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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2/02/07  한민족신문
힘들게 살아온 40년 세월

나는 이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 가정에서는 기둥으로 아내에게는 훌륭한 남편으로 자식에게는 떳떳한 아버지가 되려는 굳센 신념 하나로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못하는 파란만장한 인생길을 힘들게 걸어왔다.

 

1980년 1월 22일, 음악교원으로 있던 나는 갑자기 건 피소변이 나가면서 아래배가 아파 연변병원에 호송되여 수술대에 올랐다. 29세 꽃나이에 “악성방광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을 줄이야.

 

매일 체온이 40도로 오르내리고 통증을 참다못해 헛소리를 치다가는 혼수상태에 빠지군 했다. 나의 생명은 꺼져가는 불씨와도 같았다. 수술한지 1주일이 지난 후 실을 뽑자고 하니 제때에 아물어야 할 수술자리에서 고름이 터져 나왔고 곪아서 변한 피부를 칼로 도려내야 했다.

 

마취제를 쓰지 않으면 수술자리가 빨리 아문다는 말을 들은 나는 마취제를 쓰지 않고 대수술을 두 번이나 했다. 6개월 만에 수술자리가 겨우 아물자 나는 아내한테 업혀 천진시 공안병원으로 가서 한달 동안 치료를 받았다. 머리가 몽땅 빠지고 체중이 32Kg으로 줄었으며 이제 남은 시간이 3개월 밖에 안 된다는 '사형판결'을 받고 고향에 돌아왔다.

 

7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기쁨은 얼마 가지 못하고 비극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딸애가 귀신처럼 변한 아버지가 무섭다며 내 곁에 오지도 않았고 밖에 나가 햇볕 쪼임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남들이 나를 보고 놀랄가봐 감히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할 수 없이 나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날이 밝기 전에 마을과 3리나 떨어진 남산 낙엽송 밭에 가서 하루를 보내다 날이 어두워 캄캄해져야 산에서 내려 오군 했다. 두해 여름을 산에서 이름 모를 산나물을 뜯어 먹으며 하루하루 보냈다. 지루하고 고독하고 막막했다. 이제 오래 지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서러웠고 맹인이나 지체장애자들이 부러웠다. '사형선고'를 받지 않은 그들이기 때문에.

 

병마와의 싸움은 점점 더 치열했다. 수술자리가 아물지 않아 통증이 심해 맞은 강통정(强痛定)주사에 인이 박혀 하루라도 주사를 맞지 않으면 못 견디는 상황이다. 나는 왕청현 내의 크고 작은 향진과 촌툰 위생소를 찾아다니며 손이야 발이야 빌면서 강통정을 사다가 위생실에 주사기를 감추어두고 아침저녁으로 맞았다. 강통제에 의거해 사는 나는 마약중독자나 다름없었다. 주사를 맞지 않으면 온 몸에 진땀이 줄줄 나고 발광이 나고 닥치는 대로 때리고 부수고 했다.

 

그러던 1983년 8월의 어느 날, 왕청현 대흥구진병원의 리동렬 원장이 나를 찾아와 “젊은 나이에 이게 무슨 짓이요? 남들은 대수술을 하고도 하루에 (强痛定)주사 한대를 맞으면 그만인데 하루에 열대씩 맞으면 한 달도 살지 못하오.” 하면서 강통정을 정지하라고 진심으로 권고했다. 그 말에 나는 '암 말기'라는 사형진단을 받고도 버티고 일어섰으니 강통정도 끊어봐야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3년이나 맞아온 강통제 주사를 떼자니 쉬운 일이 아니였다. 대흥구병원에 입원한 나는 주사생각이 난다 하면 속이 답답하고 발광이 나면서 맞고 있는 링게르 주사를 잡아당겨 복도창문으로 내 던져 병이 박산나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환자들이 병 떼러 왔다가 심장병을 얻겠다며 출원하겠다고 야단쳤다.

 

이렇게 되자 병원에서는 나를 침대에 꽁꽁 묶어놓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나는 발광하다 맥이 빠지면 쓰러지군 했다. 나는 사내대장부라면 아내를 위해, 자식을 위해 죽지 말고 꼭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아픔과 약 중독을 이겨내리라 마음을 먹고 견디고 또 견뎌냈다.

 

석달 동안의 치료를 거쳐 나는 기적적으로 약 중독에서 벗어나게 되였고 혼 나간 사람처럼 동분서주하면서 강통제(强痛定)를 구걸하던 역사를 종말 짓게 되였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고 아내의 정성에 염라대왕이 손을 들었는지 아니면 나의 굳센 삶의 욕망이 기적을 낳았는지 1986년 2월 나는 건강회복이 빠르고 대체로 치유되였다는 결론을 받았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았으니 사회, 가정, 아내와 자식을 위해 보람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나의 삶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우선 남편을 넘어지지 않게 뒤받침을 해준 아내의 정성에 보답하기 위해 아내를 글로 쓰기로 하고 신문, 잡지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1년 동안 26번이나 퇴고를 받으면서 쓴 “나의 아내”라는 실화문학이 “연변청년생활”, “연변녀성” 등 잡지에 발표되였다. 그때로부터 나는 그렇게 애착해오던 음악을 포기하고 신문보도사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나의 노력으로 지금 해마다 기사 수백편이 언론매체에 발표되고 있으며 선후로 “흑룡강신문”, “로년세계” 잡지, “도문강신문” 등 9개 신문매체의 특약기자, 왕청현 신문보도센터의 주임으로, 왕청지구 통신련협회 부주석, 왕청현 가야하예술단 단장 등 직무를 맡고 왕청현을 대외에 홍보하는 중요역할을 하고 있다.

 

당과 정부의 혜택으로 “3개월”밖에 못 산다던 내가 4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감기한번 걸리지 않았고 예술단을 꾸려 8년 동안 만출근을 보장했다는 사실은 세인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그러던 지난해 12월 20일, 나는 입안이 뻣뻣해 지면서 입이 삐뚤어져 왕청현 중의원에 실려갔다. 병원에 실려가 점적주사를 맞자고 하니 혈관이 약해 놓을 수가 없었다. 급해난 급진주사실 호사장 부교(付娇)는 긴급회의를 열고 이 특별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급진실 호사 장민(张敏)을 안배하여 전문 점적주사를 놓게 하였다. 이렇게 되여 강통정 (强痛定)주사를 너무 많이 맞은 탓으로 혈관이 다 줄어든 환자가 두 주일만에 병이 완쾌되여 출원할 수 있게 되였다.

 

강통정 주사를 너무 많이 맞은 데다가 40년 동안 주사한대 맞지 않은 환자를 뜨거운 마음으로 돌봐준 왕청현 중의원 급진주사실 호사들에게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리강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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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장 부교(왼쪽) 호사 (장민)오른쪽
호사장 부교(왼쪽) 호사 (장민)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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