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손꼽아 기다리던 가을은 산과들을 요란하게 물들이며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누가 그랬던가 가을은 시의 계절이라고 그러기에 수많은 시인들이 가을을 칭송하는 랑만적인 시구를 남겨 후세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지 않은가.
가을은 또한 려행의 계절이기도하다. 단풍잎이 발갛게 물드는 가을이 다가오면 어디론가 막 떠나고 싶은 마음의 충동을 주체할수가 없다. 누구는 애인과 함께 단풍의 고향인 본계로 주말 려행을 떠나 갔고 누구는 사막의 독특한 5각단풍에 매료되여 내몽골 우단타라로 바람처럼 홀연 떠나가고 홀랑 나 혼자만 남았다.
매년 수확의 계절 랑만의 계절이 찾아오면 나의 발길은 어김없이 고향으로 향했다. 그곳에 소중한 인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때문이다. 고향은 동년의 아름다운 추억이 가득한 곳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아련한 아픔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고향의 하늘은 구름 한점없이 맑고 푸르다. 고저넉한 시골은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웠고 고향집으로 통하는 오솔길에는 일년의 수확을 한껏 실은 소수레가 삐걱이고 있었다.
동내의 터줏대감인 당산나무 앞에 다소곳이 두손모아 인사를 올리고는 아기자기 돌담길을 따라 한가로이 걸었다. 어릴 때 매일 뛰여다니며 놀던 골목길이다. 나는 정겨운 고향집 앞에서 서성이다가 소꿉친구 청아의 집을 지나서 동산으로 길게 드리운 오솔길을 따라 올라갔다.
고향의 오솔길은 언제 봐도 다정다감하다. 혼자서 조용히 걷다보면 지나간 이야기들이 가을 숲속의 메뚜기처럼 불쑥불쑥 뛰쳐 나오곤한다.
졸― 졸 ―
앞으로 더 가야 개울인데 돌을 박차고 흘러가는 물소리가 귀맛좋게 들려왔다.
“오빠 반두를 잘 잡고 있어!”
신이난 청아가 바지가랭이를 허벅지까지 한껏 걷어올리고는 물속에서 이리첨벙 저리첨벙거리며 물고기를 후치고 있었다. 아래쪽에서 나는 반두를 강바닥에 딱 붙이고 물고기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오빠, 빨리 반두를 뜨라니깐! “
꿈뜨기로 소문이 난 내가 반두 뜨기가 늦어지자 성질이 급한 청아가 달려들어 반두를 빼앗아 한껏 들어 올린다. 높이 치켜든 반두에는 물고기는 커녕 새우 한마리도 잡히질 않았다.
성이 단단히 난 청아는 텅빈 반두를 내 코앞으로 들이 밀면서 야단을 쳐댄다. 자기가 물고기를 열심히 몰아 넣었는데 내가 반두 뜨기가 늦어져 물고기가 다 도망을 갔다는것이였다.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멍하니 서있는 나를 보고 있던 청아가 갑자기 배를 끌어안고 웃어 댔다.
“이 가시나야, 누구한테 큰소리야, 그렇게 잘났으면 니 혼자 잡아 봐라! “
자존심이 상할데로 상한 나는 옷이 젖든말든 첨벙첨벙 개울을 건너 행하니 집으로 향했다.
올리막길을 한참이고 걸어 오르자 산길은 두갈래로 갈라진다. 저 갓길로 빠지는 길섶에는 하얀 갈꽃들이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 온 산을 헤집고 다니며 갈꽃을 꺾어 장난치던 코흘래기들의 함성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히 들려오는것만 같다.
갈숲의 평탄한 언저리에서 휠체어를 탄 녀인이 아름답게 단풍진 먼 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 왔군!
매번 단풍이 익는 계절에 올때마다 멀리서 휠체어녀인과 조우하였었다. 갈꽃속의 녀인은 그윽한 눈길로 다가설수없는 먼 산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단풍이 얼마나 좋았으면 성하지 않은 몸을 끌고 저렇게 경사가 심한 산비탈까지 올라 왔을까?!
까만 양복을 받쳐입은 녀인은 하얜 얼굴에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멀리에서 바라보아도 아름다운 녀인이였다. 웅장한 산앞에서 녀인은 한없이 작아보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잊은채 앉아있는 녀인은 어딘가 아픔이 느껴지고 슬퍼보였다.
멀리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녀인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다리에 덮은 담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가을은 남자들의 계절이라는데 녀자들도 가을을 타는가비...’
괜히 쳐다보아 불편하게 만든것에 미안함이 든 나는 급히 고개를 돌리고 가던길을 제촉하였다.
하여튼 가을타는 사람치고 사연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러기에 불구의 몸으로 혼자서 저렇게 힘든 곳까지 올라왔을게지!
산길은 더 가팔라지고 숨은 차고 다리도 후들두들 떨렸다. 그러나 더 올라가야만 했다. 그곳에 추억이 가득한 “ 행복나무 “ 가 있기때문이다.
‘이다음에 술을 적게 먹고 몸단련을 더 해야겠네‘
나는 혼자말로 중얼중얼거렸다.
산자락을 야금야금 파먹으며 올라간 다락밭이 끝나는 가장자리에 커다란 단풍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단풍잎들이 손벽을 치며 반겨준다.
‘잘 있었니? 행복나무야! ‘
한달음에 다가간 나는 “ 행복나무” 앞에서 한참이고 말없이 서있었다. 이윽코 사랑하는 사람을 끌어 안듯이 두팔을 벌려 “ 행복나무”를 꼭 끌어 안았다. 아니, 나의 몸과 마음이 “ 행복나무”의 품으로 파고든것이라고 말해야 더 정확할것이다.
“ 행복나무”는 말이없이 우두커니 내려다 보기만 한다. 올해도 혼자만 왔니 하고 나무라는것만 같았다.
“ 행복나무” 아래에 커다란 청석바위는 한낮의 햇볕에 따끈따끈하게 달구어있었다.
“ 오빠, 요것봐, 귀엽지... 요렇게 작은 나무에도 발갛게 단풍이 드네! “
산에서 요리조리 버섯을 찾아 다니던 청아가 애기단풍나무 한그루를 발견하였다.
“ 청아, 애기단풍나무를 우리가 놀던 청석바위 옆에다 옮겨 심을까? “
그렇게 발없는 애기단풍나무가 산꼭대기에서 산비탈까지 이사를 오게된것이였다.
청아는 애기단풍나무에 « 행복나무 » 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근심걱정없이 행복하게 자라나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었다.
« 행복나무 »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지금에 와서 돌이켜봐도 마음이 뭉클해진다. 청아는 참 똑똑한 가시나였지! 생각만해도 짠하고 눈물이 나려고 한다.
긴 겨울을 꿋꿋이 이겨 내고 봄이 오면 어김없이 파랗게 움이 돋아나고 손모양의 아기장한 잎을 활짝 피웠다.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오면 짝짝 손벽을 치면서 우리를 반기였다. 단풍이 드는 계절이 찾아오면 그 작은 잎들도 발갛게 물든다. 어떤 잎은 노랗게 변하다 나중에 발갛게 변한다. 어떤 잎들은 성질이 급한 청아를 닮았는지 어느새 빨갛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비바람에 꺾일가 노심초사하던 청아의 « 행복나무 » 는 긴 세월속에서 이제는 커다란 « 행복나무 » 로 자라나 있었다. 만약 청아가 보았으면 얼마나 행복하고 기뻐할까? 지금 그 어디에선가 « 행복나무 » 처럼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
후∼
청신한 공기를 한껏 들이 마시니 가슴이 확 트이고 시원하였다. 아름답게 단풍진 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울적한 기분도 싹 가셔지는것만 같았다. 저 산아래로 흙으로 지은 낡은 초가가 보인다. 태여나서 자란 정든 고향집은 이젠 남의 집이 된지도 오래다. 그 옆으로는 청아가 살던 집이 이웃해 있다.
지금은 누가 들어와서 사는지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 오르고 있다. 아마 점심을 하는 모양이겠지? 눈코뜰새없는 바쁜 계절이니 대충 음식을 덥혀먹고는 또 부랴부랴 밭으로 나갈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했다.
무지막지하게 더운 어느 여름날이였다.
잠자리채를 만들어 거기에 거미줄을 발라 놓으려고 우리집과 청아집 울안을 샅샅이 뒤지며 거미줄을 찾고 있었다.
“ 이놈의 계집애 어디라고 말 대꾸야! “
나는 얼떨결에 청아가 훗엄마한테 호되게 얻어맞는것을 보았다. 도끼눈을 부릅뜬 훗엄마가 빗자루를 거꾸로 쥐고 청아를 때리는것이였다. 얼마나 힘껏 내리쳤는지 단단한 자루가 다 터져버렸다. 청아의 코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훗엄마의 매는 그칠줄을 몰랐고 머리며 팔이며 마구 내리치는것이였다. 청아는 그렇게 맞으면서도 반항 한번 하지않고 맞기만 했다.
‘ 바보야, 빨리 도망을 가야지! ‘
빗자루에 얻어 맞는것이 얼마나 아픈지 안 맞아본 사람들은 모를것이다. 그때에야 나는 알았다. 빗자루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달려드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시름시름 않던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자 얼마 지나지않아 청아 아버지가 훗엄마를 새로 맞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청아한테 따스하게 대해주던 훗엄마가 청아 동생을 놓고부터 점차 변하기 시작하였다. 쩍하면 때리고 밥을 주지 않았고 어린 녀자아이에 걸맞지 않은 도가 넘은 일들을 시켰다.
일찍이 철이든 청아는 점점 말수가 적어졌고 나중에는 벙어리가 되다싶이 입을 꼭 다물었다. 혹시 자기의 말실수가 안그래도 위태위태한 집안에 불란을 일어킬가봐였다.
“ 얘야, 울지 말고 우리집에 오느라! “
매번 청아가 집뒤 모퉁이에 쪼쿠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엄마가 우리집으로 데려와서 밥을 먹이고 몸에 난 상처에 약을 발라주군 했었다.
따끈한 국밥을 앞에 놓고 그 작은 어깨를 덜먹이며 슬피우는 청아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런 벙어리 청아는 점차 나와 친한 사이가 되였으며 « 오빠,오빠 » 하며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갑자기 콧등이 찡해온다.
멀리 논밭에서는 벼가을이 한창이다. 몇몇 조무래기들이 패트병 하나씩 들고서 메뚜기 잡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나의 시선은 끌리듯 다시금 갈숲으로 향했다. 휠체어녀인은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녀인은 먼 산을 보는듯 « 행복나무 » 가 있는 이쪽으로 보는듯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먼 시선이 마주치자 녀인은 급히 고개를 돌려버린다.
나는 피씩 웃었다.
아무리 산이 좋다고 한들 홀로 단풍구경을 다니는게 다른 사람 눈에는 좀 이상하게 여겨질수도 있는 일이였을것이다. 그러기에 저렇게 유심히 바라 봤겠지
가만 있자...누구지?
이렇게 외딴 곳에 아름다운 단풍이 있다는것을 어떻게 알고 왔을까? 아마 동내 누구집의 친척이겠지
한번은 청아와 함께 산으로 들어가 잣을 땄던 일이 있었다.
하늘 높이 자란 잣나무에서 잣을 딴다는것은 어른 한테도 벅차고 위험한 일이다. 청아가 잣을 좋아 한다는것을 익히 알고있는 나는 잣을 따준다며 청아를 이끌고 산으로 향했다.
“ 청아, 오늘 잣따러 가는것을 누구한테도 알려주면 안돼! 안그러면 큰일나...우리엄마한테 호되게 얻어맞을거야. “
나는 잣따는 긴 참대막대기를 질질 끌고 앞장섰고 청아는 어울리지않게 큰 광주리를 옆구리에 떡하니 끼고 따라나섰다. 신이 났는지 청아는 우리엄마한테서 배운 노래를 부르며 졸졸 따라왔다.
“오빠, 저기 저기, 빨리와!“
산속에서 잣나무 찾으며 여기저기 기웃하던 그때였다. 먼저 잣나무를 발견한 청아가 자랑하듯 큰소리를 쳐가며 나를 급히 불러댔다. 잣나무가 맞았다. 가파른 산비탈에 하늘을 찌를듯이 높이 솟은 잣나무의 가지들에 잣이 탐스럽게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 오빠, 잣들도 누가 딸가봐 저렇게 높고 가지끝에서만 달려있지? “
“ 아∼ 너무나 높은데...”
한걸음에 달려간 나는 입을 쩍 벌리고 그저라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잣이 너무나 높은데에 달려 있어서였다.
방금까지도 잣나무를 발견하고 들떠있던 청아는 근심 어린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렇게 높은데 달려있는 잣을 따올수나 있을까하는 의심의 눈초리가 력력하였다.
“ 걱정마, 아무리 높아도 따올거야! “
나는 신발끈을 단단히 매고 잣나무에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잣나무는 미끄러웠다. 잣나무에 착 달라붙어 기여오르던 나는 결국 미끄러져 벌러덩 땅바닥으로 나뒹굴어 떨어지고 말았다.
이런 몰골을 청아한테 보이다니 약이 오른 나는 두손에 침을 탁탁 뱉고는 다시 잣나무에 벌벌 기여올라갔다. 힘을 보탠다며 청아도 작은 두손으로 나의 궁둥이를 받치며 힘껏 밀어주었다.
뿡∼
너무나도 기를 쓴 탓이였을까? 안깐힘을 쓰던 나는 저도 모르게 방귀를 뀌고 말았다. 그것도 청아의 코앞에서 말이다.
“ 에잇! 더럽게 방귀를 뀌어...”
궁둥이를 받치고 있던 청아가 손을 놓자 나는 다시금 홀라당 나무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깔 깔!
나는 얼굴이 발게서 멋적게 서있는데 청아는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지 배를 끌어안고 웃어댔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그날은 사내의 자존심이 구길대로 구겨진 날이였다. 우리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 나무에 달린 잣만 구경하다가 집으로 돌아 왔다. 그럴만도 했다. 어른들도 따기 힘들다는 잣을 달랑 두 어린애가 해낼수있는 일이 아니였으니 말이다.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온몸이 상괘하다.
“ 행복나무” 에서 단풍잎이 하늘하늘 춤을 추며 머리우로 떨어진다. 빨간 단풍잎 하나를 주어서 하늘 높이 들어 보았다. 파란 하늘에 단풍잎은 눈물나게 빨갛고 아름다웠다.
청아집 아넉한 울안에서 누군가가 붉은 고추타래를 처마밑에 걸고 있었다. 울바자를 넘어 해바라기의 커다란 머리통이 우리집 울안으로 축 처져있었다.
허 허∼
그때를 생각하니 실없이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날도 청아집의 해바라기가 울바자를 타고 넘어왔다. 우리 집에도 흔한 해바라기는 안먹고 쥐새끼처럼 몰래 남의 해바라기를 홀라당 빼 먹었다가 청아한테 호되게 얻어맞아 코피가 터진적이 있었다.
“ 오빠, 며칠이 지나면 있지, 우리집 이사를 간데...멀리로 ”
울바자 너머에서 눈물이 글썽한 청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것만 같았다.
“ 어디로 간데? “
“ 나도 잘 몰라, 아버지 말로는 훗엄마가 살든 고향으로 간대서, 기차를 타고 10시간을 가야 한데, 나는 이사가기 싫은데... 이담, 오빠를 못보면 어쩌지?”
나는 이쪽에서 청아는 울바자 너머에서 서로 벙어리가 되였다.
“ 청아야! 빨리 들어와서 이사 준비를 해야지.”
“ 네, 가요! “
간다는 손짓만하고는 부리나케 집안으로 뛰여들어가는 청아를 보고 나는 오래도록 멍하니 서있었다.
바람에 떨어진 단풍잎들이 발밑을 빨갛게 물들인다. 담배 피울 생각이 굴뚝같아 한개비 꺼내들었다가 다시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동내 곳곳에 내걸은 « 산불 조심! » 이라는 문구가 생각나서였다.
후∼
가슴이 먹먹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청석바위에 벌렁 누워 하늘높이 날아가는 새떼들이 보이지않을때까지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았다.
“오빠! 여기서 뭐해? “
언제 왔는지 길게 드리운 머리카락으로 내 얼굴을 가렵히며 청아가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었다. 대꾸도 않고 다시 눈을 감고 돌아 누웠다. 뽀로통해진 청아는 풀잎으로 나의 귀를 살살 가렵혔다. 가려움을 더는 참지못하고 벌떡 일어나는 나를 보면서 깔깔 거리며 웃는다.
우리는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 오빠, 이사 간데는 오빠도 없고 친구도 없는데 어쩌지?”
“ 걱정마, 청아는 똑똑하고 귀여워서 금방 새 친구가 생길거야! “
“ 오빠, 우리 갈라지면 언제 또 만날수 있을까? 가까이로 이사를 가면 만날수 있을텐대...”
한참이고 단풍잎을 만지작거리던 청아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작은 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 오빠, 우리 있지, 이담 어른이 되거든 만나자, 그때면 돈도 벌잖아...그래, 내가19살때 만나자! 그땐 오빠는 20살이겠지? 지금처럼 산과들에 빨갛게 단풍이 들때 만나자, 음력9월1일 내 생일날에 이 « 행복나무 » 에서 만나자! 오빠, 우리 약속하는거야”
나는 청개구리의 퉁방울같은 눈으로 청아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나보다 어린 가시나가 이렇게 오기가 있는 말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무엇이 반짝이는 그 까만 눈동자에서 나는 청아의 진심을 읽을수가 있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청아는 큰소리 치며 나의 새끼손가락에 자기 새끼손가락을 걸어놓고 마구 흔들어가며서 손도장을 찍어댔다.
“ 그래, 약속한다. 너가19살이되는 가을에 이 « 행복나무 » 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 혹시 너가 오지 않더라도 나는 매년 이곳에서 너를 기다릴거야! “
약속을 해놓고 손도장까지 찍었으니 마음이 한결 후련해졌다. 나는 바지주머니에서 만지작거리던것을 꺼내서 청아 코앞으로 쑥 내밀었다.
“ 오빠, 뭐지?”
“ 선물이다. 널 주려고 먼길 걸어서 사온거다. “
“ 고마워! 이렇게 오빠 선물까지 다 받아보네. ”
청아는 나비모양의 머리핀을 요리조리 꽂아보면서 코앞까지 다가와서 예쁜냐고 물어본다.
“ 오빠, 내가 빨강색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지? “
“ 가시나야! 빨강색은 멀리서도 눈에 잘 보이잖아.”
“ 오빠, 다음 만날때 꼭 이 빨강나비핀을 머리에 꽂고 있을게, 그래야 오빠가 인차 알아보지!”
그렇게 갑작스레 청아와 헤어졌다.
세월은 류수라더니 어느듯 10년이 지나고 또 10년이 지났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세상은 변해도 너무나도 많이 변해 있었다.
청아는 19살인 그해 가을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 해에도...
그 다다음 해에도...
훗엄마밑에서 그렇게 고생만 하던 청아가 어른으로 장성하여 남들 못지않게 행복한 꽃길만을 걷기를 나는 바랐었다.
10살이였던 나도 이제는 어엿한 성년이 다 되였다. 지금 그 어디에서 살고있을 청아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렇게 총명하고 야무진 청아도 이제는 성인이 되여 좋은 남자를 만나서 아들딸들을 놓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겠지?
‘ 청아는 « 행복나무 » 를 깜빡 잊어 먹었을까? ‘
저 멀리 동내로 굽어오는 오솔길에는 사람하나 얼씬하지 않았다. 논밭에서 메뚜기 쫓아 뛰여다니는 아이들이 없었더라면 그 유명한 네덜란드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가을 풍경화로 착각을 했을것이다. 고향의 시골풍경은 언제봐도 이렇게 정답고 아름답다.
청아가 다녀왔다가 볼수있게 « 행복나무 »에 붙여 놓은 나의 전화번호 패쪽도 이제는 빛에 바래고 희미해졌다.
청아가 나와의 약속을 잊어 버리진 않았겠지?!
아니면...
서른이 다된 사람이 9살짜리 가시나의 약속을 철썩같이 믿어 매년 단풍이 드는 계절이면 제 정신이 아닌듯 여기로 달려 왔었다.
허 허∼
나는 튀통수를 긁적이며 멋적게 웃었다. « 행복나무 » 아래에서 서있자니 그것도 무엇해보였다. 앞으로 더는 여기로 오지 않기로 결심했다. 청아라는 가시나를 가슴속에서 영영 지우기로 마음 먹었다.
가을겆이가 끝나 텅빈 밭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던 한무리의 참새들이 손발 흔들어대는 허수아비에 놀라 우르러 어디론가 날아가버린다.
터벅터벅 산길을 걸어 내려오던 나는 갓길쪽으로 힐끔 쳐다보았다. 휠체어녀인은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갈꽃이 휘날리는 갈숲에서 휠체어녀인은 시골동내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앗!
고개를 돌려 발길을 재촉하려던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땅에 박힌 말뚝처럼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어렴풋속에 빨간 무엇이 나의 시선을 자극한 것이였다. 휠체어에 앉은 녀인의 머리에 빨간 나비모양의 머리핀이 꽂혀 있었던것이였다.
한순간 하늘이 빙 돌고 형언할수없는 그 무엇이 목구멍으로 울컥 치밀어올라 숨을 쉴수가 없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사지는 좀채로 말을 듣지 않았다. 주체할수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앞을 가리였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조용히 휠체어쪽으로 다가 갔다.
인기척 소리에도 녀인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먼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맞다!
휠체어에 앉아있는 녀인의 까만 생머리에 빨간 나비핀이 꽂혀 있었다.
“ 청아! “
청아를 몇발작 앞에 두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러 보았다. 석쉬고 흉한 괴성이 목구멍에서 아니 나의 뜨거운 가슴에서 터져나왔다.
오매에도 그립던 청아가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청아는 꿈쩍 않았다
드디어 휠체어가 천천히 돌아섰다. 하얜 청아의 얼굴은 이미 눈물 범벅이였다
“ 오빠! ...”
청아는 신음하듯 가볍게 한마디 내뱉고는 얼굴을 감싸고 어깨를 덜먹이며 서럽게 울었다.
청아다. 청이가 맞다!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우는 모습 어깨를 덜먹이며 슬피우는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하였다.
한걸음에 다가간 나는 청아를 와락 부둥켜 안았다. 떨리는 두손으로 청아의 얼굴을 받쳐들었다. 하얗고 말쑥한 얼굴에 항상 근심이 다분히 서려있는 까만 눈동자는 영낙없는 나의 청아였다. 청아는 빨간 입술을 파르르 떨며 내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 오빠,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 울지마. 이렇게라도 만나서니깐 됐어! “
“ 청아, 오빠가 매년마다 여기에서 널 애타게 기다렸는데! ”
어찌 오빠를 눈앞에 두고서 모른채를 하는지 어찌 사람이 이렇게 무정할수있지 라면서 청아의 어깨를 마구 흔들며 한탄을 했다.
늦어서라도 오빠를 볼수 있어서 너무나도 행복하다고 주체할수없이 흘르내리는 내 눈물을 닦아주면서 청아는 해맑게 웃어 보인다.
우리는 오래도록 말없이 서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 오빠, 있지... 나 저 « 행복나무 » 에 가보고 싶은데...이제는 혼자서 갈수가 없네! 예전같이 오빠가 업어다 줄래? “
나는 흐르는 눈물을 겨우 참으며 돌아서 등을 청아한테 맡기였다. 청아가 두팔을 뻗어 나의 목을 꼭 끌어안자 그의 몸이 가벼이 나의 등에 업히였다. 두 다리를 잃은 청아의 몸은 여위고도 가벼웠다.
청아를 업고 한발작두발작 « 행복나무 »가 있는 곳으로 걸어 올라갔다. 등에 업힌 청아는 아무말이 없었고 내가 어디로 도망을 가기라도 하듯이 두팔로 나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텅빈 청아의 바지자락이 힘없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청아는 20년만에 다시 « 행복나무 » 아래에 서있다. 청아는 « 행복나무 »를 보듬고 또 보듬었다. 인생은 무상하고 지난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였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나는 어쩔수가 없었다.
청아는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나는 산아래 청아가 살던 옛집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 옆으로 우리집이 다정하게 이웃하고 있었다.
나는 느낄수 있었다. 나의 등에서 청아의 몸이 사르르 떨고 있음을...
“ 오빠, 여기에 붙여놓은게 오빠 전화번호겠지?! “
나는 아무 말도없이 먼곳만 바라보았다.
“ 오빠 힘들지? 청석바위에 내려놓으면 돼, 오랜만에 나도 한번 앉아보고싶은데...옛날에 많이 앉았었는데”
발갛게 단풍잎이 덮힌 청석바위에 앉은 청아는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어 보인다.
“ 오빠, 이게 얼마 만이야 이 청석바위에 앉아 본지가?! 나 지금 꿈꾸고 있는 기분이야 ...너무나 행복하단 말이야 “
우리는 « 행복나무 » 아래에서 오래도록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릴적 함께 개울에서 반두로 물고기를 잡던 이야기, 산속에 버섯 따러 갔다가 길을 잃어 밤새 헤매다가 온 동내사람들이 나서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온 캐캐묵은 예기부터 이사간 후 청아가 지금까지 살아온 예기며 해가 뉴엿뉴엿 저무는것도 잊고 있었다.
“ 청아, 다리는...”
나는 어렵게 청아의 아픈 상처를 들추었다. 한참이고 잠자코 있던 청아가 아무렇지도 않은듯 남의 예기를 하듯이 아픈 사연을 말해주었다.
사실은 이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친구의 소개로 도시로 나가 돈을 벌기로 했다. 대학생이 되는것이 큰 꿈이였지만 가정 형편이 넉넉치 않다보니 동생밖에 모르는 훗엄마의 성화에 이길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청아는 도시로 나가 열심히 일하며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오래지 않아 오빠를 만날것을 상상하니 그 고된일도 항상 즐거웠다.
그런데 운명의 작간이라고할까 또 다른 불행이 청아에게 들이닥쳤다.
하루는 밤늦게 퇴근하고 기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를 당했다. 끔찍한 사고였다. 병원에서 사흘만에 겨우 깨여난 청아는 그렇게 두 다리를 잃었고 영영 걸을수 없게 되였다.
“ 청아, 많이 아팠겠다! “
잠자코 듣고만 있던 나는 이말 외에는 더 위로가 되고 더 따뜻한 말을 찾지 못하였다.
불행한 과거를 예기하던 청아는 고개 들어 한참이고 « 행복나무 »를 올려다 보았다.
“ 오빠, 날씨가 일찍이 추워와서인지 올해 단풍은 특히 붉고 아름답네! “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던 청아는 손가락으로 나의 코등을 긁고는 오빠가 이렇게 미남인줄 알았으면 벌써 한달음에 달려왔을것인데하고 능청스레 농담까지 걸어왔다.
“ 내가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줄 알면서도 사람이 어찌 그렇게 무정할수 있는지?! 손이라도 한번 흔들어 줬어도 내가 인차 너를 알아볼것인데 말이야! “
한참이고 울화를 참고있던 나는 목에 울대를 세워가며 청아를 무섭게 쏘아보면서 야단을 쳤다.
조용히 바라만 보던 청아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그릉하였다. 자책도 설움도 가득한 그 눈빛을 차마 볼 자신이 없었던 나는 벌러덩 청석바위에 누워서 하늘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을 하늘은 저렇게 푸르고 아름다운데 이 가슴은 이다지도 먹먹한지 하오의 눈부신 햇살에 눈시울이 시큰해 온다. 매번 단풍의 계절이 오면 먼발치에서 나를 바라만 보고 있을 청아의 그 마음 또한 얼마나 쓰리였을까?!
어디선가 풍겨오는 향긋한 과일향이 코를 찌른다. 날리는 긴 생머리 너머로 청아의 하얜 목선이 안겨와서 눈을 가렵힌다. 빨간 나비핀을 한 청아는 참말로 단아하고 아름다웠다.
한껏 물든 단풍잎들이 하늘거리며 얼굴로 몸으로 떨어진다. 지긋이 눈을 감고 물씬한 풀향을 한껏 들이 마셨다. 아마 지금 청아도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쿵쿵 튀여나올것만 같았다.
“ 오빠, 자? “
작은 풀잎으로 나의 귀를 간지럽히던 청아가 간지러워 귀를 파는 나를 내려다고며 해죽이 웃고 있었다.
“ 청아, 집으로 가자, 엄마가 너를 얼마나 보고싶어 했는데...아마, 청아를 보면 나보다 더 기뻐하실거야! ”
서쪽 하늘에 석양이 발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갈꽃 휘날리는 갈숲에서 한 사내아이가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잠자리를 잡고 있다. 그 뒤로 귀여운 여자아이가 재잘거리며 졸졸 따라 다닌다.
/리한택
http://www.hmzxinwen.com/news/28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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