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봄날.
겨우내 기승을 부리던 맵짠 칼바람은 계절의 변화에 기세가 꺾여 조금이나마 온화 해졌다. 꽁꽁 얼어 붙었던 룡천하는 따스한 봄햇살에 살살 몸을 풀기 시작하며 그간의 설움을 달래듯 졸졸 소리내며 흘러간다.
산에도 들에도 겨우내 덮였던 하얀 솜이불은 험한 겨울을 버티느라 이제는 여기도 듬성 저기도 듬성 떨어져 나가버리고 안스럽게 때가 까질까질하게 끼여있다.
허구한 날 집안에 들이박혀있는 것도 무엇하여 어정어정 마당으로 나왔다. 울바자로 빙 둘러있는 울안은 볕이 따스하고 아늑했다.
헛간에서 낡고 고장난 농기구들을 하나하나 꺼내 마당에 진열해놓고 쭈크리고 앉아서 뚝딱뚝딱 손질했다. 헐렁한 삽자루도 쇄기를 박아 단단하게 만들고 녹이 쓴 호미도 반들반들 갈아놓고 쇠스랑도 쓰기좋게 자루를 단단히 손질해 놓았다.
머리위에서 짹짹 거리는 참새들의 노래소리가 귀맛좋게 들려왔다. 일손을 놓고 고개 들어 올려다보니 언제 피였는지 나무가지마다 하얀 배꽃이 눈송이처럼 소복히 피어올랐다. 산들바람에 살랑거리는 가지에서 몇마리 참새들이 깃을 다듬으며 따스한 봄볕을 쬐고 있다.
이런 느긋한 일상이 나는 참 좋다. 그리고 행복하다. 따스한 햇살이 보시시 내리는 마당에 앉아 있노라면 겨우내 움추렸던 몸과 우울한 마음도 사르르 녹는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대지는 종달이의 울음소리에 깊은 잠에서 깨여나고 파아란 새싹들이 뾰족뾰족 돋아나는 산비탈은 벌써 연두색으로 곱게 물든다. 저 멀리로 양지쪽 비탈에는 제비꽃들이 곱게 피여나고 있다.
이렇게 봄이 완연하니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이 몸이 먼저 움직인것이다.
아버지가 생전에 살던 집도, 손때 묻은 농기구도 차마 버리지 못해 재미 삼아, 잊지 못할 옛추억들을 더듬어며 힘 닿는데로 작은 뙈기밭을 가꾸기로 마음 먹었다. 평생을 농부로 살아 오신 아버지의 마지막 흔적이라도 지키기 위해서, 정든 고향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혼자 남았다. 나서 자란 고향집은 곳곳에 추억이 가득 깃들어 있어 차마 떠나지 못하는것을 자식이 알아 못주는것도 당연지사라고 생각을 한다.
헛간 한 구석에 뽀얀 먼지를 덮어쓰고 덩거러니 놓여있는 방망이와 다듬이돌이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듯이 한스레 놓여있다. 처마밑에는 닳고 닳아서 반들반들해진 지게가 놓여있다. 이미 저 세상으로 간지 오랜 할아버지께서 손수 만든 지게다. 대를 이어 온 지게는 지금도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내가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이렇게 남은것도 조상에 대한 예의이고 마지막의 신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향집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있는 작은 산간 마을이다. 앞으로는 룡천하가 굽이쳐 흐르고 북쪽 산비탈을 따라 스무 몇채의 초가들이 옹기종기 남향으로 모여 있다. 비록 인가는 적지만 고향사람들이 단합하여 수전을 일구어 벼농사도 짓고 산을 깎아서 과수원도 만들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조상님들의 지혜와 부지런함에 감탄을 금치못한다.
피눈물을 흘리며 고국을 떠나 이국 타향에서 떠돌며 갖은 설움과 수모를 당했었다. 조상님들의 피타는 노력이 있었기에 후손들인 우리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동산 기슭에는 악착같이 살다가신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뫼가 모셔져 있고 수호신마냥 고향을 지키고 있다. 나는 평시에 짬만 나면 어르신들의 산소를 찾아서 벌초도 해주고 메돼지가 헤치고간 자리를 보수해주기도 한다.
동네 젊은이들이 자식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모두가 도시로 나가버리고 지금은 서너집 만이 남아서 텅빈 고향을 지키고 있다.
오손도손 모여서 동네 어르신들의 생신잔치를 치르는 일도, 자정이 지난 한 밤중에 아기의 자지러진 울음소리도 지금은 없다. 욱적북적하고 생기찬 그런 고향은 아주 먼 옛적 이야기다.
후∼
담배 한개비를 꺼내 물고 성냥을 그으서 불을 붙이고 깊숙이 한모금 들이 빨았다. 새하얀 담배연기는 금방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진다. 옛날 생각에 나는 더없이 서글퍼진다. 이제는 함께 담배 피우며 이바구 할 사람도, ‘ 장군아 멍군아 ’ 실랑이를 벌이며 장기를 둘 사람 조차도 없다는것이 참으로 개탄스럽다.
‘ 앞으로 성묘하는 사람이 없어서 더 걱정이네, 후∼’
먼 산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걱정이 먼저 앞선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청명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 오던것이 이제는 발길들을 다 끊다싶이 하니 마음이 타들어간다.
‘ 다들 이국타향에서 고생하다 조상의 산소에 벌초를 하려고 큰돈 팔고 비행기를 탈수가 없지 않은가?! ‘
혼자 말로 중얼중얼 거리며 나는 눈길을 딴데다 돌렸다. 나의 시선은 울바자 너머 동갑내기 순이네 집으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순이네 집도 텅 빈지가 오래다. 굴뚝이 허물어지고 창문의 창살이 다 떨어져 나가버렸다. 풀이 무성한 장독대에는 주인을 기다리다 기진한 장독들이 입을 한껏 벌리고 하늘에 하소연하고 있었다. 순이가 시집을 간 후부터 단 한번도 얼굴을 본적이 없었다. 새삼 그리워진다.
지금 그 어디에서 잘 살고는 있겠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어릴적 순이한테 대통 얻어맞아 쩔쩔 맸던것을 생각하니 괜한 걱정을 한것 같다.
말썽인 순이네 복사나무가 올해도 어김없이 울바자를 타고 넘어와 곱게도 폈다.
“ 거지같은 새끼야! 우리집 나무에 달린 복숭아니 절대로 따먹지 말라고 했지! ”
“ 울바자 넘어와 달린 복숭아니 당연히 우리집것이지, 메롱∼”
비록 수십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건만 엊그제 일인듯 눈앞에 삼삼하다.
나는 얼나간 사람처럼 실없이 히죽히죽 웃었다. 그리고 구수하게 담배 한모금을 빨았다.
“ 야! 이놈의 수탉이 겁없이 어디 와서 행패야...때려 죽일 놈 같으니! “
울바자 너머에서 약이 잔뜩 오른 순이가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어대며 우리집 울안으로 흙덩이를 마구 던져대고 있었다. 흙덩이는 마당의 시멘트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셔져 온 마당이 어지럽게 되였다. 이른 새벽에 먼지를 팍팍 내며 열심히 쓸어놓은 마당이다.
그 난리통에 마당의 닭들이 사방으로 달아나며 꼬꼬 거린다.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한 우리집 수탉 짱돌이는 목에 갈기를 세우고 마당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꺽꺽 거린다.
사연을 들어보니 우리집 수탉 짱돌이가 순이네집 수탉 봉삼이를 사정없이 패놓고 울바자를 훌 날아 넘어왔던것이다.
방에서 재밋게 그림책을 보고있던 나는 소란스러워 방문을 박차고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나는 수탉 짱돌이를 등뒤로 숨기며 울바자 너머 순이를 흘겨보며 닭싸움에 왜 니가 끼여드느냐고 야단을 떨었다.
“ 니집 짱돌이가 우리집 봉삼이를 피투성이가 되게 쪼아 놓았는데 뭘 잘했다고 큰소리니! 너 이쪽으로 건느와보라...코피가 터지게 두들겨 패줄테니까! “
퍽!
언제 또 주어들었는지 순이가 던진 흙덩이가 머리우를 휙 날아 넘어 마당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나를 맞히지 못한 순이는 안달아났는지 더 큰 흙덩이를 주어들어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요리조리 몸을 비틀며 교묘하게 흙덩이를 피해 다녔다. 하나도 맞히지 못한 순이는 얼굴이 수수떡이 되여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성이 상투밑까지 오른 순이가 울바자를 비집고 막 넘어오려하자 마당으로 달려나온 엄마가 억지로 끌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며칠전 비온 뒤의 일이였다.
순이집 마당에서 도랑을 파고 물장난을 치며 재미나게 놀던 내가 순이의 흙묻은 삽에 호되게 얻어 맞았었다. 지금도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후 범같은 순이하고는 다시는 상대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우리집 수탉 짱돌이가 나를 위해서 톡톡히 복수를 해준 셈이 된것이다.
구∼구∼
순이의 약을 올리듯 나는 강냉이를 한바가지 들고 나와서 짱돌이에게 상주듯 휙휙 뿌려주었다.
“ 많이 먹어라 짱돌아, 많이 먹어야 싸워 이기지! 다음에는 일어나지도 못하게 빵빵 패주거라! “
빈 바가지를 퉁퉁 치면서 나는 울바자 너머 순이의 약을 올렸다. 내가 이렇게 난리를 쳐대는데 방에 들어간 순이가 못 들을리가 만무했다. 일부러 들어라고 큰 소리를 쳐댄것이다.
“ 야, 이새끼야! 너 누구한테 약올리는것이니, 야! 이쪽으로 건너와라 좀 맞자 ”
언제 밖으로 나왔는지 순이가 그 무서운 도끼눈을 부릅뜨고 울바자 틈새로 넘어오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약이 오를데로 오른 순이를 보고 있으니 키득키득 웃음이 절로 나왔고 속으로는 한없이 깨고소했다.
순이의 매운 손맛을 익히 알고있는 나는 진작 가시나무가지로 울바자 틈새를 믿음직스럽게 단단히 막아 놓았으니 아무 걱정도 없었다. 그렇게 무서운 순이라지만 종래로 우리집 대문으로 들어온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
갑자기 코가 시큰 해지며 뜨거운 그 무엇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 내린다. 소시적 뻔질나게 기여가고 기여오던 울바자를 나는 묵묵히 만지고 또 만진다
“ 야, 이새끼야, 우리집 복숭아를 따먹지 말랬지! “
/이한택
http://www.hmzxinwen.com/news/27980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독자의견 (총 0건)
Powered by Newsbuild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