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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3/03/12  한민족신문
나라 잃은 설음 잊어서는 안 된다

"나라 잃은 설음 잊을 수 없다"는 한민족신문에 기재된 리상순선생님께서 보내오신 글은 오늘도 나의 심금을 울린다. 


30여년전 우리 딸이 목릉시 조선족초등학교 6학년때  조선어문 교사셨던 리상순선생님께서는 할빈에 계시지만 광주에 있는 저희와  연락을 계속 했던것이다.

 

나는 기사를 여러번 읽어보았지만 더 보고싶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그러면서 "나라잃은 설음 잊어서는 안된다"는 결의를 더 다지게 된다.

 

올해 73세인 나는 23세에 홍씨가문으로 시집왔다.

시어머니(이귀현)께서는 늘 한국에 살 때 일본놈들의 핍박에 못 이겨 만주로 이사하게 된 가정사를 들려 주셨다.

 

강원도 양양에서의 일이다. 시어머니께서 맡딸을 낳고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할 때였다. 하루는 밤중에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여났다.

 

일본놈들이 주인집 애기 아빠를 강제징역 시키려고 붙잡아가려는 것이였다.

시아버지는 얼른 뒤창문으로 뛰여내려 가까운 산속으로 피신했다. 솔나무를 꺾어 피신처를 만들고 거기서 마을을 주시했다.떠드는소리, 개짓는 소리가 날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사흘째 되던날 밤중에 즘즉해지니 산에서 내려가 살던 집 뒤창문을 똑 똑 두드렸다.


남편을 기다리던 시어머니는  인차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없는 살림에 보리쌀을 불궈 물을 많이 붓고 밥을 지었다. 그 밥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보자기에 싸서 남편의 허리춤에 매여 드렸다. 그렇게 또 산으로 피신하였다.

 

일주일 후 시아버지(4형제 중 셋째)께서 돌아와 보니 둘째형은 끝내 잡혀 갔었다.(그 후로 지금까지 종무소식이다)

 

시아버지 홍길상과 나머지 두 형제는 만주로 피난하셨다. 

 

처음 간 곳은 길림성 조양천이였다. 그곳도 일본놈 세상이라 강제이민을 당했다. 가 보니 계동의 넓은 벌은 새 판이였다. 강가의 버들은 팔뚝만해서 그걸로 막을 치고 지내며 밭을 개간하였다.


벼농사를 지어도 흰 밥은 못 먹고 겨우 배급으로 주는 뜬 옥수수로 연명하였다.

 

그때의 고생은 말도 못했다고 한다.


우리는 나라 잃은 설음을 잊어서는 절대 안된다. 

/조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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