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수속이 마무리되였다는 소식이 교육국에서 전해왔다. 나의 눈앞에는 비바람을 헤치며 달려온 서른세개의 춘하추동이 주마등마냥 안겨왔다.
1990년 7월 사범대학을 졸업한 나는 흑룡강성 목릉현조선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교원의 일언일행은 새일대 성장과 조국의 미래와 련결되여 있으므로 일거수 일투족에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 교단을 진지로 교육자의 참다운 인생을 써내려가야 한다. 꼭 훌륭한 인민교원이 되어다오.”
로교장인 아버지의 의미심장한 말씀을 가슴속에 아로새기며 나는 팔면통행 열차에 올랐다.
산지에 자리잡은 이 학교는 자그마한 현성중학교였다. 교원숙사가 따로 없어 사무실을 숙소로 겸용했는데 출입문밑에 쿠션들을 밀어넣어 찬바람을 막아야 했고 무더운 여름에는 모기한테 뜯기워 팔다리는 물론, 눈두덩이까지 퉁퉁 부을 때가 예상사였다.
나는 교과서와 참고서를 탐독하고 학생들의 습득수준에 맞게 교수안을 짰다. 학교도서실에 붙박혀 신문잡지들을 깐깐히 읽으면서 과정자원을 발굴하였고 로교원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고 또 배웠다.
당시 학습지와 연습문제는 양초종이를 골판(钢板)우에 대고 골필로 한자한자 오려서 인쇄하군 하였는데 아직도 내 오른쪽 중지가 휘우둠하고 굳은살이 박혀있는 것은 골필이 남긴 흔적이다.
나의 교무실은 늘 찾아오는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우리는 학습문제를 연구하고 인생을 담론하며 시간가는줄 몰랐다. 불밝은 산간학교의 그 창가는 지금도 내 가슴을 따사로이 비춰주군 한다.
1995년 8월, 나는 남편을 따라 밀산시 조선족고급중학교로 전근하게 되였다. 교수질과 대학입시률이 전 성에서 앞자리를 자랑하는 이 학교는 새벽다섯시부터 아침자습을, 밤 열시까지 저녁자습을 조직하였다.
고3 담임인 나는 새벽달을 이고 출근하면 북두성을 동무하여 퇴근하군 하였는데 20대 답지 않게 얼굴에는 거무스름한 잠이 쫙 깔려있었다. 숙고에 달려가 새벽잠에 곯아떨어진 아이들을 깨워놓고는 교실문앞에서 학생들을 기다리는 ”사나운” 담임이 무서워 아이들은 종종걸음 치군 하였다.
그 시절, 대학입시는 삶을 바꾸는 운명과의 박투였고, 대학진학률은 학교의 명줄이였다.
신열이 펄펄 끓는 학생을 자전거 받침대에 싣고 8리 밤길을 달려 링게르를 맞히고 돌아온적은 몇 번이였고 난생처음 엑스레이를 찍어본다며 오돌오돌 떨고 있는 학생을 내품에 꼬옥 안아준적은 몇번이였던가? PC방에 빠진 아이들을 찾아 눈보라속을 꿰뚫고 게임방들을 하나하나 뒤진적은 또 얼마였던가...?
기숙조건이 차했던 당시, 숙소가 습하고 랭하여 감기로 앓는 학생들이 많았다. 푸름한 새벽에 계란죽을 쑤어 숙소로 달려가면 눈물을 머금고 그 죽을 간신히 목구멍에 떠넣던 아이들의 감격어린 눈길에서 한줌이나 되는 약을 먹으면서도 이를 악물고 공부를 견지하던 아이들의 장한 모습에서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보람”을 가슴뿌듯이 느끼면서 힘든 줄 몰랐다.
담임선생님, 심리상담사, 엄마, 보호자 등 수많은 역할들을 한몸에 안고 나는 영동기처럼 돌아쳐야 했다.
자신을 너무 혹사한 탓일가? 졸업반 담임에 부교장직무까지 짊어지고 숨가쁘게 달려오던 2011년 4월, 나는 유방암 2기라는 무서운 진단을 받게 되였다. 암 절제수술과 여덟차 항암치료까지 걸친 나는 극도로 허약해졌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자 이듬해 2월,나는 가발 바람으로 또다시 교단에 올랐다. 여전히 깨알처럼 꽉 박아쓴 교수안을 짰고 백여쪽 내용이 한눈에 확 안겨오는 복습환등편을 한뜸한뜸 만들었으며 또렷하고 격앙된 목소리로 또박또박 수업을 해 내려갔다.
한기 또 한기 아이들이 상급학교로, 조국의 방방곡곡으로 달려갔고 나의 눈가에도 어느덧 잔주름이 늘어났으며 때이른 흰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해마다 새로 맞게 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나이를 잊었고 자기를 잊었다. 오로지 아이들의 성장만을 주목하는 교사, 학교만을 품고있는 나는 식구들의 불만을 자아내게 되었다.
남편은 아이와 집은 뒤전이라면서 나에게 불평을 부렸고 딸애는 내 마음속에는 오직 학생들뿐이라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식구들에게 많이 미안했지만 “아내”가 되기전 나는 “교원”이였고 ”엄마”가 되기 앞서 나는 “담임”이였다. ”충효량난전”이라는 말처럼 살다보면 유감은 언제나 있는 법이다.
2016년 8월, 사업의 수요로 나는 밀산시조선족소학교 교장으로 발령되였다. 내키지 않는 전근령이였지만 “조직의 수요”라는 교육국장의 말에 나는 할말을 잃었다.
26년을 줄곧 고중수업을 해오면서 학교관리를 익혀온 나에게 새 일터는 너무 낯설고 생소했다. 민족교육은 연변지역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연변주 교육학원 리천민교수님을 모시고 우리 학교 눈높이에 맞는 소학교 2개 소와 유치원들을 방문하였으며 교정문화창설과 과정설치 그리고 학교관리에 대해 깊이있게 학습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교무실과 기능교실들을 재조합하여 표준화한 유치원 구도를 내오고 자금을 유치하여 아늑한 유치원환경도 창설하였으며 관리를 규범화하여 문화특색이 다분한 “우리 유치원”을 건설하였는데 이듬해 5월에는 계서지역 2급유치원으로 부상하였고 점점 줄어들던 유치원생수도 점차 늘어나는 호황을 이루었다.
2017년 6월, 우리 학교는 한국의 도움을 받아 20만원을 투자하여 건평이 120여평에 달하는 “네모상자 도서실”을 건설하였다. 심리상담, 도서열독, 소형독서모임 등 다양한 공간들을 두루 갖춘 이 도서실은 사생들이 가장 즐겨찾는 곳으로,밀산교육계는 물론 계서지역 나아가서 흑룡강성 민족교육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으로 자리매김하였다.
2017년은 밀산시조선족소학교 건교 70주년을 맞는 경사스런 한해였다. 학생수가 날로 줄어 생존난에 직면한 학교의 운명은 누구도 예측키 어려웠고 올해를 놓친다면 건교행사의 기회를 영영 놓칠 수도 있었다.
나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경축행사를 추진하였다. 교육국장을 찾아 행사방안을 올리고 학교수선자금과 행사준비금을 쟁취해야 했는데 학생수가 백명도 안되는 미형학교가 자금을 신청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여러번 주관 국장을 찾아 애걸복걸하다 싶이하여 현대화한 종합활동실을 건설하는데 성공하였는데 학교기본시설은 일신되였다.
많은 애로들을 박차고 모든 일들이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될 무렵, 자금긴장으로 교수청사 벽면 미화는 잠시 내년으로 미룬다는 소식이 교육국으로부터 전해왔다. 행사날자가 코앞인데 군데군데 떨어지고 거무스름한 벽면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절대 안될 일이였다. 나는 그길로 교육국장을 찾아 벽면 미화 항목의 긴박성을 피력하고나서 내년의 수선자금을 포기하는 것을 조건으로 눈앞의 건교행사를 좀 도와달라고 청을 들었다.
“전교 학생수가 형제 학교의 한개 학년에도 대비가 안되는 쬐꼬만 학교를 그만큼 봐주었으면 됐지 왜 자꾸 생떼를 쓰오? 내가 이미 똑똑히 말했잖소? 금년도 수선자금이 예산을 엄청 초과했으니 내년에는 꼭 해주겠다고.”
국장의 단호한 대답에 나는 그만 “엉-엉”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약소민족으로 살아온 모든 설음들이 드디여 분출구를 찾은 것일가?
예기치 못한 돌발사건에 당황해 난건 교육국장이였다. 그는 방금과는 달리 온화한 말투로 나를 달래는 한편 기건실 주임을 불러 형제학교의 수선자금에서 15만원을 떼내여 교실과 복도벽을 미화해 주도록 하였다. 사업에 대한 뜨거운 열애가 쏟은 “눈물”이 장황한 보고서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몸이 아파 무용지도를 못하겠다고 떼질쓰는 음악교원을 얼리고 달래여 그럴듯한 축제무용도 내왔고 퇴직교사협회를 건립하고 협회의 힘을 빌어 장내를 들썩일 대합창도 준비하였다.
2017년 10월 13일, 하늘은 가없이 맑고 푸르고 늦가을 날씨 답지않게 따사로왔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사생들과 명절단장으로 일신한 교정은 축제의 분위기로 들끓었다. 70주년 기념행사는 밀산시 조선족사회의 민족대잔치였고 학교발전에 새로운 악장을 열어놓았다.
건물이 낡고 학생수가 적은데다 기초가 박약한 벽지학교를 일떠세우려니 막막할때도 많았고 울음이 나올때도 많았다. 하지만 어깨우에 짊어진 무거운 책임감때문에 나는 팽이처럼 돌아쳐야 했고 한시도 편할 새가 없었다.
전교 사생들의 피타는 노력하에 우리 학교는 2017년 여름에는 국가급 어린이축구운동기지, 2017년 11월에는 흑룡강성 민족단결선진집체, 2019년에는 국가급 소수민족지역 정보화교육 중점건설학교, 2020년에는 국가급 전통예술특색학교의 영예를 따내게 되였다.
이후에도 조선어문 교원이 부족하자 매일 한시간 어문수업에 자진해 나섰고 조선어, 한어 이중언어 습작지도도 선뜻이 맡아나섰다. 교장은 뒤짐이나 짓고 학교관리에 힘쓸게지 수업은 무슨 수업이냐며 빈정대는 이도 있었지만 그런것 따위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밤늦게까지 교수안을 짜고 숙제를 검사하였으며 틀린 표기 한곳, 문장부호 하나 빼놓지 않고 깐깐히 작문수개를 하였다. 학생작문들이 국가와 성급 간행물에 발표되면 어린애처럼 퐁퐁 뛰기까지 하였다.
......
“개인물품들은 다 정리되였겠지?”
등뒤에서 울려오는 남편의 목소리에 나는 추억에서 깨여났다.
“자, 이젠 그만 집으로 갑시다.”
책상자를 들고 나서는 남편을 따라 나는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교문을 나섰다.
어느새 첫눈이 하늘하늘 춤추며 소리없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얀 내 초심처럼.
/고련옥
[고련옥 약력]
1968년 11월 출생. 밀산시 조선족고급중학교 교장, 밀산시조선족소학교 교장 역임. 퇴직. 현재 밀산시 조선족문인협회 부회장.
모든 컨텐츠를 무단 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제호 : 한민족신문, 정기간행물등록번호 : 서울 다07958, 발행인/편집인 : 전길운 편집국장 : 오봉화,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태옥, 발행처 : 주식회사 한민족미디어
전화 : 02-2676-6866, 팩스 : 0504-059-0815, E-mail: xinwen77@naver.com/,
주소 : 서울시 영등포구 대림로 19길 14(대림동 1036-3) 영문주소 : 14 Daerim-ro 19-gil Yeongdeungpo-gu Seoul
//Copyright 2008 한민족신문. Allrights reserved.
후원계좌번호: 우리은행 1005-001-427755 예금주: 한민족신문 Powered by Newsbuil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