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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9/05/06  초원이
항일투사 강춘화와 그의 조카들

대천촌 서씨가정을 찾아서

왕청현 왕청진 대천촌에 살고있는 항일투사 강춘화의 조카(4남매)들은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면 잊지 않고 맏어머니의 조각상을 찾아 북받치는 격정을 가까스로 눅잦히며 자신들의 감수를 토로하군 한다.

 

그들은 차분한 마음으로 현실을 맞이하며 과거에 묻혀 살지 않는 명철한 로인으로 거듭나 남은여생을 흐리멍텅하게 보내지 않고 매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하루라는 생각으로 품위가 있고 존엄이 있으며 충실하고 완미하게 보내고 있는데 그들이 바로 큰 조카 서련숙(84세) 남편 채수원(84세), 둘째조카 서명산(81세) 며느리 최정옥(75세),셋째 조카 서련숙(84세),막내딸 서련자 (75세), (남편이 2015년에 심근경색으로 사망)이다.

 

1992년과 1994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엄마, 아빠노릇을 하고 있는 서련숙과 서명산은 동생들을 친아들보다 더 잘 보살펴주고 정성을 다했다.

 

서련숙의 령감이 79세 되던 해에 한번은 심장병과 여러 노년병이 도져 매우 중했다. 아들과 의사도 모두 이젠 치료 못한다면서 포기했는데 막내딸인 서련자는 절대 안 된다면서 억지로 병원에 모셔가 치료를 거쳐 현재 84세 로인답지 않게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다. 큰딸 서련숙은 남편에 대한 효성은 자기도 막내 동생을 따라가지 못한다면서 동생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군 한다.

 

1932년 10월, 80여명의 항일투사들이 일제놈들의 토벌을 피해 삼도구 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강춘화는 두 살 나는 딸애를 안고 그들 속에 함께 하고 있었는데 감기로 입구창이 생긴 딸애가 강울음을 울기 시작하였다. 렬을 지은 놈들은 기세등등하여 점점 가까워 오고 아이는 아이대로 점점 기를 쓰고 울어댔다. 어머니는 다급히 아이에게 젖을 물렸으나 허사였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어머니는 큰마음 먹고 어린것의 목을 틀어 그대로 품에 꽉 그러안았다.

 

산천초목도 숨을 죽인 무서운 정적이 두 시간 넘게 흐른 뒤 토벌대가 물러갔다는 정보가 전해져왔다. 그제야 손을 풀어보니 어린것은 얼굴색이 새까맣게 되였고 숨을 거둔지 오래 되였다.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져 내렸지만 어린것을 그대로 강물에 떠나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일제놈들의 잔인한 만행에 가슴에 복수의 불길이 타 번진 강춘화는 일제놈들을 하루 빨리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자신의 한 몸도 다 바쳐 싸워 가리라 이를 옥 물었다. 밤도와 유격대에 물자를 날라 가기 위해 강춘화어머니는 또 셋째 딸을 한마을에 사는 친정집 올케한테 맡겼다. 일제토벌대 놈들이 또 마을로 들이닥치는 바람에 올케는 어린 조카를 안고 뒤울안의 큰 지독을 들쓰고 몸을 숨겼다. 아이는 숨이 막혀 그만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놈들은 대 바람에 총 박죽으로 지독을 깨로 총창으로 올케며 아이를 모두 찔러 죽였다.

 

아이들을 둘 다 잃은 강춘화는 눈물을 휘 뿌리면서 유격대근거지로 물자를 이어 날라 갔다. 거기에는 명사수로 일제놈들과 용맹하게 싸우고 있는 남편이 있었다. 남편과 잠간 숲속에서 만나고난 뒤면 어김없이 아이가 생겼다. 넷째를 낳아 키우던 어느 깊은 밤,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거둔 소금 40근을 등에 지고 문을 나서던 강춘화어머니는 할머니 품에 안겨 잠든 딸애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서야 길을 떠났다. 마을을 벗어나 산발을 타고 고개를 넘어가는데 어느새 낌새를 챈 적들이 뒤쫓아 오며 총격을 가했다. 총알이 비발 치듯 날아왔지만 죽기내기로 앞만 바라고 내처 뛰기만 하는데 순간 턱밑이 따끔해났다.

 

여느 나무초리에 긁혔거니 만져볼 새도 없이 줄달음쳤다. 새벽녘이 되여서야 근거지어구에 들어서는데 마중 나온 유격대원들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 《강춘화동무! 터 터 턱이 떨어졌어요!》 그제야 소금 짐을 넘겨주고 아래턱을 만져보았다. 총알이 스쳐 지나며 턱이 떨어져 내려앉았고 온몸에 피가 랑자하였다. 유격대병원에서 턱을 제자리에 붙여놓고 70일간 빨대로 죽물을 마시며 치료를 받고는 급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죽었다던 며느리가 살아 돌아와 기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웬지 며느리를 마주보지도 못하고 옷고름으로 눈물만 찍으며 서계셨다. 《어머님, 아이는요?》 《피난길에…》 시어머니는 끝내 오열을 터뜨리며 뒤 말을 잇지 못했다.

 

70년대 초 촉수 낮은 전등불 밑에서 맏어머니는 조카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 주군 하였다. 그맘때 한창 사춘기에 접어들었던 막내딸 서금복은 어머니의 속사정을 헤아릴 수 없는지라 쩍하면 바투 들이대기 일쑤였다. 《엄마는 집에서 자기 자식이나 잘 돌볼 것이지 뭔 소용 있다고 그 고생을 찾아했어요? 〈가》자 뒤 다리도 모르는 맏어머니가 어찌하여 그렇게 철저하게 혁명을 했는지 통 알 수가 없단 말이예요.》

 

《맏어머니 세대는 나라마저 빼앗기고 노예로 살았지만 너희들 자식세대는 노예로 살게 하고 싶지 않아서 혁명에 나섰단다. 자기 자식을 붙잡고 있는다고 살아남는 세월이 아니였단 말이다. 일본놈들을 하루 빨리 이 땅에서 물리치고 마음껏 공부도 할 수 있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너도나도 목숨 바쳐 싸운 것이란다!》

 

하지만 맏어머니는 자신을 리해 못해주는 어린 조카들을 한 번도 못마땅해 하지도 않았고 사회에 대한 불만 한마디도 없었다. 오로지 살아남은 자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눈앞의 생활난을 헤쳐나아가기 위해 생산대 벼 짚가리를 번져가며 낟알을 주었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쓸만한 것들을 주어냈으며 비료를 주어 생산대에 바치면서 여전히 사회에 손을 내밀지 않고 얼마만한 기여라도 하기에 애썼을 뿐이다.

 

그러다가도 맏어머니는 간혹 눈물을 훔칠 때가 있었다. 항일전장에서 함께 싸우던 희생된 전사들 이야기를 할 때면 맏어머니는 흐느껴 우셨고 또 울음 섞인 노래를 부르시군 하였다. 《여기는 내 고향 몇 천리던가 고향을 떠난 지 동북벌판에/ 황혼이 쌓여진 지든 저녁에 사랑하는 내 동지를 다시 그리네/ 적탄 앞에 쓰러진 동지 옆에서 이름을 부르며 끌어안으니/ 이 몸은 념려 말고 나가 싸우오 마지막 리별은 슬플 뿐이요》

 

세월이 점점 좋아져 이토록 자유롭고 부유하고 행복한 세상이 오고 보니 맏어머니가 왜 그토록 큰 희생을 치르며 혁명을 했는가가 이해 되였다는 조카들, 세월이 좋아질수록 맏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났고 눈물겹도록 감사했으며 맏어머니의 조카들인 것이 그토록 영광스러웠다고 감개에 젖어 토로한다.

/김금순, 리강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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