 난다. 나는 생각할 뿐이다. 친구는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무조건 자전거를 타고 와서는 들고 온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보고 간다. 금방 밥을 하고 파란 햇배 추, 삼겹살에 장 한숟가락을 넣고 보글보글 끓이다 청고추 두개를 송송썰어 넣으니 참 구수한 장국이 다 되였다. 늘 먹는 음식이지만 오늘 따라 친구와 이 점심을 같이 먹고싶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뜨거운 장국에 검은 콩반찬에 그럭저럭 밥 한공기를 먹었다. 검은 콩반찬은 언니에게서 전수 받은대로 만드니 참 맛있다. 콩을 한참 물에 불구었다 건져 물을 찌우고 냄비에 기름을 약간 두루고 볶다가 간장을 넣고 끓이다 마른 명태대가리 두개를 솔로 빡빡 문질러 씻어서 콩과 함께 끓인다. 콩이 익으면 꿀을 조금 넣고 불을 죽이고 참깨를 솔솔 뿌려 마무리 한다. 때로는 하라는 레시피 대로 해도 맛이 없을 때가 있다. 아마도 맛에는 비밀번호라는게 있는것 같다. 즉 손맛이일것이다. 콩반찬은 믿반찬으로 오래 두고 먹을수 있다.  

 

점심을 먹고 한참을 쏘파에서 뒤굴다 오후 커피 한잔을 들고 북쪽 창문에 마주섰다. 늦은 오후 햇살이 뜨락에 내려 한들한들 바람과 소꿈장난을 한다. 나는 창문밖으로 팔을 한껏 내밀었다. 나른한 햇살이 보듬어 준다. 마침 우리사회구역의 대문으로 아담한 몸매에 파아란 캐쥬얼 복장에 생글생글 웃는 눈으로 멀리서부터 나를 보고 긴머리를 날리며 힘껏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모습이 안겨든다. 어쩌면 나도 창문에 서서 그 친구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친구는 자전거에서 내리자 바로 손가락 굴기만한바줄 한끝에 묵직한 종이봉다리를 묶고 다른 한끝은 2층에 있는 나에게 뿌려준다. 바줄을 당겨 종이 봉다리를 올려보니 안에는 아직 식지 않은 입쌀 밴새와 고추순대가 들어있었다. 그것도 쪄먹기 좋게 하나하나씩 랩으로 쌋다. 땀을 뻘뻘 흘리며 친구는 2층에 있는 나를 올려다 보며 또 신신 당부를 한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입맛도 없겠는데 만두와 고추순대를 랭동해 놓고 한두개씩 쪄먹고 주식은 밥을 끼니마다 지어 먹어라.”

 

언니 같은 친구를 창문으로 내려다 보면서 비록 남편도 돌아가고 아들딸도 바다건너 멀리에 있지만 그래도 나는 이 친구로 하여 외롭지 않다. 해묵은 나무같이 함께 나이 먹는 친구가 있어 든든하다. 슬프고 힘들어 휘청일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주는 친구로 하여 어수선한 마음을 다잡음며 자가격리 두번째 날을 그럭저럭 보냈다.

 

3. 흰 방호복, 나도 입어보았다

   (2022년 5월 16일 월요일)

 

깨어나니 아침 5시다. 오늘은 자가격리 세번째 날이다. 머리가 좀 아프고 흐리터분 하다. 딸이 일본에서 보내온 혈압기로 혈압을 측정하니 80 : 150 이다. 10년 넘게 매일 복용하던 혈압약을 오늘은 좀 일찍 먹고 나에게는 만병통치약인 정통편도  한알 먹었다. 그리고는 바로 노트북에 마주 앉아 어제 일상을 한글자 한글자 입력하였다.

 

어제 저녁 8시 좌우에 출입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 출입문에 봉인지(封条)가 붙혀  아무도 올 사람이 없을텐데… 의아해 하며 “누구세요?”하고 물었다.

“핵산 검측하러 나왔습니다.”

 

젊은 조선족녀성의 친절한 목소리이다.  문을 빼죽히 열었다. 복도의 전등이 언제 고장났는지 컴컴하다. 머리부터 발까지 흰방호복으로 전신무장한 그녀는 “집에 들어가도 될까요?”한다. 비록 방호복으로 얼굴 표정을 읽을수는 없지만 차분한 목소리, 왜소한 몸매, 그리고 노란 비닐주머니랑 량손에 들고 있어서 힘들어 보여 어서 들어오라고 하며 거들어주려고 좀 가까이에 나섰다. 그러자 그녀는 급히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다. 나도 어망껼에 뒤로 물러서며 무안하기도 하여 “수고합니다. 저는 며칠전에 도문시 어구지에서 한 10분 머무르다 그 자리로 돌아왔는데 이렇게 격리 합니다.”고 나도 모르게 설명하였다. 형체도 없는 코로나로하여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하고 가까히 할수없는요즘 세상, 참 안타깝다.

 

그녀는 나의 입안의 샘풀을 체취하려고 장갑을 낀 오른손을 소독하고 또 새 장갑을 끼고 준비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요즘 도문에 갔다 온 분들의  자가격리가 많아지면서 우리도 바쁘게 보냅니다. 오늘도 하던일을 마무리하고 늦게 퇴근하여 씻고 금방 저녁을 먹었는데 핵산검사를 하라는 상급의 명령을 받고 또 다시 번거로운 방호복을 입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2003년 사스(sars) 바이러스가 범람하던 그 때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연길시위생국의 지시로 사스방역에 우리위생원에서는 행정인원까지 총동원 하였다. 병원회계인 나도 방역제일선에 나섰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열이 37도이상이면 무조건 지정병원으로 호송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지금처럼 검측하는 것도 없고 다만 체온계도 수은체온계가 전부의 도구였다. 우리위생원에서는 교통결찰대와 합작하여 연집길목에서 전문 대중형려객뻐스손님들의 체온을 체크하였다. 지금과는 좀 다른 방호복이겠지만 힌색과 위아래가 붙은 것은 같다. 틈샐떼 없는 방호복을 입고 쨍쨍 내리쬐이는 햇빛과 도로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땀은 쉴새없이 흐르고 더워도 물을 마실수 없었다. 옷을 한번 벗으려면 너무 힘들었고 더욱히는 큰길옆이여서 소변을 볼 장소가 근본 없었다. 후에는 정부의 간부들이 함류하면서 이동화장실을 설치하여 좀 편리했고 간식도 푼푼히 준비하여 주었다.

 

그때를 돌아보며 오늘 저녁에 퇴근하였다가 다시 방호복을 입었다는 그녀의 말에서 요즘 방역일군들이 얼마나 힘들까하는 생각해 본다. 오늘도 총소리 없는 바이러스와의 전쟁 제1선에서 헌신하는 백의천사들은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들이다.

 

오늘은 오전 9시40분과 정심 11시25분 두차례나 사회구역담당책임일군이 문밖에 와서 사람이 있나 확인하고 불편함이 있으면 련계하라고 한다. 

 

그들의 책임감에 나에게 20년가까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한가지 일이 떠오른다.

2003년 여름, 내가 사스방역일군으로 일할 때의 어느 날이다. 왕청으로 가는 중형뻐스가 빈자리 하나 없이 손님을 싣고 우리앞에 와서 섰다. 나는 뻐스에 오르자 동쪽켠으로 부터 뒤에까지 갔다 돌아 나오면서 손님들에게 수은체온기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잠시후 손님들의 체온을 하나하나 체크하였다. 서쪽켠 맨 앞자리에 앉은 손님은 돐이 금방 지난 아기를 안은 애엄마였다. 아기는 엄마품에 맥없이 안겨 자고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초들초들 말았다. 한번에 보아도 열이나고 아픈 아이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체온기를 체크하니 엄마의 체온은 정상이였는데 아이 체온은 38도를 넘었다. 내가 체온기를 보고 다시 번갈아 애를 보는 나에게서 눈치를 챘는지 애기엄마는 당황하면서 입속말로 “운신이 어려운 애기빠가 집에 혼자 있는데…” 하고 말끝을 흐린다.

 

비록 진실한 상황은 모르지만 애엄마의 눈빛과 얼굴 표정에서 간절함을 읽을수 있었다. 체온계를 살펴보는 일분도 안되는 사이에 나는 마음속으로 많은 갈등을 하였다. 

 

(이 손님을 그대로 보내면 내 실책이고 지정한 곳에 호송 하면 애아빠는… 또 내가 티를 내면 뻐스에 손님들이 애엄마를 차에서 내리라고 하겠지…)

“그럴거야 맞을거야.”

 

나는 속으로 이렇게 다지며 저도 모르게 그 뻐스에서 훌쩍 뛰여내리고 말았다. 이어 련속 다른 뻐스가 들어오자 더 생각할 사이도 없이 이번에는 다른 대형뻐스에 올라 또 한분한분에게 체온계를 나누어 주었다. 툭툭뛰는 나의 심장소리가 자꾸 들린다.

 

그날 나는 끝내 사고를 치고 말았다. 뻐스손님들의 체온계를 미처 거두지 못했고 체온도 다확인하지 못했는데 뻐스는 그냥 출발해 버렸던 것이다. 대형사고였다. 가뜩이나 수은체온계가 모자라는 형편에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범하였던 것이다. 그후 사스바이러스가 물러가고 위생국의 총결회의장에서도 량심의 가책을 느꼈고 오늘까지 그 일을 가슴에서 떨쳐 버릴수 없었다. 

 

오후부터는 바람이 정신없이 분다. 동풍도 아니고 서풍도 아니고 마구 불어대는 바람에 나무들이 통채로 휘청거린다. 밖에 나갈수 없으니 날씨의 변화뿐만 아니라 소소한 것에도 예민해진다. 약을 먹었더니 머리도 덜 아프고 낮잠도 한 20분을 잔것 같다. 움직이지 않으니 밥맛도 없다. 저녁은 친구가 보내온 입쌀밴새 두개를 전자렌지에 데워서 먹었다. 밑반죽도 잘 되였는지 입안에 붙어나지 않고 쫀득한게 참 맛있다.  

 

오늘은 사스방역일선에서 일하던 때를 떠올려 보며 어제 저녁, 퇴근후여도 내 집에 찾아와 원망 한마디 없이 핵산검측을 해주던 얘리얘리한 그 녀성방역일군이 얼마나 힘들까? 라고 생각하며 지루한 하루를 보내였다. 

 

4. 인생은 기쁨만도 슬픔만도 아니다

   (2022년 5월 17일 화요일)

 

자가격리 네번째 날이다. 오늘은 아침5시반에 일어났다. 몸이 찌뿌둥 한것 같아 운동삼아 두 무릎을 꿇고 두손을 걸레에 올리고 힘껏 장판을 빡빡 문지르며 닦았다. 그랫더니 땀이 난다. 평시에는 밀걸레로 밀면 쉽고 빨라서 좋았다. 앞으로 장판은 손걸레질을 해야겠다. 운동이 된다. 대충 씻고 커피물을 끓이며 주방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보얀 아침안개가 서서히 겉인다. 안개끼는 날은 날씨가 좋다고 한다. 정말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아침이 펼쳐진다. 오월들어 가장 볕이 좋은 여름의 날씨인것 같다. 가벼운 여름옷을 입고 화창한 거리를 거닐며 하늘과 바람, 풀과 나무들과 어울려 숨쉬며 뛰놀고 싶다. 집에 같혀 있으니 모든 것이 새롭고 그립다. 어쩌면 격리조치가 일상이 소중함을 깨우쳐 주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자가격리 첫날은 머리가 터질것 같았지만 이렇게 2, 3일이 지나면서 이길수 없으면 즐기라고 이참에 글쓰기 련습삼아 “격리일기”를 써보니 하루를 알찬게 보낼수 있게 된다.

 

오전 9시반에 사회구역에서 련락이 왔다. 오후 2시좌우에 쓰레기를 가지러 오겠다고 한다. 쓰레기를 비닐주머니에 모았다. 2시반이다. 똑똑 노크소리에 문을 열고 쓰레기를 내놓으면서 보니 생활쓰레기를 집중처리하는 방역후근일군 두 분이 멀리에 서서 얼른 놓고 문을 닫으라고 손짓 한다. 인젠 섭섭할 것도 없다. 또한 나도 방역일군들이 왔다가면 소독휴지(湿纸巾)로 문꼬리와 섰던자리를 빡빡 닦았다.  

 

정심은 라면살을 삶아서 우리문학원의 김영자선생님이 알려준 례시피대로 만든 고추장을 넣고 참기름도 두어 방울 넣고 비빔면을 해서 먹었다. 매콤한게 참 맛있다.    

 

어느덧 초저녁이다. 여지것 남편이 돌아가고 10년이 되도록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신적이 한번도 없다. 오늘은 어쩐지 술생각이 난다. 찬장을 열어보니 언젠가 친구들이 놀러 왔다가 먹다 남긴 캔맥주가 몇병 있다. 한 캔도 채 마시지 않았는데 머리가 뻥~ 해진다.

 

내 나이 50대 초반에 있었던 일로 기억된다. 남편이 연길시로간부국에 출근할 때이다. 아침에 나가면 밤중에 들어올 때가 푸술했다. 때로는 누구의 초대를 받는다며 오후 5시에 집에서 나갔다가 한 밤중이 다 되여서야 집에 들어온다. 내 머리계산으로는 도무지 리해가 안된다. 저녁6시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여 11시까지면 6시간이다. 맨날 같이 붙어있고 맨날 같이 술 마시는 사람들인데 그 시간에 뭐하는지 너무 궁금하였다. 하루는 남편에게 나도 한번 같이 술장소에 가면 안되는가고 물었다. 남편은 그렇게 하라고 한다. 그래서 어느날 저녁 남편을 따라 나섰다. 면목이 있는 남편의 친구 6명이 모였다. 주로간부국에 주임도 있었다. 중식집이였다. 사전에 미루 말했는지 음식을 가리는 내가 먹을수 있는 볶음채와 랭채도 올랐다. 남편을 포함해 4명이 소주를 마이고 나까지3명이 맥주를 마셨다. 남편들이 다 그러하듯이 내 아내는 술을 마일 줄 모른다던 남편은 오늘은 어쩐지 괜찬게 마신다고 말한다. 주로간부국의 주임부터 한분한분 건배사를 하고 권한다. 

 

온밤 따라 다닐걸 생각하고 요리조리 술을 잘도 피했다. 어느정도 술이 된 남편은 내가 커피를 좋아한다 면서 9시쯤이  되자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한다. 장소는 지금 시정부의 동쪽 명대아빠트 울안인것 같다. 커피숍에 와서 나를 위한다는 것이 커피는 한잔도 올리지 않고 배불뚝이 병맥주를 가득올린다. 내가 부으려 하면 남편이 앞장서 붓는다. 한병 두병 몇병인지 기억이 안난다. 그리고 한다는 이야기는 문구심판 자격증 1급이요 2급이요 아무튼 문구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이번에는 주로간주국의 주임이 발전의 어느 맥주점으로 가자고 한다. 그때가 이미 10시가 퍽 넘은 것 같다. 그러나 또 따라 나섰다. 택시에서 내려 맥주점으로 들어가자바람으로 쏘파에 누웠는데 속이 훌렁거려 위생실에 갈사이도 없이 쏘파에다 한무더기를 토했다. 남편은 팔소매를 걷고 주인이 눈치를 보며 닦아낸다. 한마디 나무람도 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과 함께 했던 잊혀지지 않는 제일 행복한 순간인것 같다.

 

최근 몇년동안 문학원에서 회장직을 맞고 련이어 당지부서기를 맡고나서 술자리도 적지않았다. 문학을 담론하고 생활도 담론하면서 잔을 기울리다 보면 밤10시가 금방 된다. 일찍 이런 체험을 했더면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았겠는데 하고 요즘들어 부쩍 후회가 된다.

 

고요한 밤은 깊어가고 앞마당의 가로등만이 희미한 달빛에 반사되며 나를 또 20년 전으로 끌고 간다. 

의란진에서 시내 근처의 새로운 단위로 전근되여 오면서 새 단위에서 환영파티를 열었다. 그때까지 시골에서 일하다보니 술좌석에 몇번 앉아보지못 했고 사실 내 자신의 술주량도 몰랐다. 익숙하지 않는 새 단위의 원장님과 의사선생님들이 권하는 술이라 거절 못하고 련속 마셨더니 뭐가뭔지 분간이 가지 않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택시에 앉아 집으로 향했다. 동서남북이 가려지지 않았다. 더욱히 낮에는 몰랐던 고층건물의 불빛이 하도 번쩍거려 집으로 굽어드는 골목길을 찾지 못해 해맸다. 남편에게 집을 찾지 못하겠다고 전화했다. 남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고 물었다.

 

“어딘지 알면 내가 전화하겠습까?”

내가 큰 소리를 질렀다. 가로등에 기대여 얼마 기다리지 않았는데 남편이 와서 손을 잡는다. 알고보니 우리집 병원문앞이였다. 남편에게 기대여 6층으로 올라갔다. 남편은 이튼날 아침에 마른명태를 잘게 찢어 참기름에 달달 볶다가 콩나물을 넣고 보글보글 끓여 해장국이라면서 한공기를 떠준다. 남편이 나보다 음식솜씨가 좋기는 하지만 이런 해장국은 처음 먹어 본다. 평생 다시 먹을수 없는 사랑의 해장국이였다. 올해가 남편이 돌아간지 10년이 된다. 나는 내 인생은 늘 슬픈 인생이라고 생각하였다. 돌아보니 이처럼 추억할만한 기쁨도 있었구나. 이런 생각에 한모금 저런 생각에 두모금 캔맥주 한개반을 마셨다. 나머지 반도 마른 명태를 마요네즈에 찍어 안주하며 굽을 냈다. 알딸딸하다. 이러다 혼주가가 되지 않을까? 겁이난다.

격리생활 4번째 하루가 이렇게 줄어 든다.

 

5. 정이 뭐길래

   (2022년 5월 18일 수요일)

 

자가격리 5일째이다. 아득하기만 했던 시간은 군소리없이 흐른다. 아침 5시반전부터 우리집 앞 아파트소광장에는 흰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아마도 어제 연길시에 무증상 감염자 한명이 나지면서 오늘부터 래일까지 이틀동안 전번처럼 “정태관리”는 하지 않지만 전민 핵산검사를 한단다.

 

창문에 마주서 방역일군들이 책상, 걸상 등을 준비하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언니의 전화이다. 형부와 언니가 변변치 않아 핸드폰에 언니라는 글이 뜨면  겁부터 난다.

“왜, 이리 일찍이...”

“너네 집 남쪽창문으로 오너라.”

 

부랴부랴 남쪽창문으로 가서 내려다보니 형부와 언니가 묵직한 짐들을 들고 서있다.

“언니, 이렇게 다녀도 되오? 선로버스도 일찍해서 아직 안 통하겠는데.”  

“괜찮다. 택시로 왔다.”

 

며칠전에 연변병원에서 경추를 네곳이나 수술을 받고 출원한지 이틀이 된다. 창문을 열고 가지고 온 짐꾸러미를 바줄로 끌어 올려다 풀었다. 소고기, 되지고기, 고등어, 파란 햇배추, 오이 등 없는 것이 없다. 형부도 움직이기 불편하고 언니는 좀만 무거운 것을 들면 기관지 확장으로 각혈하고 두분이 모두 도움을 받을 형편인데 혈육이란 무엇인지. 가슴이 뭉크하며 돌아서 울었다.

 

올해 형부는 칠십이 넘었고 언니는 칠십이다. 몇해전 형부는 ‘거린바리증후군’이라는 희귀병으로 전신이 마비되여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수 없었다. 언니는 몇십년전 부터 ‘류마티스’라는 면역체 이상으로 생기는 자각면역질환으로 관절마다 짐승에게 물어뜨기우는 것 같은 아픔에 시달리며 생수병 마개도 열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언니는 포기하지 않고 정신력으로 남편의 손발이 되여 주었고 형부 또한 뼈를 깍아내는 초인간적인 의력으로 병마를 이겨냈다. 자식 하나 없는 형부와 언니는 이 동생을 믿고 의지 하겠지만 나는 몇년동안 내설음에만 빠져 있었다. 잘 먹지도 않고 슬픔만 잡고 있는 동생에게 언니는 지금까지 내가 먹는 우유와 채소, 고기, 닭알 등을 주기적으로 사서 보내 주었고 이틀에 한번씩 전화로 끼니를 먹는지  확인한다. 

 

병들고 나이 들어가는 형부와 언니를 볼때면 항상 측은 하지만 때로는 부부의 끔직한 사랑에 부럼고 목메인다. 언니는 남편이 조금만 코물이 나고 아프면 즉시 변원으로 모시고 가고 자기도 입고 싶은 옷이 있으련만 백화에 가면 무조건 남편의 옷부터 산다. 그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지. 만약 언니가 혼자 남는다면 내가 모시겠다는 생각을 오래전 부터 하고 있었다.

 

몇년동안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부터 찾았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언니가 사온 콩물에 궈즈로 아침을 먹었다. 항상 커피 한잔으로 아침을 대신하니 오전에는 떨리고 휘청거렸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할일이 없어 창문에서 핵산검사 하는 것을 내다 보았다. 사람들마다 방역 의식이 높아 말하지 않아도 거리를 두고 질서정연하게 길상코드를 준비하고 차례를 기다린다. 격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핵산검측을 하는지 따로 통지도 없는데 오전에만 벌써 두번이나 치솔질 하고 기다린다. 자유롭게 핵산검측을 하는것 마저 부럽다.    

 

심심해서 한참 노트북을 뒤적거리니 점심시간이 되였다. 보통 하루에 두끼를 먹었다. 오늘은 아침을 먹었는데 또 정심에 뭐 먹을까 하고 궁리한다. 찰라에 핸드폰이 울린다. 열어보니 시누이다. 남쪽 창문으로 오란다. 내려다 보니 큼직한 짐이 여러개이다. 전날 시어머님께서 련락이 오셨다. 무사한가고 묻는 물음에 “나, 지금 집에서 격리합니다.”라고 자초지종을 말씀 드렸더니 한없이 걱정 하신다. 아마도 딸에게 내가 격리한다고 말하신것 같다. 큰 아들을 (내 남편) 먼저 보낸지도 10년이다. 아들이 없는 며느리지만 시어머님은 대가없이 예전처럼 변함없이 걱정하시고 사랑해 주신다. 올해의 생일에도 내가 좋아하는 피자랑 우아하게 서양음식(西餐)을 함께 드시고 멋있게 계산을 하였다. 고령임에도 정정하시다. 그런 시어머님께 아직도 의지하고 사랑받는 나는 행복하다.

 

시누이에게서 받은 짐을 풀었다. 원래도 통이 크지만 “형님에게는 아까운것이 없다.”는 시누의 진심이 느껴진다. 내가 한달을 먹어도 남을 돼지고기, 고등어, 더덕, 썅구, 고추, 파프리카, 야생취, 미나리, 사과, 참외, 찰떡, 등을 어깨 아프게 지고왔다. 비록 오빠가 없는 형님이지만 언제 한번 소홀할 때가 없다.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언제라도 가져다 주고 명절이면 내가 즐겨먹는 음식들로만 장만한다. 받기만 하고 갚을수 없는 시집의 사랑과 정이 오늘도 나를 울린다.

 

점심은 시누이가 사온 찰떡을 팟고물에 찍어 정신 없이 먹었다. 저녁은 돼지고기를 넣은 장국에 미나리를  데쳐서 무쳐 먹었다. 언니와 시누이 덕분에 몇년만에 하루 세끼를 먹어본다. 뭐로도 갑을수 없는 은혜 두도두고 잊지 않을 것이다.

 

늦은 밤까지 몇번을 치솔질 하면서 기다려도 핵산검사하러 오지 않는다. 정부에서 자가격리를 하는 시민들을 빠뜨리지는 않겠지 하면서도 서운하다. 오늘은 아낌없는 사랑과 정을 가슴속 깊이 느끼며 잠자리에 누웠다.

격리5번째 하루가 지나간다.

 

6. 오빠의 “결의형제”

   (2022년 5월 19일 목요일)

 

오늘은 자가격리 6일째이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인것 같다. 세월은 왜 이리도 빨리 흘러 나이만 먹는다고 한탄 하였는데 요즘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니고 그 배인 48시간인것 같다.

 

오늘도 일어나자 바람으로 창문에 마주섰다. 우리소구역 뜰안의 곳곳에서 제일 먼저 봄을 알리던 노란 개나리 잎들이 요즘에는 힘없이 흐트러져 가고 있다. 전시민이 련속 3일동안 핵산검사 하는 두번째 날이다. 검사일군들은 지칠때로 지쳤겠건만 오늘도 흰방호복으로 무장하고 어김없이 아침 6시부터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시민들에게 길상코드를 스캔하고 샘풀을 조심스레 체취한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도 부럽고 저런 일상도 얼마나 자유러운지를 저사람들은 알까? 모를까?

 

아침 7시30분이다. 친구가 또 직접 콩을 삶아서 갈아 만든 구수한 콩물과 손으로 빚은 훈둔을 들고 왔다. 참 어려움을 함께 나눌때 정은 더 쌓여 가는것 같다.

 

오늘이 지인의 아기 첫돐생일에 초대받은 날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시의 전염병 예방통제 형세가 준엄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생일날자를 변경하였다고 소식이 왔다. 격리가 해제되면 내가 참가할수 있어 참 다행이다.

 

얼마전, 새벽에 일어나 위생실에 갈때까지도 멀쩍하던 모욕물탱크 호스에서 아침에 일어나 보니 보얀 안개처럼 뜨거운 물이 마구 뿜어나온다. 나로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고 겁부터 났다. 와중에 우리집 근처에 금방 이사온 58년도 동갑내기 친구가 떠올라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하였다. 친구는 두말없이 남편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단 걸음에 달려온 친구의 남편은“아재, 어딤까?”하며 팔를 걷고 수리에 나섰다. 나에게는“아재”라고 부를 혈육이 없다. “아재”라는 한마디에 가슴이 뭉클하며 50년도 넘는 고향마을에서 아이 어른 할것 없이 “박서기”라 부르던 그 분이 떠오르며 내 마음 한구석을 후빈다. 나의 동갑친구와 아이돌생일을 쇤다는 분은 남매지간이고 “박서기”는 그 남매의 아버지이다. 

 

향기보다 맛으로 느낄수 있는 청포도는 익었는지 안 익었지 분간할수 없지만 푸른 광채로 하여 그 맛이 더 달콤하다. “박서기” 역시 말씀이 적으셔 깊은 속 마음은 알수 없었지만 부드러운 눈빛과 은은한 미소에서 그의 자애로움을 느낄수 있다.

 

지난세기 60년대 중반 우리마을은 칠팔십 세대가 모여사는 아담한 조선족 동네였다. 이른 봄이면 산마다 천지꽃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아득히 펼쳐진 논벌에는 황금벼파도가 출렁이였다. 마을은 남북으로 길을 사이두고 1 ~ 2대로 나뉘였다. 내가 세상을 알면서 마을에서는 어른 아이 할것 없이 처음에는 그를 “박대장”이라 불렀고 언제부터인지는 딱히 모르지만 모두 또 “박서기”라 불렀다.

 

늘씬한 몸매에 특별히 긴목선, 서글서글한 성격에 늘 로동복 차림으로 허리에는 낫이 아니면 로동도구를 지니고 다녔다. 박서기는 60년대 전에 홀어머니를 따라 우리마을에 삼남매가 사는 가정성원이 되였다. 그후 어머니가 일남일녀를 더 낳으며 북적북적한 가정이 되였다. 나의 어머니는 젊는 나이에 배가 비여볼새 없이 자식 11명을 낳으셨고 마음으로 낳은 자식까지 13명이다. 그 중에서 전염병으로 잃고 전쟁에서 잃고 4명만 남았다. 엄마의 첫 아들인 오빠와 내 나의 차이는 20살도 넘는다. 오빠는 대련금주대학을 졸업하고 대련에서 일하다 뭐가 마갖지 않은지 집에 돌아 왔다. 나의 오빠키가 일메터팔십에 박서기 키와 비슷했고 성격도 비슷하였다. 20대후반의 두남아는 청춘의 고민과 삶의 어떤 리유로 두분은 “결의 형제”를 맺었다. 나는 결의 형제라는 뜻도 모르는 어린나이여서 주변에서 부르는 대로 그냥 “박서기”라고 불렀다. 그후 나의 오빠는 결혼을 하고 애까지 낳고 제가족을 거느리고 북조선 황해남도 은률군 은률광산에 자리잡았다. 년로한 부모님과 어린동생들을 남겨놓고 떠나야만 하는 리유는 모르겠으나 리기적이고 불효 아들은 맞는것 같다.

 

년로한 엄마는 아들이 신변에 없는 실망감으로 실음실음 앓았고 아버지는 가끔 술 한 잔의 힘을 빌어 우리들을 손가락질 하며 “너들은 쓸떼 없다.”며 아들이 없는 서글픔을 토로하였다. 그 시간이면 박서기가 오셔서 아버지와 술을 한두잔 나누고 돌아가시면 흥분한 아버지는 우리를 보고 박서기를 “오빠”라고 부르라 하였다. 그때도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잘 몰랐다. 엄마는 박서기가 보고프면 하기가 번거로운 청콩으로 초두부 아니면 두부를 만들어 대접시킨다. 집간장에 절구로 퐁퐁 찌은 고추가루와 파란 풋고추, 파, 그리고 마지막에 고추씨가루, 닦은 콩기름을 조금 넣는다. 박서기는 매운 고추간장에 큼직한 두부 한모를 뚝딱 재낀다. 코등에 송골송골 땀이 돋으며 한숟가락씩 푹푹 떠먹는 박서기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엄마의 웃음짓는 얼굴을 오랜만에 본다. 내가 고중일학년으로 기억된다. 한번은 엄마가 많이 아프셨다. 촌위생소에서 치료하였지만 미열이 떨어지지 않고 도무지 식사를 못하였다. 박서기는 향병원으로 모시고 가셨다. 향병원에서도 진단이 나지않아 또 다시 시병원으로 업고 가셨다. 시병원에서 페렴으로 진단이 나고 박서기의 정성어린 간호로 제때에 치료하여 엄마는 다시 일어날수 있어다. 그시기 언니는 장춘재무학교에서 공부하고 나는 집떠나 고중공부를 할 때이다.  

 

1975년도이다. 골골마다 고운 단풍이 들고 노란 벼이삭이 고개숙이는 가을, 박서기의 설계로 아버지가 황갑을 쇠게 되였다. 농촌에서 아들이 있어도 부모님의 황갑을 쇠지 못하는 집들이 푸술했다. 아버지는 어깨가 으쓱하여 마을을 돌아다니며 황갑을 어느날에 쇤다고 손수 알렸다. 도문에 계시는 큰언니가 빠듯한 살림에 자기남편에게도 해드리지 못하는 귀한 짙은 밤색 데트론원단으로 양복한벌과 중절모, 내의까지 준비하고 작은 언니가 마을 손님을 접대할 모든 음식을 준비하고 박서기는 풍성하게 회갑상을 차렸다. 아버지는 비록 친아들의 축복은 받지 못하였지만 그 이상의 박서기 축복과 마을 분들의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9월에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밤중에 쓰러져 손 쓸새도 없이 사망하였다. 박서기는 삼일동안 아버지의 곁을 지켰고 손수 수의를 입혀 드리고 좋은 널집에 모셔 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동쪽 산언덕에 고이 묻으며 첫 삽의 흙도 박서기가 올렸다.

 

농촌에서 살자면 남자들의 손이 많이 필요하다. 특히 땔나무가 큰 걱정이다. 패는것은 두루 우리세녀자가 어떻게든 할수 있었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니 엄마가 힌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누워 있었다. 언니가 저녁을 해서 밥상을 차렸다. 밥을 먹으면서 언니가 “엄마, 걱정하지 마오. 래일 출근해서 내가 해결해 보겠소.” 라고 말한다. 알고보니 땔나무가 가들가들 하였다. 이튿날 늦은 정심에 자잘한 나무 한 수레를 박아싣고 박서기가 마당에 떡 나타났다. 아마 평시도 우리를 걱정 하였지만 특히 우리집 나무무지를 늘 살폈던것 같다. 언니가 78년에 결혼하고 내가 81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들의 결혼식에 박서기는 아버지 역활, “오빠” 역활을 하였다. 결혼식날 생빈으로 가셔서 사돈님들에게 절을 올리며 잘 부탁하고 돌아와서는 엄마에게 회보하면서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엄마는 85년도에 심장병으로 산소호흡기로 일주일을 벝이다 70세로 한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그때도 박서기는 손수 엄마에게 수의를 입혀드리고 아버지옆에 모시고 마을 사람들에게 장례식 음식까지 대접시켰다. 그후 박서기는 몇십년을 우리아버지와 엄마 산소에 일년에 두번씩 꼭 다녔다. 친딸들도 지키지 못하는 부모님 산소를 박서기는 지켰다. 박서기는 돌아가기 전 우리부모님 산소에 가셨다. 몇마리 산새가 나지막히 울고있는 나의 부모님의 무덤가에 온여름 동안 자란 풀더미를 벌초하고 흙을 올리면서 박서기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칠십이 넘은 나이에 평생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한 친아버지를 떠올려 보지 않았을까?

 

2013년 박서기는 77세로 아내와 하루 한시에 때아닌 사고로 돌아가셨다. 자식들이 유품을 정리 하면서 서랍 깊숙한 곳에서 “결의형제”라고 쓴 종이 한장을 발견하였다. 누루스름한 종이에 “결의형제”라는 네글자가 반듯하게 적혔고 아래쪽에는 두분이 서명하고 그 옆에는 각각 퇴색한 뻘건 손지장이도 보였다. 이 종이 한장이 뭐라고 박서기는 반세기도 넘는 60년 세월, 두둑한 인간성으로  혈육보다 더 진한 삶의 신조를 지켰다. 친부모도 모르느라 하는 세월에 “결의형제”라는 네글자의 무게를 가슴 깊이 가늠해 본다. 박서기의 일생으로 지켜온 “결의 형제”라는 한장의 증명서가 70년, 대대로 내려 오면서 오늘까지 박서기자식들이 우리 자매를 “아재”라고 친절히 부른다.  이보다 더한 혈육이 어디에 있으랴.

 

“오빠, 사랑합니다.”

글을 쓰기 시작하여 몇년을 벼르던 마음속의 글을 오늘 하루만에 완성하였다. 참 뿌듯하다. 저녁은 “박서기”의 딸이 보내준 고사리볶음을 잡곡밥에 한공기 맛있게 먹었다.

오늘 해는 빨리도 저물어간다.

 

7. 그날의 벅찬 순간들

   (2022년 5월 20일 금요일)

 

오늘은 자가격리 7일째이다. 아침 5시반이면 눈이 떠지고 벌떡 일어난다. 격리전에는 늘 눈을 뜨고도 다시 재잠을 자려고 한 반시간은 꾸물 거린다. 한주가 지나면서 습관이 되여간다.

 

오늘도 일어나자 바람으로 창문앞에 마주섰다. 아침5시반 전인데 할머니 두분과 할아버지 한분, 모두 세 분이 벌써 줄을 서서 핵산검측을 받으려고 기다린다. 어떤 급한 일이 있을까? 어제 사회구역췬에서 오늘 아침은 분명히 출근족들을 먼저 검측해 준다고 통지를 하였는데… 환경미화원 복장을 입은 분들이 몰려온다. 정각 6시가 되니 방호복을 입은 일군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비가 온뒤의 날씨가 참 화창하다. 파란 하늘은 티없이 맑고 순수한 흰구름이 두둥실 떠있다. 요즘들어 “한결같다”는 말에 의미를 자꾸 새겨본다. 많은 것들이 변하고 또 변할때 한결같은 모습으로 있어준다는게 얼마나 뿌듯한지를 느끼는 순간들이다.

 

오늘 또 친구에게 나의 만병통치약인 정통편이 한알 남았다고 련락하였다. 그 자리로 100알을 사가지고 헐레벅떡 뛰여왔다. 친구는 일이 있으면 련락하라고 말하고는 등산하러간다며 바로 돌아 섰다. 뒤모습을 바라보며 어떤 일이 있어도 티없이 40년이 넘도록 함께한 한결같은 친구가 아프지 말고 오래 같이 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머지 한알의 정통편을 물과 같이 넘겼다. 머리가 아프고 뼈마디가 통새나고 소화가 안되고 마음이 우울할 때도 정통편 한알을 먹으면 금방 나아진다. 나에게 만병통치약 “정통편”은 요지음은 내 “친구”인것 같다.

 

오전 10시즘에 딸과 영상통화를 하였다. 남편이 돌아간후 자식이든 친척이든 친구든 모든 사람을 만나기가 싫고 전화가 와도 몇마디 말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끊었다. 남편이 돌아간지 10년이 되여도 그 후유증이 있었다. 자가격리 며칠이 지나서 부터 누구와 통화면 무슨 말이라도 더 하고 싶다. 시간이 늘 바쁜 딸과도 오래 이야기 하고 싶

고 또 금방 아들에게도 별일이 없으면서 메세지를 보냈다. 아들은 출근길이라고 해서 통화를 못했다. 어쩌면 격리라는 힘든 시간이 나에게 새로운 변화와 좋은 습관이 생겨서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

다.

딸은 지난달 내 생일기념으로 애플핸드폰을 사 보내고 또 씌우개도 부탁해서 4개를 보냈다고 한다. 해준것도 없는 자식들에게서 뭔가를 받을 때마다 미안하다. 딸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가 쓴 책을 읽고 싶다고 한다. 출간식을 한지도 2년이 가까와 오는데 아직 일본에 있는 자식들에게 내 책을 보내주지 못했다.

2020년9월 20일, 꿈에도 생각 못한 나의 작품집 “사랑을 입력하다”의 출간식을 가졌다.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이였고 또한 슬프고 목이 메이는 날이였다. 그 날의 출간식 소감을 다시 적어본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반갑습니다.

올해의 다사다난 했던 바람도 서서히 사라져 가고 온다는 기척도 없이 시작되는 이 화려한 가을 날에, 아름다운 명소 “연성각”에서 나의 작품집 “사랑을 입력하다.”의 출간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각 기쁨과 슬픔이 함께 다가 옵니다.

 

우선 오늘 이자리를 함께한 저의 가족과 우리회원여러분, 그리고 동창생과 래빈 여러분, 참 고맙고 감사합니다. 이런 보귀한 시간을 내주시고 자리를 빛내주어 고맙고 더 없는 영광입니다.

 

비록 이 자리를 함께 하지는 못했어도 다함없는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신 딸과사위, 아들, 시어머니, 시동생들에게 감사합니다.  

 

내 생애의 첫 작품집 “사랑을 입력하다.”를 출판하고 오늘의 출간식 까지 우리선생님과 주변에 도움이 컸습니다. 일일이 호명하지는 않지만 잊지 않겠습니다.

이분들에게 가장 경의로운 인사를 드립니다.

 

제가 우리문학원에서 글쓰기 공부를 하면서 글은 결국 인생의 기록이라고 배웠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여나서 엄마, 아빠의 품속에서 사랑으로 성장했고 한 남자와 뜨겁게 사랑하고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낳아 사랑으로 키웠습니다. 나는 또한 향촌학교 교장선생님을 시아버지로 모시며 시부모님의 사랑을 듬북 받았으며 직장에서 상사와 동료, 친구들, 그리고 퇴직하고 새롭게 만난 우리문학원의 회원분들의 따듯한 사랑을 받으며 매일매일을 엮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은 내 삶의 구비구비, 내 생활의 구석구석 어디에 스며있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특히 남편을 예고 없이 먼저 보낸 아품을 겪으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더욱 가슴 깊이 새기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이야기를 글로 써내는 것이 나에게 사랑을 안겨준 모든 분들에 대한 보답이고 례의가 아닐까 생각하며 큰 결심을 내리고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자판기에 두 손을 올려놓고 내 마음속에 뜨겁게 새겨지는 두 글자를 입력하였습니다. 모니터에는 곧바로‘사랑’이라는 두글자가 커다랗게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첫 페지를 열며 “사랑을 입력하다.”의 작품을 시작하였습니다.

 

밤에 낮을 이어가며 수없이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연필속대 수십개를 날렸으며 컴퓨터에 마주 앉은 날이면 침침한 눈을 비벼가며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굼뜬 손놀림으로 건판을 두드렸습니다. 그렇게 초고를 써놓고 많이 울컥울컥 했던 글은 “그 날부터 너는 내 딸이었다.”는 제목입니다. 큰 아들을 먼저 보내고 며느리 앞에서 먼저 울지도 못하는 시어머님을 오해를 했던 생각을 하니 눈물이 자꾸 흘렀습니다. 서서히 사라져 가는 빗방울처럼 인생의 마지막 역에서 아들이 없는 며느리를 딸 처럼 생각하는 시어머님의 사랑에 때로는 그리움도 잔잔한 행복으로 다가오군 했습니다.

 

이렇게 작품집을 쓰면서 후회도 하고 반성도 했으며 아픈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나의 모든 내면을 발견하게 되였으며 슬프고 힘들었던 시간도 점차 수용할수 있었으며 아픈 순간이든 기쁜 순간이든 모두 다듬어 작품집에 적어 넣었습니다. 그러면서 삶의 모든 순간이 소중함을 깨닫게 되였습니다.

비록 볼잘 것 없는 평범한 나의 삶에 이야기인 “사랑을 입력하다.”의 작품집을 읽고 우리애들과 우리가족, 그리고 모든 분들에게 어떤 위안이 되고 힘이 되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요즘 우리의 말과 언어가 우려되는 현실에서 우리글로 책을 만들게 되여 저는 자호감을 느낌니다.

여러분, 오늘 즐거운 시간이 되기를 바람니다.

감사합니다.”

 

시간이 흘러 오늘까지 그 날의 그 벅찬 순간들을 잊을수가 없다. 오늘은 출간식 소감을 되새겨 보느라니 하루해가 넘어간다.

 

퇴근 시간이 퍽 지난 저녁6시까지 기다렸지만 핵산검사 하러 오지 않는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오늘까지 련속 3일을 검사 받았는데 격리하는 사람들은 어쩌는지 자꾸 궁금하다. 검사받지 않으면 길상코드가 색갈이 변한다는데… 쓰레기도 이젠적지 않게 쌓였는데… 한번 가져가고 다시 오지 않는다. 많이 바쁘신가 보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저문다.

 

8. 문학센터의 당지부서기로

   (2022년 5월 21일 토요일)

 

자가격리 8일째에 이른다. 오늘은 아침부터 볕이 좋아 들로 산으로 날아가고 싶다. 산비탈에 주황색 얼굴로 벙글벙글 웃음 짓는 꺽다리 나리꽃도 한아름 꺽고 초록의 풀내음을 만끽하며 돌돌 흐르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싶다. 하루에도 몇번씩 손가락을 꼽았다 펴며 남은 날자를 헤아려 본다. 이제 며칠이 남지 않았다.

 

력서을 보니 오늘이 남편의 아끼고 좋아하는 직장동료의 아들결혼식날이다. 그직장동료는 우리부부의 결혼 25주년을 기념하여 우아한 호텔에서 괭장한 축하파티를 열어 주었다. 그리고 남편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모든 후사처리를 도맡아주었다. 령전사진, 수의, 마지막 가는 길도 고이 지켰고 일년이 지나 돌제사까지 함께 하였다. 돈으로는 갚을수 없는 은혜이다. 하여 이번 그분의 아들결혼식에 남편의 몫까지 진심으로 축하하려고 벼르고별렀는데 격리하는 몸이라 어쩔수 없다. 축의금이라도 보내려고 훙보에 금액을 정하고 보냈는데 왼걸 여액이 모자란다. 어쩌지 큰일났다. 빠쁘면 고양이도 부뚜막을 뛰여 넘는다고 공자카드에 돈을 어떻게 전이 할수 없을까? 이리저리 한20분 역세질 하다 끝내 훙보카드에 전이시켜 훙보로 축의금을 보냈다. 모른다고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수 없다. 이 나이에 어려운 핸드폰조작도 나절로 할수 있어 오늘 무지하게 기쁘다.

 

오전 9시 반에 건공사회구역 비공익성 당건설그룹의 책임자가 “중공연길시위조직부 문건”을 올렸다. 문건을 훝어 보면서 지난해 4월21일이 떠올랐다. 이날 상급당위의 비준을 거쳐 우리문학원에 당지부가 성립되고 나는 당지부서기 직무를 맡게 되였다. 너무 큰 중책이여서 마음이 무겁던 그때가 생각이 난다.

 

지부서기직을 맡기전에는 문학원에서 한 3년동안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그 동안은 우리 선생님과 륙칠십명의 회원들의 한 마음으로 다함없는 응원과 지지, 용기를 주셔서 나에게는 분에 넘치는 일이 였지만 순조롭게 회장직무를 다 할수 있었다. 비록 내 인생에 회장이라는 직책도 처음이 였지만 묵직한 당지부서기 직무도 꿈엔들 생각 못 했다.

 

지난 해 2021년이 중국공산당 창건 100주년이 되는 성스러운 해이고 또 나의 당령이 정확히 30년이 되는 해였다. 당원이라는 이름을 명기하고 병원의 회계일를 일생동안 하면서 욕심을 버리고 량심의 저울눈을 속이지 않고 나라의 재정정책을 지키며 정직하고 충실하게 본업에 종사하였다. 공령 37년만에 어떤 후회도 없이 깨끗하게 정년퇴직을 하였다. 지금까지는 평범한 일반 당원이였다면 지부서기를 맡은 지금은 어깨가 많이 무겁다.  

 

지난해 4월25일에 우리 문학원 당지부는 홍색력사문화의 고장 룡정에서 당지부 설립의식을 가졌다. 연변의 첫 당지부를 성립한 “민성보” 옛터를 둘러보고 1923년도에 입당한 중국조선족의 첫 공산당원인 한락연 공원 동상앞에서 붉은당기를 펼치고 우리지부의11명 공산당원들이 당휘를 앞가슴에 달고 주먹을 올리고 장엄히 선서하였다.

 

“당에 충성하며 적극적으로 공작하며 공산주의 실현을 위하여 종신토록 분투하며 당과 인민을 위하여 희생할 준비를 하며 당을 영원히 배반하지 않겠다.”

 

당원동지들은 당기 앞에서 다시 맹세 하였다. 그리고 상급당조직의 비준을 거쳐 나의 인생에 “당지부서기”라는 성스러운 이름을 가졌다. 그리고 조직위원, 선전위원, 검찰위원 등 조직구성을 하고 본격적으로  당지부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지부를 건립하고 첫 활동으로 중국공산당 창건100주년을 기념하여 “한성컵” 시랑송콩클을 펼쳤다. 시는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제일 잘 드러내는 문학이다. 우리 문학원의 11명 당원과 9명의 회원들은 가슴에서 우러러나오는 시구절로 랑송이라는 예술로 승화시켜 가장 아름다운 표현으로 당창건 100주년을 기념하였다. 오금숙당원은 “백세년륜 스민 당기 우러러” 시를 직접 쓰고 랑송하고 최청숙로당원도 “내 가슴에 빛나는 당휘”를 직접 쓰고 랑송하고 리춘희, 최정옥등 당원들도 자기의 시를 랑송하였으며 김욱 “당비”, 리욱 “북두성” 김태갑 “옥중의 노래”, 그리고 석화 “7월의 하늘과 땅과 강과”등 시를 당원들과 회원들은 높은 기교를 한껏 발휘하여 당을 노래하고 조국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서태문, 김호웅 등 전문가들로 구성된 평심위원들의 공정한 평의로 우리당지부의 선전위원인 류영자님이 대상, 아래에 금상, 은상, 동상, 장려상 이렇게 표창하였다. 이번 활동을 통하여 나는 로당원들과 지부위원들을 믿고 협력하면 우리당지부를 훌륭히 꾸려 나갈수 있겠다는 신심을 가졌다.

 

오늘 낮은 내 생애에 지워진 “당지부서기”라는 이름을 되새기며 가슴이 벅차던 순간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냈다.

 

저녁은 시누이가 보내온 돼지고기를 구워 취쌈을 해서 먹었다. 산에 취라서 그런지 야들야들하고 향기가 좋다. 취한잎에 구은 돼지고기 한점을 양념에 찍어서 올리고 돼지고기와 같이 구운버섯, 풋고추도 올리고 그리고 고추장까지 올리고 요리조리 싸서 한입에 넣고 씹으면 참 구수하고 담백하다. 그다음 파프리카 한쪼각을 먹으면 입안이 거쁜하여 쌈을 자꾸 먹게 된다. 체력도 보충하고 오늘은 혼자라도 맛있게 먹었다.

 

먹고나니 쓰레기도 적지 않게 나왔다. 쓰레기가 쌓이면서 요즘 날씨가 더우니 냄새가 난다. 사회구역 후군 책임자에게 련락하려고 핸드폰을 손에서 들었다 다시 놓았다. 그들도 바쁘겠지… 좀 참아보자.

오늘도 의미있게 보내고 포근한 잠자리에 들었다. 

 

9. “집의 의미”,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첫 작품

   (2022년 5월 22일 일요일)

 

자가격리 9일째이다. 전날과 다름 없이 일어나자 창문부터 열었다. 시원한 아침공기를 한모금 크게 들이 켰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아빠트단지의 곳곳에 내려앉아 뜨거운 하루를 시작한다. 고맙게 잘 자란 나무가 자잘한 그늘을 펼친다. 연초록의 

 

나무잎들이 미풍에 하늘거리고 그 뒤에 보이지 않는 새들이 나무가지 위에서 떠들며 요란스럽다. 이 집에서 6, 7년을 살았는데 오늘처럼 목청것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다. 기분이 상큼하다.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언니와 형부가 힘겨운 걸음을 하였다. 토마토, 사과, 오이, 메추리알 등을 사서 한 꾸러미 만들었다. 바줄로 짐을 묶어 올려보내고는 끼니를 건느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고는 그 자리로 돌아섰다. 시누이와 친구에게서도 수요되는 것이 없냐고 련락이 왔다. 평시에는 뭐를 사도 일인분씩 사니 빠듯하였는데 요즘에는 냉장고가 넘쳐난다. 덩달아 마음도 풍성하고 든든해 진다.

 

열흘가까이 집에 같혀 있으면서 다리가 쫄아 붙을가봐 주방부터 남쪽창문까지 갔다왔다하며 걷는다. 왼지70평방도 안되는 집이 넓어 보였다. 내 보폭으로 한쪽 거리가 25보이다. 짧은 거리다. 이 공간이 나의 집이다.

 

오늘따라 지인이 소개로 문학공부를 시작하여 첫 숙제로 이 집의 느김을 꼬리대가리 없이 썻던 그때가 떠오른다.

그날은 2016년 8 월이다. 퇴직한후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소개로 문학아카데미에 참가하게 되였다. 공부를 시작하여 한달후 숙제로 내가 이사온 지금의 이 집에 대한 느낌을 글로 썻다. 아마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내 인생 절반은 쓴것 같다. 저녁 학습시간에 눈물코물 흘리며 학우들 앞에서 읽었다. 우선은 선생님은 잘 썻다고 칭찬하셨다. 흐뭇했다. 잠시뒤 선생님의 차근차근한 평어와 학우들의 거침없는 평가를 받았다. 눈물이 쏙 들어가고 얼굴이 확근하였다. 내용에 맞지 않는 서두와 결말, 그리고 제목과 관계없는 사연들이 지저분하게 많이 넣었다고 짯짯하게 말한다. 처음 쓰는 글이 그렇지뭐... 하는 생각도 가졌었지만 어떻게 보면 그때의 예리한 작품평의가 없었더면 그후의 작품들이 나올수 없었을 것이다.

 

 반복적인 평의와 수정을 겨쳐 마침내 이 글은“집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탄생하여 인터넷신문“해란강문학성”에 발표되고 그해 11월호 “연변녀성” 잡지에 인쇄된 글로 내 이름 “리. 정. 림” 석자가 턱 찍혀 나왔다. 평생 수자로 계산하는 회계일만 하던 나에게는 세상 다 가진 기쁨이였다. 하지만 돌아 앉으니 한편으로는 슬픈 생각이 한동안 더 크게 다가 왔다. 첫 작품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글로서도 내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줄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그후 많은 작품을 썻다.

 

비록 쓴 글이 퍽 좋은 작품이 되지는 못 하더라도 나로서는 모두 소중한 작품이다. 이렇게 줄잡아30여편을 썼다. 그 작품들이 한편두편씩 "연변문학" 등 문학지에 발표되고 중앙조선말방송, 연변방송과 흑룡강방송등에도 방송되었다. 2019년에는 “로년세계” ‘설봉컴’ 생활수기 공모에서  “가슴이 물클했던 하루” 가 우수상을 받았으며 2020년에는 “청년생활” 제4회 “계림문화상” 공모에서 “손아래 동서 <수이러우>”가 은상을 받았다. 이외 가사도 10여수나 썼다. 그중 가사 “그냥 그대로” 와 “첫눈의 약속”,  “당신의 손길” 등 세수가 작곡되어 연변텔레비죤방송과 연변라지오방송 "매주일가"로 나갔다. 또한 "연변음악" 잡지에 여러 수의 가사가 발표되었다.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첫 작품  “집의 의미”로 시작한 작품이 모여  마침내 300페지가 넘는 나의 개인작품집 “사랑을 입력하다”를 묶을수 있었다.

 

한편 한편의 작품에 나의 아픈 순간이든 즐거운 순간이든 글로 옮겨 적어내려가면서 내 삶이 보다 소중함을 느꼈다. 글을 쓰면서 나의 내면도 발견하게 되었다. 혼자 사는 녀인은 쉽게 아프다. 하지만 그런 시간도 수용하게 되였으며 새로운 삶을 탐색하는 길이 되었다. 나의 첫 작품 “집의 의미” 내용을 몇 단락 다시 읽어본다.

 

“지난해 팔월 말, 머리 속에서만 그려보던 새집에 이사했다. 시내 서쪽에 위치한 70평방이 되나마나한 집이다. 비록 자그마한 집이지만 우아한 벽지에 포근해 보이는 커텐, 아담한 거실과 침실, 깔끔한 주방, 깨끗한 위생실... 모든 것이 정말 꿈만 같았다.

 

집 장식하면서 힘들고 지쳐도 슬픈 일은 가슴 깊이 묻어두고 앞만 보고 살 것을 생각하면서 기운을 냈다. 모든 것이 새 것이여서 좋았고 모든 것이 편리해서 좋았다. 새 가스렌지에 새 냄비에 밥하고 반찬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차려놓고 혼자 먹으려니 밥상머리에 눈물이 소리 없이 뚝뚝 떨어졌다.”      

 

“퇴직을 앞둔 2012년2월말의 어느 날, 남편은 아침출근 하려고 문을 나서다말고 다시 돌아서 나를 포근히 안아주고 문을 나섰다. 그런데 그것이 영원한 리별이 될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바로 그날 저녁 7시경에 남편은 쓰러져 그 길로 나와 애들 곁을 영원히 떠나고 말았다.”      

“집 구석구석에 남편의 손때가 묻어있다... 

...”      

“이사하여 새로운 환경이면 이 모든 것이 잊혀질 줄 알았다. 허나 새집에 이사 와서도 비 오는 날이면 어느새 문 앞에 오도카니 서서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저 비에 젖지 않을가, 해나는 날에는 해빛이 뜨겁지 않을가 근심한다. 시간이 얼마 흘러야 희석될지 모르는 이 그리움, 시간이 약이라 하지만 세월은 그 약을 언제쯤 나에게 가져다줄런지...”

 

“포근하고 따뜻한 새 집이지만 외롭고 쓸쓸함, 그리움은 깊어만 간다. 집이란 가족이 모여 밥을 같아 먹고 서로 아끼고 보듬고 사랑하면서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는 곳임을 문뜩 깨달았다. 식구들이 북쩍거리며 살아가는 집이야말로 비로서 그 의미가 있지 않을가.”

 

내가 쓴 글이지만 다시 읽어도 감회가 새롭다. 오늘은 하루동안 세수도 안했다. 차라이 저녁을 먹고 이도 닦고 세수하자. 하루 세끼 먹는 것도 습관이 되여간다. 하루 두끼를 먹을때는 음식을 보아도 꿈만했는데 먹으면 먹을수록 음식탐을 하게된다. 저녁은 시누이가 보내온 더덕에 내가 만든 고추장을 발라 살짝 구워서 옥수수밥 한공기를 게걸스레 먹었다. 지지고 볶으고 기름 냄새나고 음식 냄새나고 인제야 사람이 사는 집이 같으루 하다.

오늘해도 저물고 밖이 어두워지자 커텐을 내렸다.

 

10. 문학공부 총복습

   (2022년 5월 23일 월요일)

 

자가격리 10일째이다. 창밖을 내다보니 아빠트단지 안의 작은 광장에 아침 일찍부터 환경미화원들이 몰려든다. 아마도 일때문에 핵산검사를 먼저 하려나 보다.

 

초여름의 한낮은 뭉긋하게 풀어진다. 투명한 햇살아래 풍기는 자연의 향기는 얼마나 싱그러울까? 격리해제가 이제 이틀이 남았다. 몇일 남지않은 오월의 향기여, 조금만 기다려 주소서.

 

따스한 커피 한잔을 들고 글향기가 풍기는 아담한 책꽂이 앞에서 서성이다가 몇년간 문학공부에 도움을 준 교과서를 두루펼쳐보았다. 2016년 8월부터 문학쎈터에 다니면서  “글짓기바탕” “시창작의 리론과 실제” “가사창작의 리론과 실제” 등 교과서로 많은 문학공부를 하였다.

 

글짓기에서 말을 그린 것이 글이며 이 말과 글이 가장 아름답게 이루어진 것을 문학이라 부르고 그 문학의 최초와 최후가 시라고 배웠다. 이런 기초 지식부터 기록은 삶을 성찰하여 새로운 삶을 꿈꾸며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며 또한 기록을 통해 삶은 더욱 진지해지고 충실해지며 가치로워 진다는 기록의 중요성을 한층 리해하였다. 덕분에 내가 생각한 말을 능란하게 글로 남길수 있었고 수기, 수필을 쓸수 있었고 “사랑을 입력하다”라는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묶을수 있었다.

 

2019년에는 “가사창작의 리론과 실제”를 배웠다. 이런 리론들을 다 소화를 하지 못하지만 공부하면서 내가 제일 먼저 썻던 “미운 그대”라는가사가 떠오른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생각나는 그대여/ 바람 불면 바람 불어 떠오르는 그대여/ 그리움에 흐느끼는 나를 두고서/ 그대는 저 혼자 어디로 가셨나/

비가 오면 우산을 씌워주던 그대여/ 바람불면 시린 손을 잡아주던 그대여/ 외로움에 몸을 떠는 나를 두고서/ 그대는 저 혼자 어디로 가셨나

후렴) 미워요 미워요 나를 버리고 떠난 그대 / 미워요 미워요 내 마음 가져간 님

 

이것은 처음 쓰는 가사라 노래말의 언어보다는 평범한 언어가 많고 노래말에 그림나 정감이 부족하다. 아래에 2020년7월6일에 연변텔레비방송에 매주일가로 나갔던 가사 “그냥 그대로”를 살펴 본다.

 

노을이 지는 창가에 앉아서/ 흘러가는 구름에 추억을 실어요/ 색바랜 사진 한장 못잊을 그 모습/세월이 흘러가도 지워지지 않아요/ , 그리워라 내 사랑 그대여/ 그대로 마음에 담아 둘래요

 

달빛이 내린 창가에 앉아서/ 반짝이는 별들에 그리움 띄워요/ 한없이 부드러운 그윽한 그 눈빛/ 오늘도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어요/ 아, 그리워라 내 사랑 그대여/ 그대로 마음에 담아 둘래요

 

가사 공부를 하면서 언젠가는 예고 없이 돌아간 남편을 위하여 노래 한수는 만들려고하였다. 이가사는 나의 그리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였고 소재는 가까운 나에게서 찾았고 정감이 있는 가사라 하겠다. 물론 쓰고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하였고 선생님의 도움을 받으며 완성한 가사이다. 이 노래가 “매주일가”로 나오는 한주간 내내 울었다. 우리가족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도 듣고는 마음이 쓰르르하며 그리움을 담은 노래가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후 신심을 얻고 많는 가사를 썻다. “구월국화”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설립 70주년을 기념하여 올봄에 썻다. 예전의 가사에 비하면 소재부터 제목, 첫 구절과 그림이 있는 노래말인것 같다.

 

구월이 오는 소리 국화꽃 피는 소리/ 고향의 산에 들에 구월향기 싱그럽네/ 슬렁슬렁 불어오는 모아산 바람결에/ 단풍잎도 덩달아 신나게 춤을 추네/ 아, 얼씨구 절씨구 좋구나 좋아/ 구월국화 피는 계절 고향의 명절

국화꽃 피는 소리 구월이 오는 소리/ 우리네 가슴마다 구월향기 넘쳐나네/ 선들선들 불어오는 비암산 바람결에/ 단풍잎도 덩달아 신나게 춤을 추네/ 아, 얼씨구 절씨구 좋구나 좋아/ 구월국화 피는 계절 고향의 명절

 

지난해는 “시창작의 리론과 실제”를 학습하였다. 문학의 모든 쟝르와 마찬가지로 시 역시 인간의 삶을 담고 있다. 지난해 주요하게 “시의 흐름과 특징” “시어와 운률” “시적 의미지” “시적 비유와 상징” “시적 발견 ”등을 배웠다. 시공부는 우리문학쎈터에서 두번을 배웠다. 아무래도 시는 배워도 배워도 어렵다. 아래에 처음 시라고 쓴 련시조 “가을은 그리움”을 보겠다.

 

가을비  흔날려  그리움  더해가니  

젖어든  락엽에  리별이  차갑구나  

슬픔은  가슴에 흘러  시리고  아프다  

 

가지에  한잎 남은  추억같은  이파리  

바람따라  떠나갈  차비를  하는구나    

차라리  외로움  한줌  가슴에  묻어둬아  

 

매미울음  슬프게  가을을  잡는구나    

단풍은  아니라고  고개를  돌려도  

조금만  건드렸는데  그리움 흐느끼네

 

오늘은 심심하지 않게 몇년동안 공부한 교과서들을 하루 낮동안 살펴보며 복습하였다.

오전10시쯤에 마침내 사회구역 후군 방역일군이 오셔서 집안에 퀴퀴하게 풍기던 쓰레기를 가져가고 문을 다시 봉하고 돌아갔다. 지난 10일을 돌아보면 왼지 밤잠을 어느때 보다 푸욱 잔것 같다. 다름아니라 출입문을 봉하여 안전감이 있어서인것 같다. 아무래도 여자의 혼자 몸으로 어두운밤은 무서웠다. 

격리생활 10일째, 오늘 하루도 저물어 간다.

 

11. 길상코드의 색갈

   (2022년 5월 24일 화요일)

 

오늘은 격리해제 바로 전날인 11번째 날이다. 래일이면 격리가 해제된다. 마음보다 몸이 알아 차렸을까? 아침 4시30분에 일어났다. 밤에 빗소리가간간히 들리더니 땅이 촉촉히 젖어있었다. 뜰안에 간혹 고인 빗물이 보여도 포근하고 쾌적한 아침이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눈뜨면 커피가 생각난다. 어제까지도 혈압약  먹을 시간을 기다려 먼저 약을 먹고 2 ~ 30분후에 커피를 마셨다. 오늘은 약을 챙겨 먹기 전에 커피를 마시며 출근시간에 마추어 사회구역방역책임자에게 련락하였다. 책임자는 오늘 우리사회구역에 핵산검측을 받을 사람이 60여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핵산검측을 하려면 시간이 어떻게 되겠는지 알수 없으니 기다리고 있으라고만 한다.

 

손에 아무일도 잡히지 않아 자꾸 서성거린다. 왜냐하면 격리하는 동안 한번만 핵산검측을 받았다. 말로만 듣던 길상코드 색갈이 변하여 황색이 나오면 래일에 정상적으로 격리해제가 될까? 하루하루를 참고 견디며 일기를 쓰면서 버텨왔지만 인젠 한시간이라도 그 무심한 비일상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9시30분에 똑똑 문드드리는 소리에 얼른 일어나 문가로 갔다.

“누구세요?”

“핵산검측하러 왔습니다. 문을 열어 주세요.”

한 녀방역일군의 목소리이다.

“예~”

 

너무 반가워 얼른 대답하며 문을 열었다. 그동안 출임문에 붙혀있던 봉쇄표 종이가 붙어서 찌르르 찟기면서 문이 힘겹게 열린다. 전신 무장한 여리여리한 녀성방역일군 한분이 방호복을 입은 몸 량옆에 핵산검측에 편리하게 커다란 노란 비닐주머니를 달고 셈풀체취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는 순간 측은 하기도 하고 아직도 1선에서 일하는 전문인원이 부족함을 느낀다. 그녀는 집에 들어 안 오고 출입문 복도에서 능란한 솜씨로 면방 한개로 샘풀을 체취하고 또 한개를 더 체취한다. 왜서 두개를 하는가고 물으니 만일을 대비해서 그런다고 한다. 높은 책임성에 감탄하고 또한 격리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혜아려 주어 넘 고마웠다.

 

그녀가 나의 핸드폰에 길상코드를 검색하려니 걱적했던 것처럼 이미 황색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너무 당황하여 이러면 래일에 격리해제가 되겠는가고 다잡아 물었다. “오늘 핵산검측하고 이상이 없으면 래일에 록색으로 돌아올겁니다. 그러면 래일 정상적으로 격리해제가 됩니다.”

 

그녀는 이렇게 차분히 알려주고 짐들을 챙겨가지고 무겁게 계단을 내려갔다. 어서 저 둔중하고 무거운 방호복을 벗어던질 날을 기대해 보며 그에게 “빠이빠이”로 한손을 들어 인사하며 문을 닫았다.

 

핸드폰을 열고 말로만 듣던 황색으로 변한 길상코드를 다시 보면서 첨단과학기술이란 이렇구나 하는 것을 다시  느끼며 일전어치도 도움이 없는 이런저런 걱정으로 시간을 때우니 어느새 점심때가 되였다.

 

점심은 새우젓으로 간을 한 달갈국에 미나리를 무치고 고등어 반마리를 노랗게 구워 반찬으로 먹었다. 간편하고 빨리 해서 먹을수 있는 나의 닭알국의 레시피는 달군 냄비에 기름을 조금 두르로 닭알 한알을 깨서 넣고 저으며 반숙이 되면 물을 한공기 붓고 새우젓으로 간을 하고 한5분 끓이면 물이 보얗게 된다. 끓이기도 간편하고 국이 참 시원하다.

 

오후 2시에 똑똑 문두드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누구일까?” 라고 생각하며 되지도 않는 중국말로 “나 워이” 하니 집에 사람이 있는가고 묻고는 문에 봉쇄표종이를 다시붙인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지? 사회구역의 방역후군을 책임진 분이다. 아마도 오전에 핵산검측을 하고 선자리에서 문을 다시 봉하지 않고 간 것 같다. 핵산검측을 하는 인원이 있고 또 전문 후군을 책임진 인원이 따로 있는것 같다. 미처 일손이 딸려 문을 봉하지 않았다. 아직도 제1선이서 일하는 방역일군과 후군일군들이 많이 부족하여 이런 틈새도 있는 것 같다.

 

저녁은 간편하게 먹었다. 약간 굳은 찰떡을 얍게 저며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노르스름하게 구워 사탕가루에 찍어 두세개 먹었다. 달달한것만 먹으면 입이 거뿐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어제보던 텔레비죤련속드라마를 둬개 보고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생각하면 십여일 동안 좋은 습관 하나는 생긴것 같다. 저녁에 일찍자고 아침에 일찍이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 아침에 일어나 장판을 닦고 책상우에 먼지도 닦고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화분에 물을 주고 소소한 집일을 마치고 노트북에 앉지 않으면 책을 읽고 아무튼 아침 두세시간은 잘 활용할수 있었다. 이렇게 하루일을 오전에 다 해치우니 시름이 놓여 하루동안 마음이 가벼웠다.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니 하루에 조금씩이라도 세끼를 먹을수 있었다. 전에는 하루에 한두끼만 먹었다. 십여일이 습관을 만들었고 나중에 이 좋은 습관이 더 좋은 나를 만들 것이다.

 

밤은 깊어가는데 정신은 오히려 또렸해 진다. 격리가 해제되면 래일 무엇부터 할까? 또한 코로나는 언제면 물러갈까? 정부의 엄격한 방역조치로 조금은 평안하던 우리주변은 3월부터 또 새로운 변종인 오미크론이 스멀스멀 머리를 쳐들면서 다시 일상이 무너지고 비일상이 시작되였다. 비일상이 반복되면서 비일상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번은 선로뻐스에 앉아 어느 역에 도착하였다.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중 한분만이 신수가 멀끔하게 눈에 띄였다. 살펴보니 그 한사람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 코로나 전이라면 그 사람이 정상인데 지금은 그 사람이 비정상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모두가 개인 방역수칙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왔듯이 앞으로도 잘하면 우리의 일상을 빨이 찾아 오지않을까? 이렇게 두서없는 생각을 한다

 

우선 래일은 약국에 가서 마스크부터 구매하고 여름옷을 입고 한껏 멋도 부리고 랭면도 먹고 콩국수도 먹고 친구랑 동료들을 만나면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꿈나라로 갔다.

 

12. 해방, 자가격리 마지막 날

   (2022년 5월 25알 수요일)

 

오늘은 아침 4시에 눈을 떳다. 오늘은 격리해제가 되는 날이다. 초록의 잎들과 햇살, 미풍이 어울려 부드러운 아침을 장식한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로 핸드폰을 열고 길상코드를 확인했다. 새벽 1시5분에 록색 코드로 변해 있었다. 6시를 기다려 어제 알려준 전담방역원에게 록색길상코드와 록색동그라미속의 “음”성이라는 글자화면을 캐첨해서 보냈다. 1~2분후 “격리해제”라는 문자가 날아왔다. 5분후 언제 문을 열어주는가고 문자를 보냈다.

“절로 문을 열고 나가세요.”

 

전담방역원은 잠결에 목이 잠긴채로 음성메서지를 보내왔다. 이른 아침이라 짜증도 날만한데 일일이 답복해 주어 고맙고 또한 고지식하고 어리버리한 내가 우스웠다. 문득, 코로나도 이번 자가격리처럼 기다리다가 불쑥 오는 문자 한통으로 뚝딱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문을 차고 한걸음에 밖으로 뛰쳐나왔다.

 

두 팔을 벌리고 “해방이요.” 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10여일만에 밖에 나와서인지 눈이 부시고 초점이 잘 맞혀지지 않는다. 60여평방되는 집안에서 노트북이랑 핸드폰의 화면만 보다가 오랜만에 넓은 세상을 보니 눈근육이 작동하지 않는 느낌이다. 두 다리도 구름우를 걷는듯 하다. 그러면 어떻하랴. 지금처럼 마음껏 하늘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맑고 시원한 공기가 페부로 스며든다. 격리전에는 화단의 야들야들한 꽃잎들이 연한 초록이였는데 오늘은 짙은 록색으로 무성하다. 격리의 나날에 봄을 보내느라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볼수 없었고 맡고 싶은 짙은 꽃향기를 마음껏 맡을수 없어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 남은 싱그러운 5월의 짙음을 볼수 있고 맡을수 있어 그저 고맙고 그저 기분이 좋고 그저 행복하다. 

 

한참을 혼자서 바람과 나무와 떠들며 사진을 남기고 올라와 출입문 손잡이를 잡다말고 문옆에 붙혀있는 전담방역원이 자가격리인원을 관리한 기록표가 한 눈에

 들어왔다. 기록표에는 전염병 예방, 통제 전문인원 두명이 매일 와서 복도를 소독하고 순찰한 기록이 시간과 날자별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놀라웠던 것은 오늘 아침에 벌써 일찍 와서 마지막 체크까지 하고 갔던 것이다.

 

밤 낮이 따로 없이 위험하고 힘든 전염병 예방, 통제 1선에서 무한한 책임감과 묵묵히 임무를 완성하는 전담방역일군, 그들이 더없이 고마웠다. 방호복으로 가려져 얼굴도 모르고 아무런 인연도 없지만 뜻하지 않는 격리로 오돌오돌 떨고있는 나에게 친인처럼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하며 핵산검측을 해주시던 분들과 중국말이 어수선해도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일일이 답복하고 답장을 보내준 분들, 문밖에서 누가 알건 모르건 최선을 다한 모든 분들이 떠오르며 바이러스는 무정하지만 인간세상은 정이 넘침을 다시 한번 알았다. 이들의 매 하나하나의 땀방울이 모여 하루 빨리 코로나가 말끔히 물러 가면 좋겠다. 비록 지금은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로 누구나 전례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전염병 예방, 통제에 협조한다면 멀지 않아 승리의 서광을 맞이 할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자가격리 12일은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다. 이제와서 돌아보니 그 나날들이 빨리 흐른 것만 같다. 매일이 비슷한 일상이라 날짜 감각이 무뎌진 탓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제는 불안할것 없고 밖으로 나가선 안 될 리유도 없다. 이전처럼 정상이다. 돌아보면 첫째 몸이 아픈 곳이 없어 버틸수 있었다. 체력을 보충할 음식을 보내준 형제들과 친구가 고맙고 그리고 매일 도착하는 응원의 메세지들이 큰 힘이 되였다.

 

더욱히는 매일 격리일기를 쓰면서 답답하고 긴 시간을 보낸 내가 자랑스럽다. 그것이 버틸수 있는 참 좋은 방법인 것 같다. 혹시 지금 격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보고 힘든 시간을 버티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세상에 둘도 없는 언니, 시누이와 동료, 친구들 한테서 축하전화와 문자가 오고 만나자고 한다. 들뜬 마음으로 아침은 간단히 닭알찜을 해먹고 오랫만에 화장도 하고 우아한 옷을 차려 입고 동료들의 축하파티 모임으로 향하기로 했다.

이것으로 “격리일지 ㅡ코로나시대 12일의 기록”을 마친다.

/이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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