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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4/01/18  한민족신문
사라져가는 내 고향

누구나 고향에 대한 향수는 애틋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녀올 수 있는 고향이건만 다녀온지가 수십년이다. 노랑 나뭇잎들이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반겨준다. 친구들과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까 기대도 해보면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해란강을 거슬러 달렸다. 평강벌을 지나 석국령을 넘어서니 이런 두메산골에도 사람이 사나싶을 정도로 골짜기는 좁고 산길은 꼬불꼬불하다. 다행인건 이런 산길도 포장도로로 바뀌여 가는길이 편했다.

 

차로 40분가량 산골로 들어가면 사면이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쌓여 있는 작디작은 벌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시가지 탄광마을이 있었다.

 

내 고향은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시골이 아니라 하늘에는 석탄실은 삭도가 날아가고 땅에는 석탄이 기차를 타고 달리는 탄광이다. 땅속에 복이 묻혀있는 동네라 불리는 지금의 화룡시 복동진에 자리잡은 연변탄광이 내 고향이다.

 

벌방 여자애들이 바구니 들고 봄나물 찾아 즐길 때 내 고향의 사내애들은 광석더미에서 뒹굴며 놀다 석탄 한덩이 주어들고 헤벌죽 집으로 뛰여 갔다. 탄광이라 석탄가루가 흩날려 산천초목이 거뭇거뭇하고 검은 나뭇잎들이 어수선 할거라는 편견과 달리 내 고향 복동은 봄이면 진달래가 아름답게 산능선을 물들였고 소나무가 푸르름을 자랑하는 산골이다. 해마다 피는 꽃은 이 산골 소녀들을 위해 피였던지 7월이면 보라빛 꽃을 찾아 산도라지 캐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 있었다.

 

8월이 오면 내키보다 더 큰 울바자에서 잠자리 잡으려고 발돋음도 수없이 시도했었다. 그때는 동네 한집에 잔치가 있으면 온동네 엄마들이 모여 일손을 거들었다. 민심도 소박해서 문 잠그는 법없이 이웃끼리 서로 나누어 먹으며 정을 쌓고 살았다. 그렇게 온기가 넘쳤고 웃음과 정겨움 그리고 포근함을 간직한 탄광마을이였다.

 

영화가 유일한 문화생활이였던 그 시절에 탄광구락부에는 영화보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구락부는 발도 못디딜 정도로 사람들이 많아 영화표 구하기도 힘들어서 인기있는 영화는 학교운동장에서 방영해주기도 하였다. 연변연극단의 연극이나 연변 가무단의 연출 공연이 있을 때에는 조선족들을 위주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즐기였다.

 

한때 멀리 산동에서까지 사람들이 모여들어 직공 3500여명, 퇴직인원 1000여명에 자녀위주로된 집체소유제 직공 1500여명을 거느린 기업이였다. 탄광이 제일 활기찰 때에는 광부와 그 가족이 13000여명에 복동진 인구까지 합치면 18000여명이 살던 웬간한 산간도시를 방불케하는 탄광 마을이었다. 가는곳마다 시끌벅석 사람들로 붐비여 삶의 모습이 흥성흥성하였다.

 

내 고향은 전국에서도 손꼽는 질 좋은 석탄을 캐냈던 탄광이였다. 검고 빤짝빤짝 광택이나는 석탄은 광부들의 자랑이였고 석탄을 가득 싣고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달리는 기차의 요란한 기적소리는 광부들의 영광이었다. 광부들은 작업복을 입고 안전모 이마에 전등을 달고 갱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는데 이를 하갱(下坑)이라 했다.

 

바위를 뚫어 화약을 넣고 폭발시켜 무너진 광석더미에서 석탄을 캐내어 지하 수백메터에서 광차로 올렸다. 노동 조건이 무척 열악하고 위험하기에 “오늘도 무사히 갱도를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에 숯덩이 얼굴로 환한 미소짓는 광부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아녀자로서 길을 갈 때 광부를 앞질러 가지말라"는 엄마들의 훈육도 있었다.

 

마주서도 산이요, 돌아서도 산인 이 좁은 산골짜기에 한때는 소학교만도 4개가 옹기종기 들어서서 랑랑한 글소리와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전교생이 1400명된 초.고중학교에서는 많은 우수생들이 중점대학에 갔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정부기관과 은행 학교 병원에 취직을 했다. 정부기관의 당위서기, 지방정부의 시장, 대학교 교수, 국가체육 선수단의 교련, 연변가무단의 가수, 악단지휘, 중소학교의 교장선생님, 나름대로 꿈을 이룬 많은 유명인사들이 배출되였던 학교였다. 그렇던 학교가 지금은 페교가 되여 학생들이 뛰어놀던 운동장도 모래적재장으로 변한지 오래되였다.

 

반겨 줄 사람도,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씁슬했지만 내가 청춘을 바쳐 일했던 병원, 한동안 시골에서 꽤나 유명세를 탔던 병원이 페업되여 2층으로된 아담한 건물마저 쓰레기를 쌓아둔채 방치되여 있는게 눈물 나도록 서운하였다.

 

탄광마을에 들어서니 동네앞 철길건너 흐르던 시냇물만이 변함없이 흐를 뿐 석탄실은 기차가 하루 두세번씩 달렸고 3교대 출퇴근하는 광부들을 실어나르라 분주하던 철길은 레루가 오간데 없이 사라졌고 침목은 뉘집 아궁이에서 타버렸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볼품없이 오솔길로 변해있는 철길을 걷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겁고 비통하였다.

 

아버지께서 정년퇴직전 마지막으로 설계하고 시공했던 4층짜리 아파트 7개동은 사람이 살지 않아 급속도로 흉물스럽게 변해버렸고 방치된 세월만큼 잡초에 묻혀버렸다. 페허가 된 아파트를 보면서 아버지의 발자취와 옛 모습들이 사라진것이 마냥 안타갑고 마음 아팠다.

 

마을 깊숙히 들어앉은 옛 집터앞에 섰다. 한때는 사남매 여섯식구가 북적였던 18평방짜리 땅집 아파트, 한개동에 8가구씩 다닥다닥 줄지어 있던 사택들이 빈집이 되여 허물어져 이제는 풀들이 무성하다. 익숙한 동네 골목길은 사람 하나 없이 텅 비여 있고 그처럼 높게 느껴졌던 반가운 뒤산은 나즈막히 드러누워 있다.

 

어린 자식들 배곯지 않게하려고 엄마가 작은언덕 돌담을 비집고 풋강냉이 풋감자를 캐던 텃밭도 주인 잃은지 오래돼 쑥 천지로 되였다. 정든 고향집이지만 이방인처럼 쓸쓸하다.

 

신기하게도 동네 딱 두개 뿐이였던 공동화장실이 탈바꿈하고 그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침마다 출근이나, 등교로 급한 사람들이 허리춤을 잡고 줄지어 순서를 기다리던 생각에 웃음이 났다.

 

땅속에 매장된 석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어느때부터인가 석탄매장량이 놀랄정도로 적어졌다 하였다. 속살을 다 빼내어준 탄광은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렸다. 주변 농민들도 땅이 침체되고 농수가 땅속으로 새여들어 더이상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여 나라에서 새로운 땅을 찾아 이동시켰다.

 

탄광은 수십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문을 닫았다. 세월이 흘러 폐광이 결정되면서 떠난 사람은 오지 않고 남은 사람마저 떠나야 했다는 이 대목에서 나는 가슴에 경련을 일으켰다.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려울 정도로 아프고 허전하였다. 사라져 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공허감으로 나를 기습하였다.

 

고향은 예전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을만큼 페허로 되여가고 있었다. 광부들의 출퇴근으로 출렁이고 번화하던 고향은 너무나 조용하고 한적하다. 고향은 랑랑한 글 소리, 아이들의 재잘 거림이 실종되고 삶의 치렬함이 끊긴지 오래되여 적막과 황페함만 난무한 시골이되였다.

 

젊은 날 광부였던 어르신들이, 지팡이 짚은 노인들이 햇빛 쬐이는 모습만이 남은 이곳이 바로 오매에도 그립고 그립던 내 고향이다. 한국살이 10여년에 어느하루도 잊지못했던 내 고향의 산과 들이 황페한 쑥밭이된 모습에 가슴 절절히 찢어지는 아픔을 끌어 안아야 했다.

 

이빠진 무쇠냄비에 감자장 보글보글 끓여놓고 기다리는 엄마의 점심밥상, 하교길 멀리까지 풍겨오는 엄마의 풋풋한 된장찌개 냄새를 어찌 잊을 수 있을가? 복동, 민광, 장재, 남양, 3분회, 6분회, 7분회 정겨운 동네 , 유년의 추억이 깃든 그리운 고향을 이제는 꿈속에서나 만날수 있을가?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들 만큼 서럽고 외로운 사람이 또 어디에 있으랴?

 

이제 고향은 그리움속에만 머물게 되였다. 옛시절을 회상하면 마음에 헛헛함과 공허함이 밀려와 고향이 낯설게 느껴지고 아픔이 사무친다. 광부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웃음소리 넘치던 내 고향 복동이였는데 내 마음속에 간직했던 모습은 오간데 없고 낯익은 얼굴들도 하나 둘 사라졌다.

 

고향을 고집하는 소수의 노인들과 낯설은 외지인들만 남아 있는 내 고향이 흐르는 세월속에 묻혀진다. 세월이 흘러 노인이된 오늘 내 동년의 꿈을 품은채 고향은 사라져 간다. 한 때의 영광을 누리던 탄광과 광부들의 흔적들이 이제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질 참이다. 광부와 그 가족들로 북적거렸던 이곳이 인구소멸지역으로 굳어질까 걱정이 앞선다.

 

나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장재갱도“라고 쓴 간판을 이마에 부치고 탄광이 입을 벌리고 웃고 있다. 석탄박물관이 관광객을 기다린다. 이제 그곳에 화려한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찾아와 인터넷이나 책에서만 볼 수 있는 석탄과 광산 이야기를 체험하려 광부들의 흔적을 따라 터널속으로 걷는다.

 

사람들은 안내를 받으며 축축한 갱굴속 현장에 이른다. 곡괭이와 드릴을 사용하여 터널을 파고 석탄을 캐는 광부들의 헌신과 고난한 상황이 살아 움직인다. 지금도 터널깊은 곳에는 광부들이 흘린 땀의 흔적이 언뜻 언뜻 남아 있으리라.

 

터널 체험을 마친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석탄을 캐던 광부들의 땀과 수고에 감사한 마음으로 머리 숙인다. 추억속에 쪼그리고 앉았던 초라한 고향이 다시 활약에 넘친다. 연변탄광이 관광탄광으로 부활되였다...

 

아~, 꿈이다. 눈을 뜨니 어느덧 고속도로 연길톨게이트에 도착했다. 꿈이 현실이 되길 기원해 본다.

/김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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