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7월, 제1차 국공합작의 파열과 더불어 3년간 기세 드높게 진행되던 중국대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중국혁명의 생사존망의 긴요한 시 각에 중국공산당은 시국의 변화에 따라 중국 혁명의 중심을 “적들의 역량이 박약한 농촌에로 옮기고 혁명세력을 확충하며; 토지혁명을 실시하고 무장투쟁과 근거지 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노농무장할거’의 국면을 형성하며 나중에 중심도시와 전국 혁명의 승리를 쟁취할 데 관한 방침”을 제정하였다.
이 방침의 지도하에 1930년9월, 중공만주특위에서는 무장투쟁근거지를 개척하고 쏘베트정권을 건립하기 위하여 28세의 중공당원 지희겸과 장산 해, 최영갑 세 사람을 밀산에 파견하였다. 그때 지희겸의 부친 지장회가 밀 산 당벽진의 거주민이였으므로 지희겸은 아버지 신변에 와서 농사짓는다는 명의하에 녕안에서 당벽진으로 건너와 당 조직 창립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당벽진은 인구유동이 빈번하고 번화한 상업가를 가진 중-러 민간 무역 통상구로서 조선족 거주호수도 90여 가구나 되였다. 지희겸의 부친 지장회는 조선초기 항일독립운동단체 ---연변의군부의 창립자중의 한사람 이였다. 20년대초 연변지구에서의 조선 무장독립운동이 좌절당한후 그는 벙어리로 가장하고 당벽진에 와 은신하고 있었다. 지희겸은 당백진에 온후 아버지를 도와 밭일을 하는 한편 비밀리에 군중 속에 심입하여 쏘련 사회주의제도와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중앙쏘베트정권 그리고 중국 로농홍군을 선전하였다. 이는 군중들의 각오를 계발하고 사업을 전개하는데 유리하였으며 따라서 신속히 사업 국면을 열어 놓을 수 있게 되였다. 선후하여 황계흥, 김산해, 권상우, 한희, 최영준, 채기봉, 등 조선족 진보청년들이 당 조직에 가입하였다.
1930년10월 말, 중공북만특위에서는 박광서를 특파원으로 밀산에 파견하 여 제1기 밀산현위를 세우고 지희겸을 현위 서기로, 장산해, 김산해, 황계 흥, 채기봉, 최영준, 한희를 현위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중공밀산현위가 설립된 후 지희겸은 적극적으로 선전활동을 전개하여 전현 인민들에게 다함께 일떠나 군벌을 타도하고 토호열신을 뒤엎고 쏘베트 정권을 세울 것을 호소하였으며 나아가서 밀산 추수폭동계획을 제정하였다.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당벽진, 오도강, 이도강, 일촬모, 룡왕묘 등 다섯 곳에 당 지부를 세웠으며 지희겸이 당벽진 당지부서기를 겸임하였다. 이와 동시 에 현위에서는 행동위원회를 내오고 무장 폭동을 준비하였다. 지희겸이 행동위원회 주임을 맡게 되였다. 현위에서는 12월11일, 광주폭동 2주년 기념일을 계기로 세 개 분대로 나뉘어 이도강, 오도강, 룡왕묘에서 밀산 폭동을 일으키고 밀산 보안단의 무장을 해제하기로 결정하였다.
폭동전, 행동위원회는 농민협회 밀산현지회, 반제국주의동맹 밀산현지부, 밀산현쏘베트준비위원회의 명의로 “밀산 추수폭동 강령”을 반포하고 “중국 쏘베트정부 10대강령”, “쏘베트중앙 림시정부를 옹호하자.”, “곡창을 열어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자.”, “량초를 분담하고 차량을 징수하는데 반항하자”, “군벌 혼전을 반대하자.” 등 10여 가지의 선전 삐라를 찍어서 내붙였다.
12월20일, 김산해가 맨 처음으로 분대를 거느리고 룡왕묘의 박춘길의 집에서 폭동을 일으켜 룡왕묘보안단의 무장을 해제해버렸다. 그러나 군중 기초가 박약했고 적아역량의 차이가 현저했으며 일부 물질준비가 충분하지 못했고 조직이 엄밀하지 못한 등 원인으로 룡왕묘폭동은 예상했던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다. 게다가 밀산 행동위원회의 폭동계획이 일찍 폭로되였기에 최종적으로 밀산폭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2월21일, 밀산현 공안국국장 김운산은 지희겸, 김산해, 최영준, 강시우 등에 대한 긴급지명 수배령을 내렸다. 전현 각 공안 분국과 밀산 보안단에서는 긴급 출동하여 각 교통요도와 조선족마을을 세밀히 수색하면서 추수폭동에 참가했던 혐의가 있는 자들을 체포하였다.
당벽진에서 기타 분대와 회합하려던 북만특위순시원 박광서, 행동위원회 주임 지희겸과 기타 행동위원회 위원들은 밀산공안군경과 보안퇀의 돌연적인 습격을 받았다. 긴급한 관두에 박광서, 지희겸, 지우근, 황계흥 등은 당벽진을 떠나 쏘련경내로 전이했다. 하지만 미처 전이하지 못했던 20여명 의 기타 참가자들은 밀산 공안군경과 보안단에 체포되였다.
밀산행동위원회가 조직 발동한 이번 폭동은 비록 성공하지 는 못하였지만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서 반동군벌의 통치를 뒤엎고 인민민주정권-쏘베트정권을 건립하려고 시도한 한차례의 시험인만큼 민중들 속에서 커다란 정치영향을 일으켰다. 사건 발생 후 길림성정부에서는 즉시 전부의 폭동관 련인원을 체포할데 대한 긴급명령을 내렸으며 동시에 밀산조선인학교를 페지해버렸다. 밀산현 정부에서도 계엄령을 내리고 일체 야간 오락활동을 금지시켰으며 현성 출입 시 증건검사를 진행하고 특히 조선족에 대해 엄격 히 조사하고 감시하였다.
지희겸, 황계흥 등은 폭동 두주일후 쏘련으로부터 비밀리에 당벽진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 시기의 밀산 당 조직은 이미 엄중한 파괴를 당하였는바 많은 당원들이 연계를 잃어버렸다. 특히 밀산보안단과 군경들은 경비가 삼엄했고 성안의 조선인에 대해 매일 수사를 진행했다. 백색공포로 뒤덮인 밀산현성에서 지희겸의 활동은 전례 없던 곤난과 위험에 부딪쳤다. 지희 겸과 황계흥 등은 심시숙고를 거친 후 부득불 밀산을 떠나 보청, 호림, 요하 등지에 가서 혁명공작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점점의 불꽃도 료원의 불길로 타오를 수 있다. 비록 지희겸이 조직한 밀산 농민추수폭동이 모험과 준비부족으로 좌절을 당하여 료원의 기세로 타오르지는 못하였지만 밀산의 흑토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혁명의 불씨를 뿌려놓았다.
지희겸은 1903년 11월1일,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 주남 서부평동에서 출생 하였다. 1910년 가을, 여덟 살 먹던 해에 그는 조선 국내 의병운동에 참가 하였던 아버지 지장회가 일제의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 오게 되자 아버지를 따라 연길 하남 하관툰으로 왔다. 그곳에서 지희겸은 아버지가 교편을 잡고 있는 한문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915년 봄, 가정경제난으로 그는 부득불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1924년 3월, 녕안현에 와서 길림성 성립 제4 중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다.
학교에서 그는 처음으로 맑스주의와 손중산의 삼민주의를 접촉하게 되였고 특히 과외 시간을 이용하여 대량의 진보적 서적과 간행물들을 열독함으로써 시야를 넓히고 사상을 전변시켰으며 많은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일년 후 강동주의 소개로 만주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하였으며 평범한 중학생으로부터 점차 나라와 백성을 관심하는 애국사상을 가진 열혈청년으로 자라나게 되였다. 1926년 11월, 중학교를 졸업할 때 지희겸은 일본 도쿄에 유학가서 사회학을 배워 맑스주의 이론가로 될 생각을 가지였다. 일본에 유학가기 위하여 지희겸은 먼저 가족들을 설복 하여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에 가서 일어를 배웠다. 그러나 반년 후, 일본 출국유학의 사증이 비준되지 않아 연길로 되돌아 오고 말았다.
연길로 돌아온 지희겸은 북벌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상상 커다란 전변을 가져오게 되였다. 그는 광동혁명제일선에 참가하여 민족독립을 실천하고 민족 해방의 숭고한 이상을 실현하려고 결심했다. 지희겸이 한창 광동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광동혁명 형세는 돌변을 가져왔다. 장개석이 "4.12"반혁명 정변을 발동하여 공산당을 대거 숙청하였기에 혁명은 저조기에 처하게 되였으며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던 많은 열혈청년들이 분분히 연변으로 되돌아 왔다. 급격히 변하는 혁명형세에 직면하여 지희겸은 또 한번 진퇴양난의 궁지에 빠지게 되였다. 고통스러운 사색을 거쳐 지희겸은 광동에 가서 국민혁명군에 참가하려던 생각을 포기하였다.
1927년7월, 지희겸은 한차례의 집회에서 조선공산당인 리창희를 알게 되였고 리창희의 소개로 만주공산주의 청년회원 으로부터 조선공산당 (ML 파)에 가입하게 되였다. 1928년3월, 연변조선공산당(ML파)이 소집한 연변 각지 청년 대표대회에서 지희겸은 동만청년총동맹 위원, 연길현 연맹위원장으로 당선되였다. 1928년9월, 연변조선공산당(ML파)내부가 분열되였다. 반역자의 밀고로 조직이 파괴되였고 많은 조선공산당원들이 체포되였다. 일본군경들이 연변공산당 당부를 수사할 때 지희겸은 사전에 정보를 얻어 피신했으므로 일본군경의 수사에 걸려들지 않았다.
사건발생 후 얼마 되지 않아 지희겸은 조직의 파견을 받고 녕안으로 가서 혁명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중국한인청년동맹 제8구책임자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북만 제2도 책임자로 당선되였다. 1930년9월 녕안에서 국제공산당의 “한나하 한개당”의 요구에 따라 조선공산당을 개조할 때 지희겸은 중공만주성위 순시원 려문빈과 황기범의 소개로 조선 공산당원으로부터 중국공산당원으로 신분을 고쳤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밀산에 파견되여 사업하게 되였다.
1931년3월, 지희겸은 사업의 수요로 할빈에 있는 북만특위에 사업회보를 가게 되였다. 도중에 밀산 소목릉하 부근을 지날 때 반역자 김형근의 밀고로 불행히 밀산보안단에 체포되였다. 지희겸은 감옥에서 군경과 보안단의 혹독한 형벌을 받아 온몸이 성한 곳 없었으며 갖은 고생을 다했다. 8월, 지희겸은 할빈에 압송되여 호로군사령부 회신처에 감금되였다.
1931년 "9.18"사변 발생 후, 그는 함께 갇혀 있다가 먼저 석방되어 나온 한 풍신 등의 담보로 감옥에서 풀려나오게 되였다.
출옥 후 지희겸은 할빈 총 공회의 당단서기직무를 맡았다. 1931년 12월, 주하현 특위서기로 담임되였고 1932년 여름에 중공 만주성위에서 주하 현에 대표를 파견하여 주하현위를 설립할 때 현위서기로 임명되였다. 1933년4월, 주하현공청현위 조직부장 백성기의 변절로 지희겸은 우지미의 김석휘 집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였다. 처음엔 할빈에 압송되였다가 그해 8월에 조선 신의주형무소에 전이되어 3년 도형을 언도받았다. 복형중 일본천황이 아들을 낳아 형기 9개월 감형 특사를 받았고 1936년1월, 복형 만기로 석방되여 연길로 돌아갔다. 1944년10월, 지희겸은 종교파벌 분쟁으로 인기된 "청림고"사건의 혐의로 부친 지장회와 함께 일본헌병에 체포 되여 일본인이 조직한 "봉사대"에서 강제노역을 하게 되였다. "봉사대"에서 노역에 시달리다가 1945년4월 연변해방 임박에야 무죄 석방되었다.
1945년8월18일, 쏘련홍군이 연변에 진주하였다. 해방된 연변지구는 만신창이 되여 복구를 기다렸고 정치형세는 특히 혼란하였다. 많은 지주, 토호열신, 한간, 관료매판 등 일제잔여세력들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무정부상태의 기회를 타서 형형색색의 반동조직과 반동무장을 세웠다. 당시 연길시에서는 학만정을 위수로 하는 한 무리의 반동정객들이 “중국 국민당 연길시 당부”를 세우고 집권당으로 자처하며 민족모순을 조작하고 혁명질서를 파괴하고 있었다.
엄중한 정치형세하에서 지희겸은 기치 명확히 미래를 구상하였으며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는 최문호 등과 함께 연변 노농청총동맹을 조직하였다. 그들의 주요목적은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서 하루 일찍 일제잔여세력을 제거하고 각종 반동세력의 음모, 전복활동을 방지하며 효과적으로 혁명질서를 유지하려는데 있었다. 그해 9월19일, 연길에서 연변노농총동맹 대표 대회를 소집하였다. 노농총동맹 회원 수는 3만여 명으로 연길, 화룡 두개 현의 대표만 하여도 600여명 되였다.
연변노농총동맹 대표대회에서는 아래와 같은 행동강령을 채택하였다.
(1) 국공합작을 옹호한다. (2) 일본제국주의 잔여를 제거하며 반동세력을 타도한다. (3) 인민을 주체로 하는 정권을 수립한다. (4) 전 세계 무산계급과 피압박 민족의 구성(救星)-홍군을 옹호한다. (5) 노동자, 농민의 조국-쏘베트 공화국을 보위한다. (6) 중조 두 나라 인민의 단결과 우의를 도모한다. (7) 노농운동의 선봉으로 된다. (8) 조혼을 반대한다. (9)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쟁취한다. (10) 미신과 노예화교육의 잔존의식을 반대하고 민중의 혁명의지를 불러일으킨다. 회의에서 지희겸은 집행위원회 조직위원으로 당선되였다. 9월23일, 지희겸은 홍군노간부 강신태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재가입하였다.
9월25일, 중공 연변위원회가 성립되였다. 위원회의 서기는 동북항일련군에서 파견한 홍군노간부 강신태가 담임하고 지희겸이 중공 연변위원회 선전위원직을 담임하였다. 9월말, 중공연변위원회의 위탁을 받고 연변노농청총동맹 집행위원회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확대회의에서 지희겸은 연변민주 대 동맹을 설립할 데 대해 진술하고 그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금후 우리는 친일잔여분자들을 철저히 숙청하고 대다수 사람들을 기반으로 하는 통일전선의 민주연맹 국가를 건립하여야 한다. 이 국가의 성질은 신민주주의여야 한다. 오직 신민주주의 국가제도만이 오늘 중국의 실제에 부합되는 것이며 오직 이 제도를 실시해야만 외국 침략자를 몰아내고 봉건 파쑈의 압박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연변노농청 총동맹집행 위원회확대회의에 출석한 전체 대표들은 토론을 거쳐 연변노농청총동맹을 해산하고 연변인민민주 대 동맹을 설립할 데 대한 결의안에 일치하게 동의하였으며 14가지 개조강령을 반포하였다. 회의에서는 지희겸을 연변인민민주 대 동맹 위원장으로 선거하였다.
연변민주대동맹이 성립된 후, 지희겸은 만강의 열정과 헌신적인 혁명정신으로 사업에 뛰여들었다. 그는 민주대동맹의 기타 위원들을 인솔하여 지방 무장을 조직하고 인민정권을 건립하며 토비무장을 숙청하고 일제 잔여세력을 제거하며 전선을 지원하는 등 사업을 효과적이고도 힘 있게 밀고나갔다.
그 시기에 한 사업을 보면 아래와 같이 종합할 수 있다.
(1) 연길, 화룡, 왕청, 훈춘, 안도, 등 다섯 개 현을 중심으로 민맹조직을 발전시켰는데 짧디짧은 기간 내에 회원은14만 명으로 확대되였다. 연변 각지에 조직된 민주 대 동맹은 명실상부한 광대한 민중의 이익을 대표하는 군중 조직으로 되였다.
(2) 민맹회원과 인민대중을 광범히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연변경비대에 참군하게 하였는데 9월말에 연변경비대는 6개 퇀의 병력으로 확충되였다.
(3) 11월 중순에 이르러 민주선거의 방식으로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네 개 현에 초보적으로 현, 구, 촌 3급 정권을 세웠다.
(4) 농민을 발동하여 소작료 통일표준을 내왔다.
(5) 철도운수를 회복하고 철도관리를 강화하였다. 지희겸의 뛰여 난 사업실적에 비추어 민맹에서는 12월에 그를 연변 철도관리국 국장으로 임명하였다.
(6) 민맹기관지인 “연변민보” (연변일보 전신)를 출간하였다. 1945년 광복후, 연변에서는 주요하게 "광복보"와 "한민일보" 를 출판했었는데 이 두 신문의 종지는 이미 시대발전의 조류에 부합되지 않았다. 민맹의 지시에 따라 지희겸은 이 두 신문을 정간하고 강동주, 류걸민을 주필로 하는 연변민주대동맹의 기관지 "연변민보"를 꾸렸다.
(7) 연변자치군과 배합하여 토비숙청을 진행하였다. 연변은 산림과 광산이 많은 곳이다. 광복 후 많은 림업구와 광산구역엔 아직 민주정권이 건립되지 못하였고 실업현상이 보편적으로 존재했으며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하였다. 각종 정치세력의 병존, 혼잡한 사회질서, 게다가 일제와 국민당 잔여세력의 민족모순 도발과 신생의 민주정권에 대 한 파괴, 토비들의 창궐한 활동 등은 사회의 일대 우환거리로 되고 있었다.
1945년 겨울, 화룡탄광의 300여명 광산노동자들이 국민당 잔여세력의 교사하에 무장토비로 되였다. 그들은 남평에 가서 많은 민맹 간부와 회원 들을 살해하였다. 지희겸은 적들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안고 토비숙청에 나섰다. 그는 룡정현 경비대와 화룡현 자위대를 조직하여 성공적으로 광산 토비를 진압하고 무장해제를 하였다. 1945년10월, 비적두목 마희산이 왕청현 묘령세멘트공장의 400여명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무장 토비부대를 무었다. 극악 무도한 토비들은 삼도만,대흥구,천교령,십리평 등 일대에서 살인 방화, 재물약탈, 민맹조직 해산 등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을 저질렀다. 민맹 각 조직에선 연변자치군과 배합하여 삼도만, 대흥구, 천교령 등 일대에서 토비숙청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300여명의 토비무장을 해제해 버렸다. 이때로부터 연변지구의 토비소란은 평정되였다. 토비숙청 중 13명 의 민맹전사들이 희생되였다.
1946년6월, 연변지구의 토비숙청 투쟁은 기본상 결속되였다. 지희겸은 연길현 춘흥구의 토개공작대에 파견되여 공작대 대장을 맡게 되였다. 그는 공작대원들을 거느리고 각 마을과 농호에 심입하여 선전공작을 전개하였으며 군중을 발동하여 식량을 꾸고 곡물수량을 조사하는 운동을 벌렸다. 특히 토지면적을 다시 측량한 후 지주의 여유 곡식밭을 빈고농들에게 나누 어 주었기에 60%의 농민들이 토지, 성축, 식량 등을 분여 받게 되였다. 이는 농민들로 하여금 무사히 보리 고개를 넘기게 하였고 투쟁 중에서 각성하게 하였으며 나아가서 지주들과의 투쟁을 전개하는데 기초를 닦아 놓았다.
1946년11월, 길림성위 제2차 군중사업회의 후 각지에서는 보편적으로 빈고농단을 세웠으며 지주를 투쟁하고 밭을 나누는 토지개혁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였다. 절대 다수의 가난한 농민들이 토지, 식량과 재산을 분여 받게 되였으며 농민들의 생산적극성도 대대적으로 제고되였다. 이는 연변지구의 농업생산 발전과 재정경제 상황의 근본적인 호전에 튼튼한 조건을 창조하였다.
1947년5월, 길림성위에서는 지희겸을 군정대학 길림분교 고급간부 반에 보내 학습하게 하였다. 학습반에서 그는 역사적문제로 당적취소 처분을 받게 되였다. 그 시기의 지희겸은 44세의 나이로 금방 인생의 장년기에 들어섰을 때였다. 한마음 뜨거운 열정으로 끓어 넘치던 지희겸에겐 커다란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사업상의 좌절과 운명의 타격 앞에서 그는 소침해 하지 않았다. 그는 잔혹한 운명의 도전에 적극 맛서는 한편 용감히 조직의 고험을 받아들였다.
1948년2월, 조직의 배치로 연변일보사에 파견되여 번역 사업을 맡게 되였고 10월 연변의학전문학교 교무주임을 담임하였다. 1949년 4월부터 선후하여 연변대학의학부 교무과장, 사범학원 역사 교연실 강사, 부교수로 사업하였다. 1959년부터 연속 정협 연변조선족자치주 2, 3, 4, 5기 위원회부주석, 길림성 정협 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지희겸은 1983년 6월 30일, 80세를 일기로 연길병원에서 별세할 때까지 23년 동안 연변조선족자치주 정협 위원회 부주석직무를 담임했다. 그는 정협 사업을 열애했으며 모든 정력을 정협사업에 몰두했다. 비록 연령은 많았지만 적극적으로 정협 활동에 참가하여 수많은 조사보고를 친히 집필하였으며 사업발전에 건의와 대책을 올려 작용을 충분히 발휘 하였다.
지희겸의 일생은 정치가, 교육가, 사회활동가로서의 분투의 일생이였다. 정치가로서 그는 비록 당적을 취소당한적도 있었으나 견정불이하게 자기의 이상과 신념을 지켜 나갔으며 공산당을 옹호하고 자기의 운명과 나라의 운명을 긴밀히 연계시켰다. 그 어떤 곤난앞에서도 추호의 동요가 없었으며 철석같은 마음 굽힌 적 없었다. 교육가로서 그는 정규적인 대학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고심한 노력과 참다운 연구로 연박한 지식을 소유한 학자로 되였고 조선고대사 연구에 조예가 깊었으며 한패의 우수한 인재들 을 많이 육성해냈다. 사회활동가로서 그는 역차의 정치운동 중 언제나 운동의 대상으로 간난신고를 치렀지만 드팀없는 신앙과 강의한 품격, 그리고 광명정대한 인격과 진리를 지키는 신념을 고수하였다.
1남 3녀의 아버지로서 그는 비록 자녀들에게 물질재부는 물려주지 못했지만 풍부한 정신재부를 남겨주었으며 네 자녀들로 하여금 사업과 생활 중에서 조직에 그 어떠한 요구도 제출하지 않게 하였고 역경 속에서도 떳떳이 자기의 힘으로 인생행로를 개척해 나가게 하였다.
/맹고군 (밀산시정부 부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