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아름답다. 특히 청소년시절의 꿈은 더욱 아름답고 황홀하다. 초중에서 고중으로 진입하면서 나의 한 가슴도 부푸는 꿈으로 가득 차있었다. 넓다란 운동장에서 새 친구들을 만나고 밝은 교실에서 새 교과서를 펼치는 것, 어제의 내가 또 다른 새로운 나를 만나는 느낌이 좋았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이 기분은 얼마 안 되여
사라지게 되였다. 생각밖으로 가슴에 품은 꿈과 다른 길를 걷게 되면서 마음의 그릇에 쓰라린 아픔을 가득 담게 되였다.
그처럼 바라던 대학시험을 앞두고 집안사정으로 꿈을 접을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고중에 올라가서 얼마 안되여 어머니가 병환으로 쓰러졌던 것이다.
건강하던 어머니가 어느날인가부터 시름시름 아프시더니 마침내 드러누우셨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식사하려해도 입에 넣은 밥 한술조차 넘기기 힘들어 하셨다. 하여 식사때면 밥 한 숫가락에 물 한 모금 따라야 하는 상황이였다.
그때 량곡기술원이시던 아버지는 늘 출장을 다니셨고 큰 오빠는 이미 사회에 진출하여 직장에 출근했다. 둘째오빠는 외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남동생은 중학교를 졸업하기전에 벌써 당시 조선족으로는 가기드문 해방군공군학원에 뽑혀 비행사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남매 중 집에 남아서 어머니의 병환을 돌볼 자식은 오직 나 하나뿐이였다. 결국 내가 학업을 포기하고 집에서 어머니를 돌보게 되였다.
그때 어머니는 매일 몰라보게 체중이 내려가면서 여윈 얼굴에 두 눈마저 우묵하게 들어가 있었다. 피끼 없는 해슥한 얼굴에서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 볼수 없는 우리 사남매의 마음은 형언할수 없는 아픔뿐이였다. 자리에 누워계시는 어머니께서 하루 빨리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나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초조해 갔다.
그때 우리 사남매가 날로 못해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같이 소원하던 것이 있었는데 더도 덜고 말고 어머니가 60세(그때 어머니는 50세 좌우였다.)까지만이라도 우리 곁에 있어주기를 바란 것이다.
지금까지 자식들 뒤바라지에 고생만 해오신 어머니를 바라 볼때마다 나는 어머니께서 혹시 훌쩍 우리 곁을 떠나면 어찌랴 싶어 그때마다 가슴이 철렁 무너지는것만 같아 말로는 형언할수 없는 쓰라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탱해 나갔다.
어머니도 본인의 병간호로 딸이 학업을 포기한 것에 매우 미안해 하시고 마음 아파하시였다. 그러나 그때 우리집 정황으로 아쉽지만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어머니도 우리 자식들도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었다.
우리집의 이런 아쉬운 사정은 동네분들도 다 알고 있었다. 어느하루 앞집에 살던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집문을 뚝 떼고 들어오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 다.
"이처럼 온집식구가 오손도손 재밋게 살아가는데 어머니가 없으면 안되겠지."
그분은 시병원에서 간호장으로 일하시는 분이셨다. 그때는 도시라해도 모두 단층집이라 앞집뒤집 모두가 문을 활짝 열고 살았고 그래서 이웃집 숱가락이 몇개인 것조차도 서로 다 알고 지내던 시절이였다.
그분은 우리더러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오라고 하더니 어머니를 중점대상환자명단에 넣어주
시고 어머니의병치료에 여러면으로 도움을 주셨다. 이렇게 여러분의 도움과 관심 덕분
에 어머니의 병세도 차츰 회복되기 시작하였고 나중에 완전히 건강을 되찾게 되였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때 그 간호장님의 관심과 배려가 없었더라면 60세까지만이라도 우리 곁에 있어주기를 바랬던 어머니께서 어찌 85세까지 천수를 누리며 우리와 함께 할수 있었으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참말로 은인이 따로 없고 그분한테 드리는 감사와 고마움은 이루다 말로 표현할수 없다.
이렇게 어머니께서 병세가 호전되여 자리를 털고 일어서더니 이번에는 또 다른 정황으로 가슴이 아파하셨다. 내가 어머니 병간호로 2, 3년을 돌아치다보니 우리반 동창생들은 모두 고중을 졸업하여 대학생이 되여있지 않으면 직장을 찾아 사회인이 되여 있었던 것이다.
아들 셋은 원만히 공부를 잘 시켜 내놨는데 제일 곱고 아끼는 고명딸만은 결국 엄마를 위해 자기 꿈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미안해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은 나를 바라보는 서글픈 얼굴에서 다 느껴지였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곳이 없다."는 말의 참뜻을 리해하게 되고 그속에서 어머니의 아픈 마음이 보이고 안타까움도 만져지였다.
그동안 나는 어머니의 병을 돌보는 동안 비록 누워계시는 어머니였음에도 매일 볼수 있어서 좋았고 말동무 해주셔서 외롭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였지만 말이다.
그때 나는 고중졸업장은 그럭저럭 받았으나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볼때마다 안스러워 어떻게 위안해 드려야할지 답을 찾지 못 했다. 그냥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만 지켜볼 뿐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어머니의 서운한 마음을 풀어드리고 아픈 마음을 달래드릴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그러다가 지인의 소개로 미용미발기술을 배우게 되고 몇달 지나서 드디여 머리방에서 첫 고객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을 처음 시작한 날에는 자그마한 공간에서 고객을 맞이하는 것이 매우 서먹서먹하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겨우 스무나무살 어린 나이에 사회단련이 전혀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다잡고 쓰푸가 배워준대로 고객의 머리를 차근차근 다듬어 나갔다.
이렇게 겨우 첫 고객의 머리를 다 손질하고 거울에 비쳐보여 드렸더니 다행히 그분은 매우 만족해 하셨다. 고객의 웃음띤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그제야 마음이 후련하고 긴장도 풀렸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가고 기술도 점차 늘어갔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나도 십년동안 열심히 노력하였더니 어느날 내 이름으로 된 머리방도 차리고 손님들로부터 "사장님" 소리도 듣게 되였다. 따라서 단골손님도 늘어나고 수입도 짭짤하여 남부럽지 않는 날을 보내게 되였다. 그리고 나의 이런 노력하는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여드려 참으로 기뻣다.
모든 꿈이 현실로 이뤄지면 좋겠지만 꿈과 현실이 어긋나는 것도 다 현실이다. 꿈은 꿈대로 아름답고 현실은 현실대로 소중하다. 오늘에 와서 이 자리에 서있는 나는 어제날의 어리숙한 내가 아닌 오늘의 당당하게 성장한 나이다. 그리고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나의 이런 씩씩한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여드릴수 있어 항상 기쁘다.
/김향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