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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6/11/06  전옥선
지금도 어설픈 우리의 계절

자정이 다가오는 이 시각, 우리 동네의 아담한 다방은 은은한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만큼 조용하다. 초저녁부터 친구들과 함께 식당과 노래방을 거친 후, 뿔뿔이 헤여졌지만 현화와 영근이는 기어코 다방에 들어가고 말았다.

 

오른쪽에 작은 방이 세개가 나란히 있고 왼쪽에 상 세개가 놓여져 있었다. 둘은 중간 통로를 지나 제일 안쪽 방에 들어가 식탁을 사이 두고 마주 앉았다. 얼굴이 불그스레해진 그들 앞에 어느새 마른 안주와 함께 맥주 여섯병이 올라왔다.

 

"이걸 다 마시자면 새벽까지 가야 할 터인데."

하고 현화가 근심스레 영근이를 건너다 보았다.

 

영근이는 조금은 취기가 올랐지만 말쑥한 얼굴이다. 서양식의 조각한 듯한 미남의 얼굴은 아니지만 잘 생겼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약간 우울해보이지만 가끔은 따듯한 미소를 지었는데 여느 녀자라도 끌려갈 것만 같다. 영근이가 쏘파에 기대앉아 긴 다리를 쭉 뻗치자 현화는 기린을 련상하면서 다시 영근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영근이 뒤에 추상화 한 폭이 걸려있다. 울퉁불퉁한 길, 춤을 추는 듯한 고층건물들, 휘여질 듯한 가로수, 짙고 어두운 색감으로 그린 추상화는 춤추는 도시인지 작가의 혼란스러운 마음인지 어쨌든 보는 이의 분석에 따라 그림의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10년 만에 만난 영근이를 따라 여기까지 온 자신이 가로수 중간에 서서 휘청거리고 있는 것 같아 현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어릴 때부터 작고 아담한 얼굴에 오관이 꽁꽁 박힌 예쁜 인형 같다는 말을 많이 들어온 현화이다. 똑똑하고 명랑하고 예쁘장한 현화이지만 마흔 살이 다 되도록 여태 시집을 가지 않았다. 현화는 호--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개를 들어 영근이를 바라보았다. 넘을 수 없는 강을 건너 너무 멀리 와버린 오늘, 우리 둘에게 무슨 할 말이 남아 있을가! 현화는 두 손으로 맥주컵을 감싸고 뱅뱅 돌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한마디 건넸다.

 

"밤도 깊었는데 어서 마시고 일어나야지!"

"그렇게 몰인정하게 나를 차버리더니 왜 여태 혼자 사는 거야?"

하고 영근이는 고개도 들지도 않고 맥주컵에 맥주를 붓는다.

 

"그걸 묻고 싶어 오늘 저녁 술자리에서부터 계속 내옆에서 맴돈 거니? 그리고 기어코 나를 여기 끌고 오고 말이야!"

현화는 짐짓 뾰로통해 하면서 작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영근이는 욱하고 감정이 치미는지

"난 지금도 모르겠다. 인차 결혼한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나를 싫다고 한 리유가 뭔지 말이야! "

 

하고 술잔을 들어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는다. 현화도 울컥해 나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어머니가 심장병으로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그때 연해도시에 간 아버지가 딴 녀자와 살림을 차리지 않고 엄마 곁으로 돌아 왔더라면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가? 하지만 현화는 시치미를 뚝 다고 맺고 끊듯이 말했다.

 

"다 지나간 일이다. 그때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어. 너는 꼭 공부하러 일본에 가야 하고 나는 꼭 엄마 곁에 있어야 하고 말이야!"

 

"그럼 그렇다고 해야지 분명 결혼한다고 했잖아!"

영근이는 짧은 머리를 잡아 뜯으며 성난 사자처럼 두 손으로 마구 이마를 문질러대다가 말을 이었다.

 

"일본에서 공부하랴 알바를 하랴 아주 힘들 때야. 나는 결혼할 거라는 너의 소식을 듣고 얼마나 절망했는지 몰라. 그런데 이번에 와보니 넌 여전히 혼자이고!"

 

"아니, 거짓말이 아니야! 엄마가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난 그 남자와 결혼했을 거야! 엄마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난 나의 결혼이 너무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것 같아서 몇 달 동안 두문불출을 했어. 그 남자는 나의 얼음장같이 랭정한 태도를 보고 그만 질려서 떠났을 뿐이야!"

 

"그럼 지금은 왜? 동창가운데 결혼하지 않은 건 너 뿐이잖아?"

"호호호, 리혼한 친구들도 여럿이야. 옆에 딸린 것 없는 싱글이 얼마나 좋은데!"

 

"결혼해도 후회하고 하지 않아도 후회하는 법이라 하지만 그래도 결혼을 하고 후회하는 게 보다 현명한 선택이지!"

"의학박사님이 어느 새 철학박사가 되였네!"

현화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내서 웃었다.

 

영근이는 현화에게 련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20대 청춘은 그들에게 얼마나 구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추억을 남겼던가!

영근이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여나 의학공부를 선택하기까지 고생을 하는 게 무섭지 않았다. 어떻게든 성공해서 집안에 영광을 드리겠다고 속다짐을 했다. 그런데 영근이는 동창들 가운데서 잘 생겼지만 매너가 별로 없는 남자였다. 그럼에도 현화처럼 활발하고 속이 깊은 녀자에게 반했기에 그의 20대는 외롭지는 않았다.

 

현화는 대학교 부근에 세집을 맡고 회사로 출근하였다. 그래서 영근이는 공부가 힘들고 알바로 뛸 때 현화한테 들려 지친 몸과 마음을 쉬여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맨발청춘”이라고 부르짖으며 자전거를 타고 두만강 하류에 있는 방천이라는 명소에도 가보고 도시락을 싸들고 장백산에 가기도 하였다. 천지물에 두 발을 잠그고 사랑을 맹세했던 그 시절, 영근이는 현화와 함께라면 하늘 끝에라도 갈 것 같은 기세였다. 현화도 영근이와 함께 한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였다. 어려서부터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하는 현화에게 자기 편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남자가 영근이다. 영근이는 현화를 희귀한 꽃처럼 다룬 착한 남자였다. 그런데 현화는 영근이가 일본에 간지 1년도 되기 전에 매몰차게 돌아서 버렸다. 앓는 엄마 때문이라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하면서 비운의 주인공이 된 현화!

 

지금 영근이는 다른 녀자의 남자이고 사업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거둔 성공한 남자이다. 현화는 슬그머니 자조적인 웃음을 짓다 말고 맥주컵을 들고 영근이에게 권하지도 않고 그대로 쭉 마셨다. 쓸데 없는 자존심 때문에, 바꿀 수 없는 운명 때문에 영근이의 곁에 가지 못했다고 친구들 앞에서 말했지만 솔직히 말한다면 현화는 그것이 다가 아니였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영근이에게 미련을 가지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였다. 엄마가 돌아간 후 련애도 몇 번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 말마따나 "똑똑한 척 하다" 보니 여태껏 혼자 살고 있다. 이번 동창모임에도 참가하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핑계를 댔지만 결국 이렇게 맹랑한 모습으로 참가하게 된 것이다.

 

"앓는 엄마를 버린 아버지에게서 받은 아픔이 나로 하여금 사랑을 부정하게 했나 봐. 그때 공부하러 가야만 한다는 네가 리기적인 놈으로 보여서 정말 미웠어. 엄마의 고통을 알기 때문에 아버지는 물론이요, 너도 믿을 수 없었고 용서할 수 없었어. 더 깊은 상처를 받기 전에 너와의 관계를 끝내고 싶었어!"

 

현화는 이렇게 주절주절 둘이 갈라지게 된 리유를 설명하는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제 와서 어쩌자고!

"그럼 너는 리기적이 아니였니? 사랑의 소중함이 무엇인지, 리별의 고통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다 부정해버린 너잖아!"

영근이는 거의 절규하다 싶이 소리를 쳤다. 하지만 영근이는 현화를 말하는지 그 자신을 말하는지 엇갈렸다. 영근이는 맥주병을 통째로 마시려는 듯 무섭게 거머쥐고 현화를 노려본다. 영근이 손에서 맥주병을 빼앗으며 현화는 빙긋이 웃었다.

 

현화가 이제 곧 결혼한다고, 너와 나는 여기까지라고 쓴 짤막한 절교의 편지를 보내왔을 때 영근이는 귀가 멍하게 울리며 주변의 소리가 모두 굳어진 젤리 속을 통과해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부하랴 알바를 하랴 하루에 3시간도 자나마나 하는 고단한 날들을 보내면서도 이제 현화와 만날 그날을 그리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는데 다른 남자랑 결혼한다니! 목구멍에 걸린 무언가가 삼켜지지도, 토해지지도 않았지만 "괜찮아, 괜찮고말고!" 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이제 꼭 성공하여 보란 듯이 복수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그 맹세가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건너갈 수 있는 힘이 되여 주었다. 열심히,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영근이의 표정은 남들이 보기에는 비장하기까지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영근이는 마침내 박사학위를 땄고 연구소에 남아 조교로 일하면서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일본생활 5년, 영근이는 현화더러 보란 듯이 일본녀자를 데리고 고향에 돌아와 총망히 결혼식을 치르고 또 총망히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또 5년이 지난 오늘은 이름할 수 없는 허탈감이 마음 한구석을 꽉 메우면서 여태 결혼하지 않고 사는 현화를 붙잡고 매달리고 싶어졌다. 일본녀자와의 결혼은 한 가난한 산골아이가 이렇게 성공해서 멋지게 살고 있다는 표징이요, 박사학위와 나란히 내세운 일종의 과시물이였을 뿐이다. 어쩌면 조용하고 랭철하고 일단 목표를 정하면 옆을 보지 않고 직진하는 영근이의 성격이 현화로 하여금 영근이한테로 갈 수 있는 용기를 앗아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났다. 지금 서로 바라보는 눈길은 애틋하지만 영근이는 윽박지르듯 고함을 치고 현화는 순리대로 가는 게 인생이 아니냐며 모든 걸 단념한 듯한 덤덤한 표정이다. 문득 문밖에서 주인의 구두발소리가 딱딱 들려온다. 밤이 깊어졌으니 이젠 일어나라는 무언의 독촉인가? 아직도 두병이나 남았는데!

 

"일어나자!"

현화가 먼저 움찔하자 영근이가 억지를 쓴다.

"한잔만 더 하자. 나 이번에 일본에 가면 언제 올지 모른다."

 

영근이는 저도 모르게 현화를 쏘아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2년도 견지하지 못한 결혼생활이였다. 영근이는 자신도 돌싱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입안에서 뱅뱅 맴돌 뿐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동창들 모두 영근이를 사업에서도, 사생활에서도 모두 제일 성공한 친구라고 엄지척을 하면서 부러워한다. 영근이가 일본녀자와 결혼한다고 할 때 모두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면서 신기해하다가 "영근이라면 할 수 있ㅈ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예쁘장하고 새물새물 웃기도 하고 다소곳이 고개를 까닥거리던 일본녀자와 갈라지고 혼자 살고 있다고 한다면 동창들은 당연히 믿지 않을 것이다. 물론 현화도 속으로 코웃음을 칠 것이다!

 

현화는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영근의 코드를 내려 쏘파 옆에 놓고 자기는 웃옷을 팔에 걸친 채 계산대로 다가갔다. 계산을 마치고 옷을 입으며 종종 나가려는 현화의 등 뒤에 대고 영근이가 소리쳤다.

"또 혼자 가니?"

현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쳤다.

"빨리 가자!"

 

한겨울 밤의 추위가 온몸을 파고든다. 현화는 멈춰 서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공기가 페속까지 스며들어 뜨거웠던 머리를 식혀주는 것 같았다.

"추워. 차라리 조금 더 걷자. "

 

영근이가 불쑥 말했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현화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까지의 격앙된 목소리 대신에 부드럽고 따뜻함이 깔려 있는 다정한 목소리다.

 

"그래! "

그들은 말없이 골목길을 걸었다. 발걸음소리만이 고요한 밤을 두드렸다. 십여 년 전에도 이렇게 말없이 걷던 밤들이 있었다. 그때는 불안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이 침묵은 무겁게 느껴졌다.

 

"나... 리혼했어! "

영근이가 불쑥 내뱉은 말에 현화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뭐? "

 

"한 3년이 되였구나. 너무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맞추며 살기가 너무 힘이 들어서... "

현화는 할 말을 잃었다. 그동안 그를 "성공한 남자", "다른 녀자의 남자"로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래왔던 자신이 너무 허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도 나름대로의 실패와 상처를 안고 있지 않는가?

"왜 동창들 앞에서는 말을 안 했지?"

"자존심 때문이지. 너도 랭소할 것 같아서... "

 

현화는 웃음을 터뜨렸다. 쓰디쓴 자조의 웃음이였다.

"우린 참... 둘 다 같은 모양새야. 너는 실패를 감추려 하고 나는 상처 입을가 두려워하고. "

영근이도 힘 없이 웃었다.

 

"이제 와서 알겠어. 내가 성공해서 복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 결국 네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증명하려는 것이였지. "

그들이 멈추어 선 곳은 사회구역 운동공원이였다. 텅빈 그네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거리고 있었다.

"우린 정말 아직도 서툴고 어설픈 것 같아."

현화가 그네에 살며시 앉으며 말했다.

 

"사랑하는 법도, 리별하는 법도, 용서하는 법도, 지어는 후회하는 법도 몰랐으니. "

영근이는 그네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설프고 서툴러서 다행이야. "

영근의 말에 현화가 물었다.

"왜? "

 

"우리 관계를 완벽하게 정리되였다면 아마도 우린 이렇게 함께 걷지도 못했을 거야. 어설프고 서툰 사람들끼리만 리해할 수 있는 게 있는 것 같아. "

 

그 말에 현화는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그 무엇인가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완벽한 해결책도, 과거로 돌아갈 방법도 없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은 서로를 리해할 수 있었다.

 

"영근아, 이제 정말 가자. 래일... 아니 오늘 아침에 각자 일이 있잖아. "

현화가 일어나며 말했는데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알겠어.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할게. 현화야, 고마웠어. 그때의 네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어. 래일 이 다방에서 또 만나고 싶어. 꼭 오리라 믿어. 저녁 다섯 시야!  "

 

현화는 방긋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걸음을 뗐다. 두 사람은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물론 과거의 상처가 아물거나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상처를 "어설프고 서툰 계절의 증거"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집에 도착한 현화는 핸드폰을 꺼내 동창 모임 채팅방에서 영근이의 연락처를 꺼내 저장하며 "서툰이"로 별명을 달아 았다. 그리고 피씩 웃었다. 아마 영근이도 현화의 닉네임을 "서툰이"로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이 트기까지 아직도 한참은 시간이 있는 것 같아서 현화는 쏘파에 앉아 있다가 쪽잠이라도 자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침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자꾸만 성미가 급하지만 정직하고 총명한 영근이의 얼굴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느 새 창밖에는 별이 빛나고 있었다.

/전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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