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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0/10/14  한민족신문
인생 맛이 바로 이 술맛이야!

김해룡 선생님, 그립습니다.

김해룡 선생님은 내가 연변대학을 다닐 때의 담임선생님이시다.

 

선생님께서 올봄에 세상을 뜨셨다.

비보를 뒤늦게 들은 나는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선생님은 나에게는 선생님이시자 형님같은 분이시다.

1978년 6월, 연변대학 조문학부 77기 조문반 "머리 큰" 학생 6명이 학교청사앞에서 김해룡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찍은 기념사진. 앞줄 중간에 앉으신 분이 김해룡 선생님이시다.

 

개학 첫날 저녁에 선생님께서 날 집에 오라고 하셨다.

 

댁에 도착하니 사모님께서 날 보고 아바이(할아버지)대학생이 왔구만, 하고 농담 섞인 말씀을 하시며 반기셨다.

 

선생님께서는 싱글벙글 웃으시면서 날 맞아주셨다.

 

구들엔 밥상이 차려졌는데 술잔 두개가 놓여있었다. 난 다소 어안이 벙벙해났다. 시키는 대로 밥상에 앉으니 선생님께서 손수 첫 술잔에 술 따라 주시면서 넌지시 물으셨다.

 

술, 좀 마시오?

예. 좀 마십니다.

 

나의 대답에 선생님께서는 허허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영철이를 데려와서 흑룡강에 모집하러 갔던 두 선생이 몰려대고 있다오. 술친구를 데려왔다고 하면서.

 

내가 어색한 웃음을 짓자 선생님께서는 웃으시면서 내가 뽑힌 사연을 들려주셨다.

 

흑룡강에 모집하러 가셨던 두 분께서 성적순서로 남자응시생 5명과 여자응시생 5명을 뽑고 신상등록서를 찾아보셨단다.

 

최영철, 1946년 3월 출생.

 

두 분께서는 머리를 저으며 나이가 너무 많다면서 나의 이름을 지웠단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중앙에서 문화대혁명전의 고중졸업생은 나이가 많아도 시험을 치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시험성적이 좋으면 뽑아야 한다. 이렇게 나의 이름은 다시 합격명단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 또 지워졌단다. 학교에 돌아가면 술친구를 데려왔다고 문제시 될 수 있을 것 같아서란다.

 

처사가 찝찝함을 느낀 두 분은 흑룡강신문사를 찾아가 윤응순 사장의 의견을 들어보셨다고 한다.

윤사장의 대답은 명료했다. 최영철의 성적이 좋으면 입학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졸업 후 우리가 받겠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내가 입학했다고 알려주셨다.

 

며칠 후 선생님께서는 또 나를 집에 초대해 주셨다.

술이 몇 잔 돌자 선생님께서는 불쑥 물으셨다.

 

영철의 수학성적이 왜 높나?

고중 때 수리화공부에 열중했습니다.

 

아, 그래? 그럼 수학학부로 갈 생각이 없나?

 

나는 선생님께서 이처럼 자상히 관심하시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차, 졸업 후 흑룡강신문사에서 받겠다고 한걸 깜빡했어. 그렇게 되면 좋은 일이지.

 

여름방학에 집으로 돌아 온 나는 가슴 아픈 일을 목격했다.

 

마을에 얼음과자 장사가 왔다.

두 살짜리 작은 아들이 엄마보고 사 달라고 떼를 쓴다. 얼음과자 하나에 3전씩 할 때였다. 아내의 손에는 3전도 없었다. 가슴이 칼로 난도질 하듯 아팠다.

 

나는 집으로 돌아온 아내에게 말했다.

 

가정을 돌보려면 통신학부로 옮겨야겠소. 옮기면 집에서 공부하고 방학에 학교에 가 시험만 보고 성적이 합격되면 같은 졸업장을 탈수 있소. 새 학기부터 통신학부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아내는 다른 의견이 없었고 형님도 그렇게 하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개학 이틀 전에 학교에 가서 선생님을 찾아가 내 생각을 털어놨다.

 

선생님의 얼굴은 삽시에 굳어졌다. 좀 지나 선생님께서는 생각 밖의 말씀을 하셨다.

가정생활이 어려운 것 같은데 내일부터 우리 집에서 밥 먹고 남은 식비는 집에 보내오.

 

나는 머리가 뗑 해났다. 그리고 바로 도리머리를 저었다.

선생님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곤난을 극복하고 견지하겠습니다.

 

눈물에 젖은 나의 얼굴을 보시면서 계속 말씀하셨다.

 

이번 학기 중간부터 나이 많은 학생들은 10일간 집에 가서 가정 일을 도와주오. 갈 때 나한테 알리지 말고 반장한테만 알리면 되오. 내가 반장한테 말할게.

 

선생님께서 농촌사정을 잘 아시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때 마을에서는 모내기와 벼 가을에 정량제를 시행했다. 즉 노력당 임무와 시일을 정하고 그 시일 내에 끝내지 못하면 벌금 도 안긴다. 도와 줄 손이 없는 아내는 모내기철에 새벽에 일터로 나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일하는 아내를 도우라니 얼마나 좋았던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가을도움을 끝내고 학급으로 돌아오니 또 반가운 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 선생님께서는 한 여학생을 시켜 못들은 각 과목의 강의를 내 필기장에 써 넣도록 하셨다.

 

4년간 선생님의 관심과 동창들의 도움으로 무난히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 후 나는 두 번 선생님 댁을 방문했다. 1988년 10월에 성직속단위에서 받은 모범일군 표창장을 들고 갔다. 진 붉은 표창장을 보신 선생님의 얼굴엔 반가운 웃음이 떠올랐다.

 

영철이, 참 대단하오.

 

선생님께서는 나의 손을 잡고 흔들면서 축하해 주셨다. 그때 가슴이 얼마나 뿌듯하던지.

 

1990년 8월에 2차 방문을 했다. 무더위로 선생님께서는 런닝 차림으로 날 맞아주셨다.

 

날씨가 너무 더우니 영철이도 런닝 차림을 하게. 구들에 올라가지 말고 있는 대로 주방에서 상 놓고 먹기오.

 

밥상은 주방바닥에 차려젔다. 나는 들고 간 술병과 안주를 꺼내 밥상에 차려놓았다.

 

53도 술, 참 귀한 술이구만.

 

그날 저녁에 무더위 속에서 낮은 쪽걸상에 쪼그리고 앉아 그 독한 술 한 병 굽을 냈다.

 

그 이듬해에 선생님께서는 답사방문으로 할빈으로 오셨다.

 

그때도 무더운 여름이라 우리 집에서 또 런닝 차림으로 53도 술을 밤늦게까지 마시면서 이야기 주머니를 풀었다.

 

술 3잔을 마신 선생님께서는 불쑥 물으셨다.

 

영철이, 인생 맛이 무슨 맛인지 아오?

 

예?! 무슨 맛입니까?

 

나의 물음에 선생님께서는 술잔을 들고 대답하셨다.

 

“인생 맛이 바로 이 술 맛이야.” 라고 대답하시면서 또 한잔을 쭉 마셨다. 나도 뒤따라 통쾌하게 한잔을 굽 냈다.

 

우리는 인생 맛을 즐기면서 추억의 호수 속에서 밤늦게까지 헤엄쳤다.

 

그때의 만남이 마지막 상봉일줄 누가 알았으랴?

아~ 가슴이 미어진다.

 

선생님께서 세상을 뜨셨다는 비보에 억장이 무너졌다.

그날 저녁에 나는 선생님께 53도 술 한 잔 부어드렸다.

난 3잔을 마신 후 나직이 기원했다.

 

김해룡 선생님 하늘나라에서 사모님과 함께 편히 쉬십시오.

김해룡 선생님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최영철

 

2020년 4월 22일

한국 부천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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