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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2/10/14  한민족신문
큰 아버지의 흰 옷

2022 제24회 KBS한민족체험수기 공모 우수상 수상작

1966년 8월 21일, 고향마을은 전날에 목릉현성을 휩쓴 문화대혁명 태풍의 강타를 받았다.

 

마을의 반란파들은 “반란에 이유가 있다”는 구호를 외치며 밀차를 끌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물건들을 수색하였다.

 

두루마기, 흰 저고리, 비단저고리와 치마, 베갯머리에 “복”자를 새긴 베개, 족보 따위들은 남조선 봉건물건 짝이므로 반란한다는 것이다.

 

만일 어느 집에서든 이런 물건들을 감추기라도 하면 투쟁 맞을 것이라고 을러멨다. 그러면서 보이는 족족 마구잡이로 몰수했다.

 

반란파들은 몰수한 전리품들을 마을의 사거리에 쌓아놓고 석유를 뿌린 후 불을 질렀다.

 

삽시에 검은 연기와 함께 시뻘건 불길이 사거리를 삼켰다.

 

흰옷과 두루마기를 잃은 큰 아버지께서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떻게 이뤄냈는데 ...생각할수록 치가 떨렸다.

 

1944년 10월의 마지막 날에 처음 열린 이주민 세대주 회의 장면이 떠올랐다.

 

일본인들의 강제이주로 목릉현 서쪽 산골에 부려진 30호는 신흥촌 한족들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언어불통과 습관차이로 살아가는 게 참으로 힘들었다. 아니 살아가기 막막했다.

 

빈주먹밖에 없는데 회의를 연들 무슨 소용이 있나?

 

그 날의 회의는 큰 아버지 최사익(1899년 7월 22일 출생)께서 사회하셨다.

 

“여러분 그간 고생 많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기에 용기를 냅시다.”

 

이렇게 서두를 떼신 큰아버지께서는 회의 내용을 간결하게 말씀하셨다.

 

첫째, 마을 터 선택

둘째, 마을이름 짓기

셋째, 살림집 짓는 문제

넷째, 농사짓는 문제

다섯째, 마을 간부 선발.

 

약간의 희망이 보이는지 토론은 열렬했다.

 

마을 터는 신흥촌 맞은 켠 강 건너 양지바른 산기슭으로 정했다.

 

마을의 이름은 갱신(更新)으로 정했다.

 

지을 살림집 30채 모양은 동녕현 노흑산에서 살던 초가 3간으로 정했다.

 

농사는 새해 땅이 녹으면 마을 터 가까이에 있는 산기슭에 밭을 일구고 조와 옥수수를 심기로 했다.

 

토론결정은 했지만 빈 털털이어서 앞이 내다보이지 않았다.

 

이때 갓 선출된 촌장 송석암과 부촌장인 큰 아버지의 동생 최사범이 앞으로 할 일과 계획을 말씀하셨다.

 

중국어를 잘하시는 두 분께서 신흥촌 촌장한테서 받아낸 몇 가지 일을 알렸다.

 

“우리가 집 짓는데 수요 되는 재목을 신흥촌에서 실어 줍니다.”

 

송 촌장의 말씀이 끝나기 바쁘게 박수가 터졌다.

 

“집을 짓고 농사를 짓자면 적지 않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돈을 버는가 하는 문제는 부 촌장 최사범이 전달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형님과 함께 저의 집주인과 돈 벌 일을 상의했습니다.”

 

이렇게 말을 뗀 최사범은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계속 말을 이었다.

 

“저의 집주인은 이 마을에서 이름이 있는 금점군입니다. 해마다 여름철엔 이곳에서 20리 떨어져 있는 삼흥촌에 가 사금 캐기를 해 적지 않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 분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잡은 마을 터 서쪽 골짜기에 사금이 있는데 삼흥촌보다는 못하지만 꽤 있다고 하십니다. 금층이 얕아 캐기 쉬우니 우릴 보고 겨울에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금 캐는 공구는 빌려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최사범의 말씀을 듣던 몇 분이 손을 들었다. 그들은 금 캐기를 해 본적이 있어 한 번 해보는 게 좋다고 했다.

 

일주일 후 금 캐기 전투가 벌어졌다. 보름 만에 5개 금점굴에서 금층을 찾았다. 모두 노다지를 만났다. 하여 3개월간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 돈을 어떻게 어디에 쓰는가 하는 것도 전번처럼 이주민세대주 회의를 열고 검토했다.

 

큰 아버지께서 먼저 말씀하셨다.

 

“살림집 30채 짓자면 목수 세분한테 목수공구를 사 드려야 합니다. 통나무를 문 재료로 켜자면 긴 톱 2개 있어야 합니다. 초가 3간을 지으면 부엌에 우리 가마솥도 있어야 합니다. 밭농사도 짓고 논농사도 제대로 지으려면 집집마다 소 1마리씩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을이 일어서면 우리가 계속 중국인 옷을 입을 수는 없습니다. 촌민들에게 우리 옷을 두벌씩 사 줍시다.”

 

큰 아버지의 제안은 만장일치로 다 통과 됐다.

 

여기까지 생각하신 큰 아버지께서는 몸을 부르르 떠셨다.

 

그날 밤 큰 아버지께서는 사촌형님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이튿날에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이튿날 오후, 집을 나선 큰아버지께서는 습관대로 상여 막을 바라보셨다.

 

“아니 저것이 뭐냐?”

 

글쎄 상여 막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저 자식들이 상여 막을 태우다니?”

큰 아버지께서 몇 걸음 뛰다 싶이 하셨으나 얼마 가시지 못하고 쓰러지셨다.

 

남들한테 부추김 받고 집에 오신 큰 아버지께서는 열흘 만에 일어나 밖에 나가셨다. 다리가 후들거려 지팡이를 짚고 상여 막으로 걸음을 옮기셨다.

 

상여 막에 이르니 가슴이 칼로 에이는 듯 아파났다.

 

큰 아버지께서 손수 만들고 20년간 보관하셨던 상여는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엔 검은 재만 남았다.

 

1946년 봄, 큰 아버지께서는 사망한 촌민의 관을 메 나를 상여를 목수 리춘만과 같이 만드셨다. 길이 9미터 상여를 만드신 후 마을 서쪽에서 1리 떨어진 낮은 언덕위에 길이 10미터, 높이 1,5미터, 너비 2미터인 상여 막을 짓고 상여와 기타 공구를 그 안에 보관하셨다.

 

열흘 전에 마을서 볼 수 있던 상여 막과 상여는 한 무더기 재로 변했다. 큰 아버지의 눈앞은 삽시에 캄캄해 지셨다.

 

상여 터를 떠나신 큰아버지께서는 발걸음을 학교로 돌리셨다.

 

수업시간인데 교사는 군인 옷을 입은 애들만 세워놓고 주자파 투쟁대회 때 외칠 구호 부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애들 왼쪽 팔에는 홍소병 완장이 끼여 있었고 손에는 진 붉은 모주석어록 책이 쥐어 있었다.

 

이 장면에도 가슴이 아파났다.

 

“애들을 공부시키려고 지은 학교에서 공부는 하지 않고 무슨 ‘혁명’을 하다니.”

 

이 학교도 큰 아버지의 제안으로 세워졌다.

 

1946년 설 후 큰 아버지께서 촌장을 찾아가 학교를 지을 문제를 제안하셨다.

 

“마을에 애들이 20여명 있는데 그들을 눈뜬 소경으로 만들 수 없소. 마을아래 터에 학교를 짓기오.”

 

“큰 문제는 제가 혼자 결정할 수 없습니다. 촌민대회를 열고 결정합시다.”

 

그날 오후 열린 촌민대회에서 학교를 짓기로 결정했으나 교사 해결 방안을 찾지 못했다.

 

“학교를 지으면 교사문제도 해결될 수 있습니다. 만약 해결하지 못한다면 제가 서당에서 배운 천자문이 있으니 교사로 나서겠습니다.”

 

큰 아버지의 말에 다들 웃으면서 그것도 한 가지 마지막 방안이라고 했다.

 

그해 가을 전에 6개 교실과 1개 교무실을 갖춘 학교가 일어섰다. 목수들도 큰 아버지께서 켠 널판자로 책상40개, 걸상 80개, 흑판 6개, 교사용 책상 3개, 걸상 3개를 만들었다.

 

현 정부 관계부처에서 3명의 교사를 보냈다.

 

여기까지 회억하신 큰 아버지께서 큰 한숨을 내 쉬셨다.

 

문화대혁명 전만 해도 조선족마을로 화기애애하던 마을은 전투장으로 변했다. 3개 반란파들은 자기들만 혁명파이고 대방은 반혁명이라면서 날마다 개싸움을 벌렸다.

 

간부자리에서 마을을 위해 헌신했던 개척자들은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로 몰려 반란파틀의 투쟁 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이 모든 일은 큰 아버지께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을철이 지나자 촌민들의 옷차림은 신흥촌과 별다름 없었다. 청년들은 군복입기를 좋아했다. 중년이상 남자들은 검은색, 곤색 중산복 차림이었고 여자들은 한족 옷을 입어서 조선족마을이 아니라 한족마을이었다.

 

큰 아버지께서는 연 며칠 고민 끝에 흰 천으로 중산복과 바지를 해 입으셨다. 반란파들이 아니곱게 보았으나 중산복이어서 뭐라고 탈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촌 형수님이 빨래하기 힘들어 졌다. 검은 옷은 웬간이 빨아도 되는데 큰 아버지의 흰 옷은 비누를 더 바르고 빨래방치로 더 힘주어 두드려도 그 효과가 별로였다.

 

여름에는 흐르는 도랑물에서 빨래를 하기에 괜찮지만 겨울에는 집에서 하기에 제대로 헹굴 수 없었다. 별수 없는 형수님께서는 집에서 대충 헹군 후 그 빨래와 도끼를 들고 마을에서 2리 떨어져 있는 강으로 갔다.

 

도끼로 얼음구멍을 크게 깬 후 흐르는 강물에 흰옷을 헹군다. 그리고 나서 그 곳에 있는 빨래돌 우에 빨래를 놓고 방치로 두드린다. 그것도 손 시리고 빨래가 얼기에 오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형수님께서는 큰 아버지한테 검은색 옷을 해드리면 안 되는가고 물으면 대답도 받지 못한다.

 

마침 내가 큰아버지 집에 가자 형수님께서 나한테 하소연 하셨다.

 

“새원(고향마을에서 생원을 새원이라고 불렀음)이 큰 아버지를 설득해 주오.”

 

“네. 제가 한번 시도해 보겠습니다. 점심때에 하겠으니 술안주를 준비해 주세요. 술은 제가 들고 왔습니다.”

 

“그럼 기대하겠소.”

 

뒷산에 땔나무 하러 가신 큰아버지께서 점심때에 집에 오셨다. 70세에도 나무하러 다니는 큰아버지가 대견하셨다. 술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저를 보신 큰 아버지께서는 시물시물 웃으셨다.

 

“언제 왔니? 술상을 보니 네가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같구나. 네 형수가 부탁한 모양이구나.”

 

“뭘 부탁했다구요. 부탁 받은 게 없는데요."

 

“응 그래? 거짓말 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라. 흰옷 문제지.”

 

내가 히히 웃자 술상에 앉으신 큰 아버지께는 술 석잔을 연거퍼 마신 후 입을 열으셨다.

 

“지금은 문화대혁명 시기여서 이 일을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늘 너한테는 말해야겠다.”

 

큰 아버지께서는 술 한잔 더 드신 후 말씀을 이으셨다.

 

“내가 흰 중산복을 입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옷을 입을 수 없어서이다. 우리 옷을 입는 이유는 조선족이라는 것이어서만 아니다. 나의 삼촌, 너한텐 작은 할아버지가 그리워서고 기다려져서이다.

 

“최진수 작은 할아버지를 기다리세요?”

 

“네가 작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어떻게 알어?”

 

“족보에서 봤습니다.”

 

“그렇구나. 작은 할아버지의 이름은 최진수인데 의병을 일으킨 후 신원이 탄로 될까 두려워 개명했다는데 나도 몰라.”

 

“최진수 작은 할아버지가 계셔요?”

 

“너 홍범도 장군 이름을 들어 봤어?”

 

“예. 아버지한테서 들었습니다. 대한 독립군을 이끌고 일제와 싸우신 장군이라고 말입니다.”

 

“맞아. 그 분 수하에서 삼촌은 무관으로 계셨서.”

 

“아, 그래요?”

 

“우리 집은 원래 조선 함경도 명천군에서 살았다. 1910년에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 전국에 첫 통보를 내렸지. 조선 포수들은 엽총을 당지 일본경찰서에 바치라고 말이다. 이 통보를 본 포수들은 일제가 포수들을 겁나한다는 것을 대뜸 알아보았단다. 이 엽총을 바치지 말고 일본 놈들을 쏴 죽이자. 각지에서 포수들은 엽총을 들고 의병을 일으켰다. 삼촌도 명천군의 포수들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강원도에서 홍범도 장군이 일으킨 의병의 대오가 제일 컸어. 그래서 삼촌은 명천의병을 이끌고 홍범도 부대를 찾아갔어.”

 

큰 아버지의 말씀에는 자호감이 꽉 차 있었다.

 

술 한잔을 더 드신 큰아버지께서는 계속 말씀을 이어가셨다.

 

“8년간 소식이 없던 삼촌은 밤중에 집에 들어오셨다. 이곳에 있으면 일본 놈들의 습격을 받을 수 있으니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독촉하셨다.

 

우리 집은 밤중에 소 수레에 식량, 옷, 이불을 싣고 정든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 길에 올랐다.

10일간 정처 없이 가다가 도착한 곳이 중국 송강성(지금의 흑룡강성) 동녕현 노흑산이었다.

 

마침 빈집 한 채가 있어 먹고 잘 곳이 있어 다행이었다. 삼촌은 급한 일이 있다면서 짐 부리기 전에 떠났다. 한달후 삼촌은 집에 돌아오셨다. 몹시 수척하셨다.

 

“노흑산에서 계속 지낸 것은 작은 할아버지 때문이었구만요.”

 

“맞아. 삼촌은 독립군이 밀산 지역으로 가는 길에 들렸어. 그리고 나한테 임무를 주었어.”

 

“무슨 임무요?”

 

“식량모집 임무다. 10일후에 대원 여러 명을 보내겠으니 10가마니 이상 모집해야 한다는 임무를 내린 삼촌은 호주머니에서 무엇이 담긴 주머니를 꺼내 나한테 주었다.

 

약 담배인데 이곳 경찰서장한테 주라는 것이었다.

 

경찰서장은 약 담배 중독자인데 약 담배만 피우면 세상이 녹두알만 해 보여 사무실 밖에 나오지 않는단다.

 

그래야 네가 마음 놓고 식량을 모집할 수 있다. 삼촌은 대단히 꼼꼼한 분이셨다. 그 후 나는 순조롭게 좁쌀과 옥수수쌀 20가마니를 모집했다. 독립군 대원을 만나는 암호는 우리 흰옷 차림이었다.

 

정한 시간에 20명 대원이 와서 식량 10가마니를 가져갔다. 두 번째로 온 독립군 대원은 삼촌의 편지를 갖고 왔다.

 

내용은 부대가 거점을 정하면 날 데리러 오겠다고 하셨다. 그 후부터 나는 저녁만 먹으면 우리 옷을 입고 동구 밖에서 삼촌이나 독립군 대원이 오기만 기다렸다. 1년, 2년, 10년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1940년부터는 기다릴 수도 없었다.

 

동녕현 일본헌병대가 갑자기 트럭 4대를 몰고 와 노흑산 60호 조선 사람을 싣고 가 동녕현 태평진 집단마을에 넣었다.

 

집단마을 사면은 두 키 넘은 토성이 있고 4개 대문에 일본 놈 보초병 둘씩 서 있어 쥐새끼도 얼씬하지 못했다.

 

그것도 성차지 않아 1944년 여름에 이들을 4대의 트럭에 싣고 가 2대는 목릉현 팔면통진 서쪽 산골에 부려놓았고 2대는 할빈시 향방구 벌판에 부려 놓았다.

 

노흑산 조선인들의 운명은 매우 비참했다. 목릉현성 서쪽골짜기에 부려진 30호는 신흥촌 중국인들의 원조 없었으면 몽땅 굶어 죽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말씀하신 큰 아버지께서는 눈물을 훔치셨다.

 

나도 따라 눈물을 흘렸다.

 

큰 아버지께서 술 한잔 굽을 내신 후 말씀을 이으셨다.

 

그런 세월에서도 우린 금 캐기해 번 돈으로 촌민들에게 우리 옷을 사서 나눠주었다. 그런데 20년 후 이런 세월이 오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일본 놈 세월에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다. 망할 놈의 세월이다. 난 지금까지 삼촌의 지시, 아니 유언을 실천하기 위해 애썼다. 삼촌께서 마지막으로 집에 오신 날에 나한테 식량모집 임무를 내린 밖에 다섯 가지 지시를 하셨다.

 

지금 보면 다섯 가지 유언을 남기신 셈이다.

 

“다섯 가지 유언을 남기셨다구요?”

 

“응, 그래,”

첫째, 어디에 가서 살든 네가 조선 사람이란 걸 잊지 말라.

둘째, 어디서 살든 꼭 학교를 지어라. 지금 노흑산마을에 학교가 없구나. 명년에 꼭 학교를 지어라. 학교를 짓기 전에 서쪽의 빈 집을 먼저 사용하고 네 동생 사범 또래들을 모집해라.

 

“선생이 어디 있어요?”

 

“선생은 네가 하렴.”

 

“제가요?”

 

“그래. 네가 서당에서 배운 천자문, 우리 글, 산술을 배워줄 수 있잖니. 그

사이에 마을에서 선생을 찾으렴.“

 

“너의 아버지 또래 8명이 나한테서 글을 배웠다. 그래서 갱신마을이 선후 너의 아버지는 부 촌장, 촌장, 고급사주임, 대대장 일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큰 아버지의 신세를 대단히 많이 지셨네요.”

 

“그 후 선생 두 분을 찾았고 학교도 지었어.”

 

“세번째 유언은 무엇입니까?”

 

“셋째, 그때 삼촌은 나한테 관혼상례 필사본을 주시면서 우리 민족의 예의범절을 후대들에게

계승시켜라. 그리고 초상집이 나지면 부고 오기 전에 찾아가 봐 드려라. 그렇게 하면 네가 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된다.”

 

지당한 말씀이시었다.

 

“그 후 학교를 지을 때 갱신에서 너의 아버지 촌장 등 사업에 큰 도움이 됐다.”

 

넷째, 어디서 살든 우리 옷을 입어라. 옷은 그 민족의 형상을 대표한다. 그래서 그처럼 어려

운 시기에 촌민들에게 우리 옷을 사 주는 제안을 했다.

 

모두들 두 손 들어 찬성하여 한 명당 두벌씩 나눠 주었다. 그런데 지금 무슨 꼴이니?

 

술잔을 쥐신 큰 아버지의 손은 눈에 띄게 떨리시었다.

 

마지막 유언은 촌민들을 이끌고 일제와 싸워라. 나는 독립군지원 일을 했고 너의 아버지는 반일 활동을 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노흑산의 60호는 모두 독립군의 가족이었다. 그렇기에 식량모집이 아주 쉬웠다.

 

여기까지 말씀하신 큰 아버지께서 일어나 안방에 들어가시더니 책 한권을 들고 나오셨다.

나에게 넘기시기에 펼쳐보니 관혼상례 필사본이었다.

 

“네가 중학교 선생이니 너한테 건의한다. 이 책은 삼촌이 나한테 남긴 유물이다. 오늘 너한테 넘기니 책의 내용을 뽑아 학생들에게 가르쳐 줘라. 할수 있지?”

 

“예, 하겠습니다.”

 

“너의 대답을 믿어도 되지?”

 

“예, 믿어 주십시오.”

 

“너 한테 어려운 부탁을 해도 괜찮을까?”

 

“하늘의 별 따오라는 부탁 외는 다 됩니다.”

 

“응 그래? 네가 내 생전에 흰 천으로 우리 옷 한벌 해다우. 옷은 재봉침을 돌려 만들지 말고 손바느질로 해야 한다.”

 

“이 부탁은 당연한 부탁입니다. 옷감을 엄마한테 맡기면 됩니다. 또 다른 부탁이 없습니까?”

 

“있다. 만약 내가 마을에서 장례집사를 정하지 못하고 죽으면 네가 내 후사처리를 맡아라. 수의는 하지 말고 우리 옷을 입혀라. 잊지 말라.”

 

이 부탁에 나는 다소 난처해 났다. 그렇다고 큰아버지께 실망을 드릴 수 없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의 대답이 떨어지자 큰 아버지께서는 나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셨다.

 

한 달 후 나는 엄마께서 지으신 우리 옷을 들고 큰아버지 집에 갔다.

 

옷을 입어보신 큰 아버지께서 그처럼 좋아하시는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런 큰아버지께서 그해 가을에 세상을 뜨셨다. 큰 아버지께서 우리 옷을 입고 저승에 가셨다.

 

나는 큰아버지의 유언대로 학생들에게 우리의 예절을 배워주었다.

 

내가 할빈에 이사간 후 동료 다섯 집 초상을 치러주었다.

 

한국에 나온 후 흑룡강신문 퇴직인 대화방에 동료 사망소식이 뜰 때마다 장례식 절차를 올렸다.

 

오늘도 큰 아버지께서는 우리 옷을 입으시고 이집 저집 마실 다니실 거다.

 

큰 아버지, 존경합니다.

저승에서 편안히 계십시오.

/조카 최영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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