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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1/12/11  한민족신문
하아얀 박꽃

나는 어릴 때부터 하얀 박꽃에 특별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 하얀 박꽃은 나에게 하얀 베적삼 입으신 가장 존경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추억의 꽃으로 기억되기에 나는 이 꽃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어릴 때 평원지역에서 태어나고 뼈 굳혀온 나는 도라지꽃이나 진달래꽃은 한번도 보지 못하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꽃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우리 집 터전에서 자라나는 꽃피고 열매 맺는 채소 꽃들이었다. 노란 오이꽃, 보라색 가지 꽃, 새하얀 고추 꽃으로부터 울바자 주변에 심은 노란 해바라기 꽃, 그중에서도 손에 닿지 않고 지붕꼭대기에 높이 올라가 소담히 피어나는 하아얀 박꽃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의 관심과 눈길을 끌었다.

 

나는 사남매 중, 어려서부터 할머니 사랑을 독차지 한 응석둥이로 자라났다. 할머니는 평생 산뜻한 하얀 베적삼을 입으셨고 가리마로 쪽지 신 머리에 수수한 은비녀를 곱게 꽂으셨는데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도 흰 머리카락 한 오리 없어 온 동네 어른들의 부러움 자아냈다.

 

나의 할머니는 평생 단 한장의 사진밖에 안 찍으셨는데 그것마저도 바람이 세게 부는 날거민증(居民证)을 만들기 위해 촌에서 통일로 찍어준 1촌 짜리 흑백 증명사진이다. 바람 때문에 이글어진 얼굴로 찍은 사진, 볼품없이 나온 사진이였지만 아버지께서 회계사로 계셨기에 그 사진을 그대로 거민증에 붙여놓았기에 할머니께서는 이 못난 얼굴을 다시는 찍지 말라고 하시면서 84세로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생더는 사진을 찍지 않으셨다.

 

할머니께서 하늘나라로 가신지도 이제 30년이 되어가면서 한평생 박꽃처럼 하얀 베적삼만 입으셨던 할머니의 모습도 아리숭해 진다.

 

정든 초가집 뒤울안 한 모퉁이에서 기둥타고 지붕위로 뻗으며 곱게 피던 하이얀 박꽃이 눈앞을 스쳐 지난다.

  

예전에 집집마다 박 씨를 심어 하얀 박꽃을 관상하면서 또 박을 키우는 재미도 쏠쏠했던 것 같다. 하얀 박꽃이 지고 열매가 맺어 얼마큼 크면 할머니는 똬리를 틀어 그 위에 박을 곱게 놓아주었다. 그러면 그 박이 클수록 더 고운 모양으로 자라났다.

 

박 농사로 두 세포기 심으면 가을이면 지붕위에 크고 작은 박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가을이 되어 박 잎이 마르고 줄기만 남을 무렵이면 박도 다 영글어 지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박을 따서 보배처럼 그늘진 곳이 잘 보관한다.

  

얼마 후 박을 켜는 날이면 굉장하게 흥성흥성 해진다. 큰 박부터 켜기 시작했는데 우리 사남매는 조롱조롱 드티목에 앉아서 할머니께서 박 켜는 걸 눈이 똥그래서 보고 있었다. 혹시 이 박을 켜면 흥부네 박처럼 그 속에서 보배라도 나오나 신기해서 구경하였단다. 아버지와 할머니께서 땀 흘리시며 톱질하면 우리는 옆에서 응원이라도 하듯 짝짜꿍 쳐대면 할머니께서는 희색이 만면하시여 더 신나게 톱질했다. 절반으로 켠 박은 엄마가 통 안에 있는 씨를 털고 큰 가마에 넣고 어머니가  불을 때면 할머니께서는 가마 목에서 온도를 지켜봐 주셨다. 너무 익혀도 안 되고 덜 익혀도 안 되기에 더 조심해서 쪄내야 한다. 한참 후 가마에서 박을 꺼내면 식기 전에 껍질을 발랐는데 껍질 바를 때는 허물이나 자국이 나지 않게 살살 조심해서 발라야 이쁜 바가지가 나온다.

 

새 노랗게 만들어진 이쁜 바가지를 그늘에 말려 큰 것은 물독 옆에 놓으면 물바가지요, 작은 것은 쌀뒤주에 넣으면 쌀바가지요, 못생긴 바가지는 돼지죽 바가지요, 벼겨 퍼내는바가지는 마른 바가지요. 그 용도도 각각 달랐다.

 

그리고 남은 바가지는 이웃끼리 서로 나누어 쓰기도 했다. 신기한건 우리 엄마는 누구네 집 물바가지 낡아 빠졌고 누구네는 박 농사가 없어 수요 될 것이라고 해서 동네를 다니면서 바가지를 나눠주고 돌아오면 할머니 얼굴에는 항상 웃음꽃이 피어났다.

 

항상 버릇처럼 하시던 할머니의 그 말씀 아직도 나의 귀에 쟁쟁하게 들려온다. “내 고기열점 나가야 남의 고기 한 점 돌아 온단다.” 보상바라지 않고 베풀며 살아가는 사랑이 넘치는 말씀, 마음에 새기고 지금도 나는 종종 되새겨 본다.

 

그 박씨 몇 알 심어서 하얀 박꽃이 이렇게 큰 복 바가지로 변하는 것이 얼마나 신기했던지?! 그래서인지 박꽃은 나의 신념의 꽃처럼 더 정이 가는 꽃이란다.

  

하아얀  박꽃, 그것은 정녕 할머니의 하얀 베적삼 입은 그 모습이 담긴 정다운 꽃이여라. 순박함이 담긴 순결한 하아얀 박꽃!

 

지금의 아이들은 안데르쎈의 동화속에서 자라나지만 우리 사남매의 동년은 할머니 옛말 옛 이야기속에서  자라났다.

  

호랑이 담배피우고 여우가 말하던 때로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고 우리에게 인생도리를 깨우쳐 주는 계몽교육이기도 하였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 토끼꼬리는 왜 짧아졌는가? 토끼와 범의 이야기, 콩쥐와 팥쥐의 이야기, 고양이와 개는 왜 싸우는가? 김삿갓의 별별 이야기. 어릴 때 잠자기 전에는 꼭 할머니 옛말을 듣고서야 잠을 잤던 추억이 또 다시 떠오른다.

 

할머니는 문맹이여서 글을 모르지만 그 옛말, 옛이야기는 책 한권 써도 모자랄 만큼 많았다. 그 옛말, 옛이야기가 글 모르는 평민들의 입담으로 전해오면서 선조들께서 물려받은 삶의 진리, 대대로 이어온 전통미덕, 민족의 넋이 아니였을까?!

 

할머니의 계몽교육에 우리 사남매의 동년도 하아얀 박꽃처럼 티 없이 깨끗하였다. 도라지꽃, 진달래꽃은 우리 민족의 상징의 꽃으로 전해진 꽃이지만 그래도 나는 하아얀 박꽃을 더 좋아한다고 서슴없이 말하고 싶다. 할머니의 영혼이 슴배인 하아얀 박꽃.

/박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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