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기자를 취재한다며 감개무량해하던 그!, 후회없는 기자인생 40년을 회고하며 감격에 눈시울을 붉히던 그!, 부분적인 취재는 이런저런 이유로 별수 없이 접어야만 했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던 그!…
환자를 진찰하는 의학도의 안목으로
“기자란 의사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이 기자 역시 사회를 잘 진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자직업에 내놓은 윤운걸선생만의 독특한 “정리”이다. 이한 “정리”는 그의 첫 직업과 무관치 않다.
1953년 10월 훈춘시 춘화진에서 태어난 선생은 연변의학원(오늘날 연변대학 의학원 전신) 의료학부의 유망한 의학도로서 졸업(1980년)과 더불어 두 명의 특별전형 가운데 한사람으로 모교에 남는다. 따라서 그의 첫 공직은 이비인후과 전문의였고 이후 공안계통의 특별요청으로 법의로도 거듭난다. 그러다 “연변의학”잡지가 복간되면서 자연스럽게 편집진에 합류했다. 이 기간 중국라디오TV방송대학 신문전업 통신공부를 시작하면서 기자인생을 위한 토대를 다지기 시작했다. 이어 1983년에 있은 중국신문계통 대학단과수준통일시험에 합격하면서 본격적인 기자인생에 시동을 걸었다.
1984년, 연변인민방송국 공개모집시험에 합격한 선생은 사회교육부 이학편집을 맡았다. 그 이듬해 선생이 편집한 자연과학 보급위주의 프로그램인 “라디오잡지”가 전파를 탔는데 의학도의 예민한 안광으로 현실생활을 진맥해 처방처럼 편성한 프로그램은 금시 방송국의 인기프로로 부상했다. 애청자들의 편지도 잇따랐다. 해당 프로가 진정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알찬 내용들이여서 즐겨 듣는다는 사연과 방송이다 보니 시간대만 놓치게 되면 그처럼 아쉬울 수가 따로 없다며 이미 지나간 내용도 괜찮으니 적어서 보내줄 수 없느냐는 간절한 청구였다.
그 편지들을 읽어 내려가던 선생의 두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매사를 처리함에 있어서 환자를 진찰하듯 신중을 기하던 선생의 의학도적인 안목이 재차 열렸던 것이다. 그 무렵 고고성을 울린 “생활안내”신문이 바로 그 결정체였다.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수차 길림성출판국 책임자들을 찾아다니며 정식간행물등록번호를 따내는 등 집요함과 추진력을 발휘했던 그는 이어 “라디오잡지”의 십여 명 편집일군들을 이끌고 “생활안내”신문을 편집, 발행하는데도 앞장섰다. 선생에 따르면 당시 “생활안내”신문은 도합 4개 지면의 타블로이드판에 주간으로 발행됐는데 판매부수만 해도 무려 5만여 부에 달했다고 한다.
한편 선생은 자신의 글 농사에도 등한시하지 않고 짬짬이 살손을 댔다. 연변TV방송국에서 출품한 선생의 다큐멘터리작품 “돈의 하소연”이 바로 그 성과였다. 이 작품은 1987년 중국라디오TV방송국, 중국과학기술자협회, 중국위생부, 중국애국위생운동협회가 공동주최한 공모에서 국가2등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렸다. 이해 선생은 연변방송국 청소년부 부주임으로 발령받았고 이듬해(1988년)에는 사회교육부 주임으로, 4년 뒤에는 대외연락부 책임자로 발령받는 등 방송국 지도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으며 휘황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선생에게 물어봤다. 방송기자로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언제인가고 말이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선생으로부터 “이산가족 찾기”프로라는 답이 돌아왔다.
지난 1992년부터 공식 개시된 “이산가족 찾기”프로는 그야말로 그 무렵 연변방송의 간판프로나 진배없었다. 미국, 소련(구소련), 일본, 캐나다, 호주, 한국, 조선 등 나라의 이산가족들이 헤어진 혈육을 찾아 줄을 섰던 프로…
사실 이 프로 역시 선생의 의학도적인 안목의 소산이기도 했다. 중한수교 이후의 국제형세를 재빨리 진단했던 선생은 1992년에 있은 한국방문길에서 특별히 한국KBS사회교육방송국을 찾아 이산가족프로를 합작해 제작키로 했다. 뒤이어 얼마 안지나 연변라디오방송에서는 매일 15분길이로 세계각지 동포들의 혈육 찾는 사연을 속속 방송했는데 방송개시 반년 만에 53명의 리산가족을 찾아주었다고 한다.
민족의 아픔을 투시하는 렌트겐으로
1995년 4월, 윤운걸선생은 <<흑룡강신문>> 길림성지사(1989년 설립, 초대지사장 장문)에 전직기자로 전격 입사하게 되었다. 기자로서의 가장 욕심나는 전면보도, 추적보도의 한계를 방송에서 실감하고 있던 차 흑룡강신문사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 흑룡강신문사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국내외 우리 민족사회의 변화와 발전상에 취재의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특히 시대성 있게 중국조선족사회를 진맥하고 관련 부서와 민족지도자들을 찾아 대안을 제시하는 등이 선생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단연히 일터를 옮긴 이유이기도 했다.
흑룡강신문사에 입사한 선생은 곧 자신의 주무기인 프로근성으로 중국조선족언론사에 굵직굵직한 기념비적 작품들을 남겼다.
중한수교이후 1996년부터 중국조선족사회의 비극으로 등장했던 중국동포한국초청사기사건이 바로 그 대표적인 례이다. 민족의 아픔을 투시하는 렌트겐(x射线)으로 이 비극을 예민하게 관조하던 선생은 “동포가슴에 못을 박은 한국위정자들”이란 제하의 특별계열기사를 쏟아냈는데 무려 십여 편에 달했다. 특히 국내 조선족 기타 언론사들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해당사건을 기피하던 상황에서 선생이 백여 명의 사건 관련 피해자들을 집중 취재해 대담하게 터뜨려낸 기사는 가히 특종의 연속이었고 이로 인해 흑룡강신문사는 또 한 번 민족의 대변지라는 동포사회의 찬사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중한 두 나라 해당 정부기관의 중시를 불러일으켜 사건처리에 발판을 마련하는 전기가 되기도 했다.
2007년부터 2009년에 있은 장백산한국인호텔철거사건 역시 그랬다. 민족의 희로애락에 그 취재원천을 두고 펜과 셔터를 다뤄오던 선생은 장백산에 호텔을 세운 한국인들에게 합당한 보상이 없이 강박 철거한다는 사실을 료해하고 주위로부터 오는 압력에 굴하지 않고 관련사건을 집중 취재하여 흑룡강신문에 속속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순조롭게 보상 문제를 해결 받은 그 생면부지의 한국인은 뒤늦게야 선생에게 물질적으로 고마움을 표하려고 했으나 선생은 단연히 거절했다.
연변대학과학기술학원(이하 연변과기대)도 마찬가지였다. 연변에 갓 일떠선 연변과기대는 당시 동포사회에 기독교를 믿는 외국인들이 꾸리는 저질대학교, 별 볼일 없는 대학교로 부정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사정을 알게 된 선생은 연변과기대 김진경총장을 단독 인터뷰해 “김진경, 그는 누구인가?”라는 제하의 인물기사를 발표했다. 이 기사는 당시 중국조선족언론에 거의 공백상태나 다름없던 연변과기대를 동포사회에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고 이후 대폭 학생을 모집하는데도 큰 약발이 됐다.
뜻밖에도 선생이 지금까지 가장 애정을 두고 있는 취재원은 용정3.13만세운동(1919년) 관련기념활동과 행사들이였다. 흑룡강신문사에 입사하여 최초로 국내 매체에 용정3.13만세운동기념활동을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보도해왔던 선생은 이로 하여 지난 2009년 용정시정부로부터 공로패를 수여받기도 했다.
반면 유감도 적지 않다고 했다. 때때로 보이지 않는 공권력과의 싸움과 그 압력으로 부득불 어떤 취재는 중도에서 꺾어야만 했는데 그것을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도 아쉬움과 한숨이 묻어난다고 했다.
친구가 많은 기자 세계로 가는 기자
2008년에 윤운걸 선생은 자신의 기자문집을 출간했다. 흑룡강신문사 전 부총편집으로 근무했던 박일선생은 그 책머리에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윤운걸기자는 흑룡강성과 길림성을 끈끈히 이어주는 착실한 ‘대사’이고 로씨야, 일본, 한국, 조선 등 주변 국가들을 제집처럼 나드는 ‘국제신사’이고 어데서나 좋은 글감을 부지런히 물어오는 ‘꿀벌’로 통한다…
분주한 사회활동가인 윤운걸기자는 사람만나기를 특별히 좋아한다. 그의 대부분 일과는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해서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끝나는 듯싶다. 그래서 기자직업은 윤운걸선생의 천직일 것이고 또 바로 그래서 그의 붓끝에서는 색다르고 맛 다른 글들이 샘물처럼 흘러나오는 것 같다… ”
박일선생의 이러한 평가는 윤운걸선생의 또 다른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조선족매체가운데 최초로 러시아 고려인들의 상황을 중국에 소개했던 선생, 조선, 일본, 한국 등을 단위 또는 개인일로 방문해도 동포언론지의 기자라는 사명감을 잊지 않고 늘 동포사회에 신경을 도사려왔다.
최근 연간 중한언론사에 훈훈한 화제로 회자되고 있는 사건이 있다. 한국언론사상 최초의 중국 심양 주재특파원이었던 연합뉴스의 고 조계창기자가 지난 2008년 12월 도문시로 취재 가던 도중 차사고로 순직했을 때였다. 당시 사건을 처리하던 경찰은 고인의 휴대폰에서 윤운걸선생의 전화번호를 발견하고 바로 연락을 했고, 연락을 받은 즉시 윤운걸선생은 사망자 확인에 나서는 한편 현지 한인회와 연합뉴스 본사에 연락했다. 한편 유가족이 고인 확인 시 최소한 슬픔을 덜어주고자 전문일군을 찾아 한국인의 풍속대로 정중하게 염습을 대신하고 또한 며칠뒤 사재를 털어 한국방문 조문길에 오르기도 했다. 이한 선생의 인간됨은 중국을 자주 찾는 한국의 언론기자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따라서 지금도 연합뉴스를 비롯한 한국의 생면부지의 기자들도 연변에만 오게 되면 통과의례라도 하듯이 선생을 찾는다.
올해로 60세 정년을 맞는 선생은 공직에서 은퇴하게 된다. 하지만 선생에게 추호의 아쉬움도 없다. 기자에게 있어서 “정년퇴직”이란 단어는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환자를 진단하듯 사회를 진단하는 기자에게 있어서 “정년퇴직”이란 인생브레이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까지 장장 40년 기자인생을 줄기차게 달려온 선생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신철국
http://www.hmzxinwen.com/news/8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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