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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6/05/03  이정림
집의 의미

지난해 8월말, 머리 속에서만 그려보던 새집에 이사했다 시내서쪽에 위치한 60평방메터 되는 집이다. 비록 자그마한 집이지만 우아한 벽지에 포근해 보이는 커텐, 산뜻한 거실, 아담한 침실, 깔끔한 주방, 깨끗한 위생실… 모든 것이 정말 꿈만같다.

 

집장식하면서 힘들고 지쳐도 슬픈 일은 가슴깊이 묻어두고 앞만보고 살 것을 생각하면서 기운을 냈다. 모든 것이 새 것이여서 좋았고 모든 것이 편리해서 좋았다. 새 가스렌지에 새 냄비에 밥하고 반찬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차려놓고 혼자 먹으려니 밥상머리에 눈물이 소리 없이 뚝뚝 떨어진다.

 

몸은 새집에 있지만 눈만 감으면 우리식구들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묻혀있는 철남 6층집이 생각난다. 1997년9월 시골에서 두 아이 공부때문에 무작정 연길에 이사 왔다. 집값은 전부 대출받고 집장식에는 만원도 채 들지 않았다. 모두 제일 싼 것으로 했다. 책장, 이불장, 찬장은 간단하게 짜놓았고 바닥에도 값싼 장판을 깔았다. 그릇 같은 가재도구는 이미 쓰던걸 그대로 가지고 왔다. 비록 새집이지만 새것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시골을 벗어나 두 애를 마음껏 공부시킬 것을 생각하며 우리 부부는 활짝 웃었고 된장찌개 하나 놓고도 네 식구 모여 앉아 맛있게 먹었다.

 

이사 온 다음날, 아직 할 일이 태산 같은데 남편은 애들을 앞세우고 한 시간이나 걸어 공원 맞은 켠 사진관에 가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잘 한 일이다. 살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가족사진 보면서 우리 부부는 힘냈다. 지난해 이사 할때 낡은 것은 죄다 버리고 왔지만 가족사진만은 갖고 왔다.

 

시내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생각보다 힘들었다. 시내는 문만 나서면 돈이다. 우리 부부의 적은 월급으로 애 둘을 공부시켜야 했고 빚도 갚아야 했다. 생활비 지출도 적지 않았다. 우리 부부가 의란으로 출퇴근하다보니 차비도 적지 않게 들었다. 차비를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퇴근할 때면 의란뻐스에서 내려 철남집까지 걸어 다녔다. 겨울에는 집까지 걸어오면 벌써 날이 깜깜하고 손발이 꽁꽁 얼어들어 울음이 날때가 한 두번이 아니였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내 언 손을 품속에 넣고 녹여주었으며 애들도 얼음장 같은 내 발을 조물락조물락 만져주었다. 이러면 얼어들었던 마음도 손발도 스르르 녹았다. 어렵게 지냈지만 내 보금자리에 내 가족이 있어 든든했다.

 

아들애는 소학교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정심도시락을 싸들고 책가방을 메고 타박타박 걸어 다녔다. 언제 한번 학교에 데려가고 데려오지를 못했다. 용돈은 하루에 일원밖에 주지 못 했다. 그래도 불평 한번 없었고 일원마저도 절대 허투루 쓰지 않았다. 아들은 고중을 졸업하고 대학에 가기 전 한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집에 위성안테나를 설치해주었다. 집집마다 다 보는 텔레비죤련속극도 그때까지 우리는 보지 못 했다. 딸애는 학교에 갔다 오면 늘 집 청소부터 하고 빨래며 밥까지 해놓고 식구들을 기다리군 했다. 우리 부부가 출근길이 멀다보니 일찍부터 딸에게 한달 생활비를 맏겨 채소와 일상생활용품들을 사게 했다. 딸애는 가계부를 꼼꼼히 작성하면서 한 푼이라도 쪼개 쓰려고 노력했다. 그때 경험이 도움이 되여서인지 딸애는 지금 결혼하여 제 집 살림을 알뜰하게 하고 있다.

 

대출받은 집값을 거이 갚을 무렵이였다. 2006년 3월초, 나는 배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갔다. 여러 가지 검사를 마치고 진단이 나오자 의사들은 인츰 가느다란 고무호수를 코구멍으로부터 위장에까지 닿게 넣었다. 숨도 제대로 쉴수 없어 죽을 것만 같았다. 차라리 치료를 포기하고 싶었다. 밤까지 겨우 참다가 곁에서 간호하던 남편이 잠간 잠든 사이에 고무호스를 빼버렸다. 인기척에 깨여난 남편은 와락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결혼하여 25년, 남편이 이렇게 심장이 터질 것처럼 슬프게 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끝내는 대장절단수술했다. 수술실에서 병실에 옮긴 나에게는 성한 곳이 없었다. 줄줄이 드리운 호수로 산소와 수액이 흐르고 수술자리에서도 피물이 흘렀다. 또 입에서는 무슨 분비물이 흐르는지 남편은 수없이 닦아냈다. 눈동자만 움직일수 있었다. 혼자 걸을 수도 없었고 스스로 일어설수도 없었다. 남편은 내 손발이 되여주고 밤낮이 따로 없이 극진히 보살폈다. 내가 아프면 같이 아파하고 내가 먹지 못하면 같이 먹지 못하면서 죽을 고비를 함께 넘겼다. 퇴원하여 남편의 등에 엎여 집에 오니 집이 그렇게 좋을수 없었다.

 

어설프게 장식한 집이지만 우리는 이 집에서 그래도 두 아이를 류학까지 보냈다. 딸애를 결혼시키고 외손자 보고 시어머니를 모셔와서 지지고 볶고 매일 북적거리며 살았다. 2011년 가을, 생활형편이 좀 나아지자 집을 다시 장식했다. 창문을 전부 바꾸고 벽을 새로 도배하고 주방싱크대도 바꾸었다. 인젠 깨끗한 집에서 인생이 저물어가는 황혼에 누구도 먼저 손 놓지 않고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 것을 생각하니 신이 났다. 남들이 웃을지는 몰라도 여태까지 우리 부부는 등불이 휘황한 연길 밤거리를 한번도 손 잡고 거닐어보지 못했다. 오로지 앞만 보고 산 것 같다 그런데 사람은 왜서 힘들고 어려운 고비를 다 넘기고 행복해지려고 하면 떠나는지… 새로 장식한 집에서 남편은 넉달 밖에 살지 못했다.

 

퇴직을 앞둔 2012년2월말, 그날도 남편은 출근을 하려고 문을 나서다 말고 돌아서 나를 꼭껴안고 볼에 진한 키스를 했다. 그런데 그것이 영원한 리별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그 순간 문득, 당신의 아내로 지금까지 당신사랑을 마음껏 받으며 화기애애한 우리 집 보금자리에서 내 마음을 읽을줄 아는 당신과 두 아이엄마로 크고 작은 일,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당신만 믿고 행복하게 살아왔다는 생각하면서 평소 흔하게 하지 않던 키스가 어쩐지 불안했다. 과연 남편은 바로 그날저녁 7시경에 나와 애들 곁을 영원히 떠나고 말았다.

 

집 구석구석에 남편의 손때가 묻어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항상 “갔다 올게.” 하며 희죽 웃던 모습, 저녁에 퇴근하면서 반찬거리, 간식거리를 두손 가득 들고 들어서던 모습이 눈에 선하고 남편이 부드러운 목소리,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가슴으로 들려온다. 없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아침에 일어나면 남편이 누워있던 침대에 눈길이 가고 저녁이면 멍하니 앉아 출입문만 바라본다. 철커덕 열쇠 따는 소리가 자꾸들다

 

이사하여 새로운 환경이면 이 모든 것이 잊혀질 줄 알았다. 허나 새집에 이사 와서도 비 오는 날이면 어느새 문 앞에 오도카니 서서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저 비에 젖지 않을가 해나는 날에는 해빛에 뜨겁지 않을가 근심한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희석될지 모르는 이 그리움, 시간이 약이라 하지만 세월은 그 약을 언제쯤 나에게 가져다 줄런지…

 

포근하고 따뜻한 새집이지만 외롭고 쓸쓸함은 여전하고 그리움은 깊어만 간다. 문들 깨달았다. 집이란 가족이 모여 밥 먹고 얘기 나누고 쉬기도 하고 잠도 자는 안식처이며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곳임을. 식구들이 북적거리며 살아가는 집이야말로 비로소 그 의미가 있지 않을가?

/이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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