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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3/11/27  한민족신문
엄마를 그리며

나의 엄마는 1937년 12월, 화룡시 두도진 (그때는 두도구라 불렀음)에서 태여났다. 그 당시 외할아버지는 교원이였고 외할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엄마는 5남매 중 위로 언니 두 분과 오빠가 계셨고 아래로는 막내 여동생이 있었다.

 

이렇게 다복했던 가정에서 태여난 엄마는 동년을 행복하게 보낼 나이에 불행하게도 일찍 부모를 잃고 오빠와 함께 생활했다.

 

엄마는 어린 나이에 동생을 돌보면서 남편을 군에 보내고 혼자 사는 올케와 함께 지냈다. 그러나 남편도 옆에 없는데 어린 시누이들이 예쁘면 얼마나 예쁘겠어요? 올케는 여름이면 엄마에게 밭일을 시키고 겨울이면 학교로 보내군 하였다.

 

그 시절 겨울의 추위는 얼마나 혹독하였는지 바지도 없이 치마를 입고 학교에 등교한 엄마는 늘 추위에 덜덜 떨군 하였다. 그래도 엄마는 글을 배우는 것이 그렇게도 좋아서 추위도 잊고 열심히 하였단다 .

 

그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도 엄마는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급중학교는 비용 때문에 꿈도 꾸지 못했다.

 

어린 여동생은 전염병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후 엄마는 항상 동생을 잘 돌봐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후회하면서 살아왔다. 엄마없이 살아온 자신의 동년시절을 상상만 해도 가슴의 쓰린다고 했다.

 

20살이 되던 해에 엄마는 지인의 소개로 아빠와 결혼하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외롭게 살아온 엄마는 시어머니를 엄마처럼 모셨다. 그런 착한 엄마를 할머니도 딸처럼 보살펴주어 누구도 고부지간이라 믿지 않을 정도였다.

 

남존여비 사상의 심한 그 시절 엄마는 위로 딸 넷, 막내로 아들 하나를 키웠다. 위로 딸 넷을 키우면서 딸만 낳았다고 친척들의 비난도 받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시부모님과 아버지는 한 번도 엄마 앞에서 싫은 소리 한마디 하시지 않았단다.

 

엄마가 남동생을 임신한 해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 가시기 전에 엄마 손을 꼭 잡고 손자를 업어보고 싶었다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할머니의 그 말씀에 엄마는 슬피 우셨다. 지금도 어린 나이였던 나는 그때 그 날의 일들이 생생하게 떠 오른다.

 

남동생이 태어나던 날 온 동네에 잔치가 벌어졌다. 모두 내 일처럼 기뻐하시고 축하해줬다. 엄마는 남동생을 출산하고 많이 우시였다. 할머니의 그 말씀을 생각하시면서 말이다…

 

지금 남동생은 훌륭한 국가 공무원으로 성장했다. 엄마는 5남매를 키우면서 많은 고생을 했지만 언제나 우리들이 공부만 잘 햐여 출세하기만을 바랐다. 언니와 남동생은 공무원으로 엄마의 소원을 이루었지만 나는 엄마의 기대를 저버렸다.

 

장난 끼가 심했던 나는 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엄마한테 실망을 드린 것 같다.

아빠와 엄마는 저를 무척 이뻐해주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느 날 나는 엄마에게 “엄마는 어떻게 우리 5남매를 키웠어요?”라고 물으니 “잘 키워주지는 못했지만 너희들이 남에게 뒤지지 않고 공부도 잘해 줬고 자기 일은 너희들의 알아서 해 주어서 키웠지” 하면서 환한 웃음으로 쳐다보셨다.

 

엄마는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위궤양으로 힘든 나날들을 보냈다.

한번은 너무 아프셔서 뒤집 아주머니와 함께 병원에 가셨다. 의사 선생님이 약 처방을 떼주면서 꼭 챙겨 먹으라 당부했건만 약값을 치르려던 순간 엄마는 이 돈이면 애들의 학비에 보태야지 하면서 그냥 집으로 오셨단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다. 엄마들은 이렇게 자나 깨나 자식에게 정성을 다 하시는데 우리는 그 정성을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니 부모가 된 지금이야 부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마음은 더 아프다.

 

60~70년대 그때는 집집마다 식량이 부족했지만 우리는 엄마의 부지런함으로 배고픈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았다. 간식거리가 없던 그 시절에는 누릉지와 옥수수 튀김, 알사탕 그리고 3전씩 하는 얼음과자가 전부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엄마는 돼지기르기, 닭 기르기를 부지런히 하셔서 우리들의 간식비와 학비에 보태군 하였다. 나는 유별나게 메밀 묵을 좋아했다. 하여 엄마는 내가 먹고 싶다면 그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여 메밀 묵을 해준다, 두부를 앗아준다, 떡을 해준다, 엿을 달여준다 하면서 분주히 보냈다.

 

다른 자식들은 다 시집 가서 자기 스스로 돤장 담그고 간장 담그고 하였지만 유독 나만은 50대 까지도 엄마가 다 해주셨다. 엄마의 된장 맛은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일품 맛이였다. 지금도 엄마의 그 손맛을 잊지 못해 그리울 때가 많다.

 

우리 아버지는 목수로서 우리 자매들이 시집갈 때 가구들을 손수 짜주셨다. 아버지 손 재주를 둘째 딸인 내가 닮았다고 모두 말한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미용에 흥취가 있었다. 그때부터 온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애게 이발을 해드렸다. 내가 고중을 졸업하자 엄마는 아버지가 길가에 자그마한 미용실을 지어 줄태니 미용을 배우라고 하셨다. 이발을 하면서도 머리카락을 싫어하는 나는 쓸데없는 깔끔을 떨면서 엄마의 마지막 기대마저 저버렸다.

 

지금은 가끔씩 후회하면서 살고 있다. 지금 엄마 말씀을 들었더라면 내 인생도 바뀌지 않았을까 후회도 해본다.

 

2015년 고향에서 아들과 함께 지내시던 엄마는 많이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했다. 한국에서 소식을 듣고 나는 하던 일을 뒤로하고 이튿날 바로 비행기로 고향의 엄마한테로 달려갔다.

마음속으로 엄마가 별일 없기를 빌고 또 빌면서...

 

나를 바라보시던 엄마는 반가운 나머지 눈물을 흘리시면서 괜찮은데 바쁜 시간에 왜 왔어? 하시면서 반가운 얼굴을 보여줬다.

 

입원 6일째 되던 날, 주사 과민으로 엄마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쓰러졌다. 다행히 병원에 근무하면서 배우고 경험한 저는 인츰 별을 누르고 간호과에 알리고 원장님을 찾았다. 원장님은 저에게 빨리 알렸으니 다행이라고 하면서 구급처리를 했다.

 

엄마는 힘들어 하면서도 저축 통장을 너에게 줄테니 비밀번호를 기억하라고 하면서 굳이 알려주었다. 나는 “엄마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울 엄마 사랑해”를 연속 전하면서 엄마를 꼭 안아주었다.

 

엄마는 노래와 춤을 즐겼다. 특히 엄마의 어깨춤은 누구나 감탄할 만큼 잘 추어 운동대회때나 명절 연회 때에도 초대받군 했다.

 

엄마는 오랫동안 노인회장으로 바삐 보내셨다. 말발이 좋고 너그럽고 인내성이 좋은 엄마를 모두가 존경하였다. 울 엄마라서가 아니라 엄마는 참 대단한 것 같다. 어디에도 빠짐없는 분이셨다.

 

말재주가 좋아 코미디가 울고 갈 정도라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저의 친구나 동네분들의 문안 전화가 오면 엄마의 그 재주를 감탄하면서 칭찬을 이끼지 않는다.

 

이런 엄마를 위해 나는 엄마의 흉내도 못내지만 그래도 엄마를 위해 그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춰드렸다.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온 병실에 웃음 꽃이 피였다. 옆에 있던 환자들도 좋아서 앉은자리에서도 어깨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

 

이렇게 엄마가 2주 후 퇴원하자 나는 또 한국으로 돌아왔다.

 

네 딸이 다 한국에 있다 보니 엄마는 딸 사랑이 그리운가 본다. 우리들이 보고 싶어서 한국에 오고 싶단다. 올케가 엄마를 한국에 모셔왔다. 이렇게 한국에 오신 엄마는 큰딸인 언니 집에서 지내면서 복지관에 다니셨다.

 

형부는 마음씨 착한 분이다. 부부는 회사에 다니면서도 엄마를 6년반 동안 잘 모셨다. 형부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이다. 코로나에 엄마도 예외가 아니였다. 엄마는 코로나에 감염되여 스스로 뭐든 할 수 없었다.

 

언니와 형부가 회사에 출근하면서 엄마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라 나와 여동생이 함께 근무하는 우리 병원으로 모셔왔다. 엄마는 우리와 함께 5개월 반 지내다가 올 4월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엄마는 그렇게 아프시면서도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도 괜찮다는 말씀만 하셨다. 임종을 지키는 우리들은 엄마의 두 손을 꼭 잡고 엄마에게 잘 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에 찢어지는 가슴만 쳤다.

 

지금도 나는 엄마에게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신 지 반년이 넘었는데도 마음이 아파서 필을 들고 엄마의 그리움을 적어본다.

 

엄마는 그렇게 이 딸을 걱정하고 예뻐하셨는데 나는 제대로 효도를 하지 못한 딸이다.

 

비록 엄마는 찬란한 업적은 없지만 엄마로서 자식에게 최선을 다한 위대한 엄마이고 자기 인생에 부끄럼 없이 살아오신 훌륭한 엄마라고 나는 자부한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감사와 축복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런 엄마라서 오늘도 나는 엄마가 그립다.

멍하니 앉아 엄마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엄마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엄마가 보고 싶다.

눈물 나게 보고 싶다.

 

이제라도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모든 근심 걱정을 다 내려놓고 해보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하시면서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이 자식은 두 손 모아 빌어 본다.

엄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울 엄마, 보고 싶어요!

울 엄마, 사랑해요!

/이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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