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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9/01/31  한민족신문
77개 기념비 수건한 퇴직로당원 김춘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에서 김춘섭의 이름을 말하면 사람들은 기념비를 연상하는 외에 엄지손가락도 함께 내민다. 10년 동안 60여세의 이 퇴직노인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77개 항일열사기념비를 수건 하였다.

 

왕청현 명월저수지를 따라 동쪽으로 올라가면 하나하나의 묘비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깊은 산속에 있는 것이 바로 동만특위소재지-소왕청 항일근거지이다. 항일전쟁시기, 연변지역의 제일 큰 전장으로서 왕청현 경내에는 105차례의 전투가 일어났다. 김춘섭은 현 인대 상무위원 부주임에서 퇴직한 후 현의 후대관심사업 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그는 많은 아이들이 역사를 모르는 것을 발견하였다.

 

"항일열사들은 우리의 곁에 있으나 많은 아이들을 모르고 있다"고 김춘섭은 말했다. 이중에는 적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왕청현위 서기 김상화, 자살로 평화의 소원을 전달하고 유격대에 대량의 탄알을 남겨준 일본인 스케오 등이 있지만 아이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그의 마음속에 비수가 꽂히기라도 한 듯 마음 아팠다.

 

어느 한번, 고향으로 내려가던 중 김춘섭은 동만지역 특별위원회 서기 동장영의 묘에 들렸다. 이 작은 무덤은 20, 30개의 돌로 둘러싸여있었고 잡초로 뒤덮여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동장영은 안휘에서 이 먼 곳 동북까지 와서 항일을 하면서 27세에 희생되였지만 변변한 기념비마저 없었다." 그때부터 김춘섭은 현지에서 희생된 항일열사의 묘비를 수건하려고 결심했다.

 

하지만 자금부족이 제일 큰 문제였다. 김춘섭은 매 단위, 매 기업에 직접 찾아가서 자금을 모았다. 매번 모금하러 가서 가장 많이 한 말이 바로 "이 땅에서 희생된 600여명의 열사들을 대신해 감사드린다"였다.

 

자금을 모으기 힘들었기에 돈을 쓸 때는 각별히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김춘섭은 직접 기념비를 설계하고 시공했다. 김춘섭은 제한된 자금으로 더 많은 기념비를 건축하기 위해 현에서 몇백킬로미터 떨어진 채석장에만 100여 차례 다녀왔다. 그는 당일로 갔다가 돌아왔으며 배가 고프면 차에서 물을 마시고 빵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열사묘비의 부지는 당시 열사가 희생되였거나 전투했던 곳으로 선정했는데 대부분이 산골짜기에 있어 차도 들어갈 수 없었다. 노동자를 찾으면 돈도 많이 들어 김춘섭과 후대관심사업 위원회 몇몇 동지들은 직접 팔을 걷고 나서서 미장일을 했다. 밀림의 풀숲에서 그는 야생진드기한테 물리기도 하고 말벌에게 쏘이기도 했다.

 

시공의 편리를 위해 그는 자신의 전 직원에게서 지게차 한대를 빌렸는데 그것으로 일도 하고 산을 오가는 교통수단으로도 사용하여 차비를 많이 절약하였다. 하지만 지게차의 조종실에는 두 사람밖에 탑승하지 못하였기에 김춘섭은 두말 하지 않고 담요를 걸치고 버킷에 앉았다. 그때 산의 온도는 영하 20, 30도에 달했다.

 

2010년 김춘섭은 C형 간염에 걸려 정기적으로 인터페론을 맞아야 했는데 그 과정은 아주 고통스러웠다. 그때가 바로 동장영 열사 릉원 건설의 가장 중요한 시기였고 시공 날자를 지체해서는 안 되였기에 김춘섭은 저녁에 주사를 맞고 아침에는 평소대로 현장에 가서 시공을 조직했다. 식욕이 감퇴되고 온 몸이 가렵고 머리가 한 웅큼씩 빠졌다...

 

13개월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렀지만 시공에는 하루도 영향주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당신은 살고 싶지 않은가?"라고도 물어봤더니 김춘섭은 "동장영은 27세에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열사들과 비하면 이런 병이 무슨 대수인가!" 라고 대답했다. 2011년 6월, 동장영렬사릉원이 준공되였다. 이때 김춘섭의 체중은 72kg에서 60kg으로 내려갔다.

 

동장영 열사릉원의 면적은 270평방미터이다. 김춘섭은 이 면적은 동장영이 27세의 젊은 생명을 항일투쟁과 민족해방의 신성한 사업에 바쳤음을 상징한다고 했다. "동장영 열사생평비"와" 동만특위 소개비"의 길이는 321센치미터인데 이는 동장영 열사가 1934년 3월 21일에 희생되였음을 상징한다.

 

몇 년 동안 김춘섭이 가장 많이 간 곳은 바로 열사릉원이다. 매번 기념비 앞에 설 때마다 그는 손으로 만져보면서 "기념비는 차가운 돌이 아니라 영혼이 있다. 기념비에는 중화민족의 강인하고 불굴의 혁명정신과 위대한 추구가 응집되여 있다"고 말했다.

 

10년간 김춘섭은 더 많은 기념비를 선열들이 당시 피로 물들인 토지에 세웠을 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존중과 열사에 대한 경의를 사람들의 가슴속에 새겨 넣었다.

/리강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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