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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1/03/11  한민족신문
저수지 물 속에 잠긴 마을들

무순시 동쪽 신태하에 위치한 대화방(大伙房)저수지 땜에서 동남 쪽으로 배를 타고 약 5-6 키로메터쯤 가다 보면 소청도라고 불리우는 관광지가 있다. 이 소청도의 남쪽으로 넓은 수면이 펼쳐지는데 55년전 이 물밑에 서사(西社), 동사(东社), 소사(小社), 하와자 (下洼子), 득력(得力), 내득구(内得沟), 연화(莲花) 등 7개 자연촌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마을들이 언제 형성되였는지 그 유구한 역사는 알수가 없지만 일찍 조선족이 이 곳 여러 마을에 거주하면서 수전을 개척했고 조선족학교와 조선족교회당을 건립했었다.


원래 이 곳은 동쪽과 서쪽에 산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고 남쪽에서 내려오는 온도하의 맑은 물줄기가 소청도의 절벽밑으로 굽이치며 북으로 흐르다가 혼하와 합류하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곳 벌판의 남북 길이가 5키로메터라고 하여 10 리 벌이라고 불렀으며 푸른산, 맑은 물과 비옥한 땅이 있어 참으로 오붓하고 살기 좋은 고장이였다.


  해방전후 조선족은 소사촌에 50~60호, 동사촌에 30~40호, 득력촌에 40~50호, 하와자촌에 조선족이 10여호, 서사촌에 조선족이 7~8호,내득구촌에 3~4호 살았다고 한다. 연화촌에는 조선족은 없었다고 한다.


1956년 나라에서 대화방 저수지를 건설하면서 수몰구역(水没区)인 이 몇 개 마을의 촌민들을 모두 다른 고장으로 이민 시켰다. 그리하여 이 고장 사람들은 무순의 포가촌, 대도촌, 이석채촌, 탑련 그리고 요양의 조광촌 및 흑룡강성의 아성 등 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였다.


이 곳 마을들이 수몰된지도 어느덧 반세기란 세월이 흘러 갔다. 필자는 세월속에 멈춰버린,그리고 추억으로만 남겨 놓은 이 역사를 요해하고자 이 곳 소사와 득력촌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몇몇 노인들을 찾아 방문하였다.


박순옥(녀)노인은1932년 소사촌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 박응록 (1889 년생)은 조선 경상북도 김천이 고향이였다.부친은 일찍 조실부모하고 숙부네 집에서 살다가 약 17세(1906년)나던 해 어른들을 따라 흥경(지금의 신빈)으로 천입하였다. 그후 얼마 안되여 다시 소사촌에서 그리 멀지않는 남궁방이라는 데로 이사를 하였다.남궁방에 조선족이 많아 그의 부친이 나서서 조선족학교를 세웠었다.그런데 누가 마을에 불을 질러 학교와 민가들이 화재를 당하였다. 정세가 혼란하고 살아 가기가 너무 힘겨웠으므로 그의 부친은 재차 소사로 이사짐을 옮기였다.


  일제강점 시기 이 곳의 벼농사는 모두 일본사람들이 차지하고있었는데 사무기라는 일본사람이 지배하였다. 소사촌에서 그의 가정과 김용집,서상원 등 세집이 큰 가정이였는데 비교적 크게 논 농사를 지었다.


'8·15'광복 이후 소사촌에는 양가 성을 가진 지주가 땅을 많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박순옥 가정에서는 이 지주의 소작농으로 수전 120여무를 다루었다. 토지개혁때 그의 가정은 중국식 흙담 초가집에 살았지만 소달구지가 있었으므로 하여 부농으로 성분을 매기였고 모든 가정재산은 몰수 당하였다.

 

일제강점 시기 무순현 남장당 조선족 농민들.
  해방전쟁 시기 어느 하루 저녁에 소사촌의 김용주는 국민당 군대가 쏜탄알에 맞아 한쪽팔이 떨어져 나갔는가 하면 김용주의 동생은 총알에 맞아 사망되였다. 동립동맹에 참가했던 김재실은 국민당 군대에게 체포되여 모진 악형을 받고 후에 석방되였다. 


소사촌에는 일찍이 조선족 소학교가 건립되였는데 광복 전에 학교 이름을 봉천성 무순현 동사촌공립소사국민우급학교라고 하였다.박순옥 노인은 1939년 일곱 살 나이로 이 소사국민우급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다가 5학년 때 무순시내로들어가 무순조일재만국민학교에 다녔고 무순여자중학교도 다녔다.교장은 오종수였는데 광복이 되면서 조선으로 갔다고 한다.


1935년 생인 김덕선 노인은 부친의 고향이 조선 평안북도 의주였다. 부친이 단신으로 중국 집안으로 천입하여 환인, 봉성에서 살다가 대와로 집단이민을 갔었다.대와에서 '8·15'광복을 맞이하고 피난민이 되여 영구로 갔다가 다시 금주, 안산으로 이사를 다녔으며 후에 팔로군지역으로 찾아 간다고 무순현 소사촌으로 와서 정착하게 되였다. 그의 가정이 소사촌에 이사온 때는 추운 겨울이였는데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팔기도 하고 벼겨로 콩을 바꾸어 먹기도 하면서 생활을 유지하였다.


무순현 제5구 소사촌조선인고급소학교 제1회졸업기념. 1951년1월15일
   토지개혁 때 소사촌의 지주 양가네 재산을 몰수해다가 학교마당에모아 놓고 좋은 물건은 가장 가난한 집부터 분배해 주었다. 그의 가정은 토지 8무를 분배 받았고 초가집도 분배 받았으며 농기구와 가구도 분배 받았다. 그는 1951년 소사촌조선인고급소학교를 졸업한 후 1956년 심양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35년생인 정명일 노인은 고향이 조선 평안북도 철산군이다. 1943년에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천입하여 무순현 서사촌에 정착하였다가 후에 소사촌으로 이주하였다. 일제강점 시기 이 곳에는 조선족들에 의해 이미 3천여 무의 수전이 개척되였다고 한다.


광복후 소사국민학교는 무순현제5구 소사촌 조선인고급소학교로 개명되였는데 한창 흥성할 때는 학생이 130여명까지 도달하였다. 1956년 저수지 이민시기 이 학교가 없어졌다.  


해방전에 소사촌 남쪽으로 약 10여 키로메터 떨어져 있는 남장당(南章党)촌과 그 부근의 사가자촌(四家子村)에도 조선족이 살았고 조선족학교도 있었다고 한다.일제강점시기 사가자촌에 조선족학교가 있었는데 후에 학교가 없어지면서 남장당촌에 학교를 세웠다.해방후 남장당조선학교에는 학생이 약 30여명 되였고 교원은 2명이였는데 1956년까지 존재하였다.


무순현 동사촌 공립소사국민우급학교 제7회졸업기념. 11년12월
   그는 1943년~1948년 기간에 소사학교에서 공부했고 후에 무순시 중심구조선완전소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그 후에는 심양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하였다.그 는 1953년부터 남장당조선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저수지 이민으로 전 전향포가조선소학교로 전근되였다.


1938년 생인 정무 노인의 가정은 1945년 전에 무순 장전자 부근인 평산자에서 살았다. '8·15'광복 후 토비들이 소란을 피우면서 백성들을 귀찮게 굴었다. 한창곤의 소개를 듣으니 소사에 살기도 좋고 학교와 교회도 있으며 조선족이 많이 모여 산다고 하였다.하여 소사로 이사하였다.


그때 이미 소사촌에는 기독교회가 세워져 있었는데 오씨 성을 가진 목사가 있었고 또 조씨 성인 장로도 있었다. 1948년에 기독교회가 해체되자 신봉자들은 개인집으로 돌아가며 가정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동사촌에 왕가성을 가진 지주가 있었는데 그 촌의 땅을 모두 이 왕지주가 차지하고 있었다.왕지주는 아들이 셋이였는데 한명은 국민당 중앙군에 있었고 두명은 중국인민해방군에 있었다.해방군이 들어온 후 마을 군중대회를 열고 산밑에서 왕지주를 창으로 찔러 사형에 처하였다.그는 지주라도 두 아들이 해방군에 있어서 인지 그렇게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무순현 제5구 소사촌조선인초급소학교 제2회졸업기념. 1951년1월15일
  토지개혁 시기 그의 부친 정국풍은 소사촌 대리촌장 직무를 맡아 보았으며 무순지역에서 최초로 호조합작사를 세운 사람이였다. 1955년 전후 그의 부친은 무순시 모범노동자,무순현 모범노동자로 당선되였다.대화방 저수지가 건설되면서 그의 가정은 이민으로 무순 포가촌에 가서 약 4~5년간 살다가 요양 조광촌으로 이사하였다.


1933년 생인 한경택 노인은 한국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하였다.그의 부친은 1937년에 11촌되는 삼촌을 바라고 혼자서 먼저 중국으로 들어와 곧바로 득력촌에 발을 붙이고 머슴살이를 하였다. 그 이듬해 그는 할머니, 어머니, 누이, 형등과 함께 기차를 타고 신의주,안동(지금의 단동),봉천(심양)을 거쳐 득력촌으로 이주 하였다.


첫해 농사를 끝내고 마당질 할 무렵,무순 만달옥 부근 수은이라는 곳에서 살던 삼촌이 사망하였다는 부고를 받고 초상에 갔다 온 부친이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갑자기 부친이 세상을 뜨고 나니 형은 15세, 한경택은 6세나는 철부지들인데다가 할머니와 어머니는 중국 말을 통 모르는 형편이였다.하여 땅 주인이 와서 세를 내라고 하자 언어 소통이 안 되여 탈곡한 벼를 몽땅 다 주었다고 한다. 그들이 부치던 논은 득력촌 북쪽 혼하변의 연화촌 부근이였다. 그들은 중국말을 몰라 오래전부터 이 촌에서 살고 있는 한 성씨인 한기식이란 고향사람에게 의탁하여 농사를 지었다. 


한기식은 이 촌의 조선족중에서 가장 노호였는데 중국말을 잘 하였다.조선족들이 신풀이를 할 때 그가 나서서 지휘하였다.득력 10 리 벌 주위에 동사, 소사 등 7개 촌 이외 동북쪽으로 약 10여 키로메터 넘게 상거한 영반(营盘) 맞은편의 강남호(江南湖) 촌에도 조선족들이 적지 않게 살고 있었다.


봉천성 무순현 소사국민우급학교 전체사생합영. 1942년12월25일
  어느날,그의 어머니가 "밥을 빌어 먹어도 너는 공부를 해라"고 하여 1941년 그는 봉천성 무순현 동사촌 공립소사국민우급학교에 입학하였다. 득력에서 소사까지 근 10 여리나 되는 논판길을 매일 걸어서 학교에 다니였다.일제강점시기 노화교육을 대대적으로 실시하면서 학생들에게 고유의 성씨를 고치도록 강요하였는데 그는 한씨 성을 서원(西原)이라고 고치였다.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일본식 나무총,나무칼을 들고 체육시간에 수업을 받게 하였다.학생들이 말을 안 듣으면 두 줄로 마주보게 세워놓고 호상간에 귀뺨을 때리게 하였다.학교에서는 매 학생에게 한주일에 카드를 세개씩 발급하고 만약 조선말을 하다가 발각되면 발각한 학생한테 카드를 하나 주기로 규정하였다. 매주 토요일에 검사를 하였는데 카드가 하나 없으면 한 주일간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하고카드가 두개 없으면 월사금을 배로 납부해야 하며 카드가 세개 없으면 월사금을 세배로 내는 이외 또 벌을 받아야 했다.이렇게 노화교육을 받으며 공부를 하다 보니 4학년을 다닐 때는 저도 모르게 조선말이 점차 잊혀졌다.


이전에 무순시민족사무위원회에서주임으로 근무했었던 이공렬(본명 조덕민)이 득력촌에 살았는데 집에서 혼자 야학을 꾸리며 아이들에게 조선글로 된 《심목》이란 책을 배워 주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기실 이공렬이 집에서 꾸린 야학은 무순과 신빈 어간의 비밀교통참 이였으며 선생이란 명칭을 걸고 지하공작을 하였던 것이라고 한다.후에 중국인민해방군 보병 제166사(원 이홍광지대)가 들어온 후 이공렬은 가뭇없이 사라졌다가 해방이 되면서 나타났을 때에는 해방군 대오를 따라 의젓한 군복차림에 권총을 허리에 차고 마을로 들어 왔다고 한다. 이공렬은 구정부에서 근무하다가 후에 무순시로 전근하였다.


저수지 이민 당안 증명
  1946년에 학부형들이 자금을 모아 득력촌에 조선소학교를 세웠다.문경환이 교원으로 근무하며 1학년에서 4학년까지 복식 교수반을 꾸리였는데 1956년에 학교가 없어졌다.


득력촌에 성이 정가인 대지주가 살았는데 재산이 많았었다.천으로 만든 버선만 해도 산더미를 이루었고 양식도 곡간에 그득하였다.토지개혁 때 해방군들이 지주의 창고를 열고 양식을 농민들에게 노나 주었으며재산도 모두농민들에게 분배해 주었다. 인민정부에서는 그 지주를 총살하였다. 1948년에서 1956년간 득력촌의 촌장은 최상용이 였다.토지개혁때 이운세가 중공 당원이였다. 한경택은 그때 아동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에 국민당 정규부대 제207사가 득력촌에 들어왔다. 국민당군대는 민가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마을의 장정들을 뽑아다가 군대를 보충하였으며 부역으로 내몰았다. 한경택의 형이 장정으로 뽑히우게 되자 남몰래 처가집이 있는 만달옥으로 피신을 가버렸다.그해 무순시를 방어하는 국민당 군대가 서사에다 방공호와 보루를 짓게 되여 집집마다 한사람씩 부역을 나오라고 하였다.형이 피신갔으므로 나갈 사람이 없어 그가 대신 나갔는데 공사는 철판과 황토로 진지를 수축하는 고된 노동이였다.


무순해방 직전인 1948년 가을의어느날 국민당 군대와 중국인민해방군 보병 제166사(원 이홍광 지대)가 각기 서쪽산과 동쪽산을 차지하고 대치하게 되였다. 국민당 군대의 비행기가 산골짜기를 날아예기도 하였다. 한 번은 해방군들이 득력촌 뒤산에 있었는데 점심밥을 백성들이 날라다 주어야 하였다. 어린 한경택이 그 임무를 맏고 초롱에 밥과 국을 담은 멜대를 어깨에 메고 헐떡거리며 산으로 올랐다.그 런데 목적지에 당도해 보니 멀리서 날아 온 총알이 국을 담은 초롱에 구멍을 뚫러 국물이 다 새여 나가고 건더기만 남아 있었다. 이 광경을 본 해방군의 한 조선족 군인이 "야,이눔아, 너 산게 용타" 라고 하면서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유관자료에 근거하면 20세기 초에 무순의 남장당, 소사, 소류하자 등 촌에 이미 조선족이 꾸리는 글방,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래의 사진중에 "동사교념 기농소년회10 주년기념촬영", "강덕8년(1941년)12월7일"로 선명하게 쓰여 있다. 그리고 사진의 배경에 걸려있는 학교 간판을 보면 "무순현 동사촌 공립소사국민 우급…"이란 글이 보이는데 그 밑에는 응당히 "학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사진의 배경과 이 학교 졸업사진의 배경이 똑 같기 때문이다. 동사교념기농소년회가 어떤 조직이고 무슨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실정을 아는 사람은 여직껏 찾지 못하였다.사진의 근거로 1941년에 10주년을 기념했다면 년대를 거슬러 올라가 1931년에 이르러 동사 교념기농소년회가 성립되였다는 말이다.


필자가 여러 가지 근거들을 분석해 볼 때 이 지역의 소사, 동사, 서사, 득력, 하와자, 내득구 등 마을에 조선족이 가장 일찍 거주한 년대를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전인 19세기 말로 보고 있으며 20세기 10년대에 개인 글방이나 서당을 꾸려 훈장들이 조선족 청소년들에게 문화지식을 전수하다가 20년대에 소사학교를 건립하고 교회당도 세운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윤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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