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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해림시 백야 김좌진장군 순국지

김좌진은 1889년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태어났다. 김좌진은 홍성에서 계몽운동으로 민족운동을 시작했다. 먼저 노비를 해방시켰다고 한다. 그가 민족운동을 시작한 것은 일제의 침략과 속박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김좌진은 국권회복을 위해서 빈부귀천의 철폐와 인간평등의 실현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인식했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김좌진은 노비를 해방시킨 후 홍성의 호명학교 설립에 참여했다.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홍성지역의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시키는 것을 가장 시급한 문제로 보았던 것이다. 김좌진은 1907년 부인 오숙근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김좌진의 상경은 교육운동을 하기 보다는 기울어져가는 대한제국의 현실을 직접 보고 자신이 나아갈 길을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김좌진에게 서울 생활은 신문물을 접하고 민족 운동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김좌진은 서울 생활을 하면서 주로 경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신민회원들과 교류했다. 신민회는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교육과 국민경제를 발전시키고자 교육기관과 상업기관을 운영했다. 김좌진은 상경을 전후하여 김항규, 김홍진 등과 함께 자진해서 상투를 잘랐다.

 

1910년 8월 국권이 강탈당한 후 서간도에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지원하고 독립전쟁을 준비하며 자금을 모집하던 중 1911년 1월경 일경에 붙잡혔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백범 김구도 만났다.

 

1913년 형기를 마치고 고향인 홍성에 내려와 은둔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915년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여 다시 독립운동 전선에 나섰다. 대한광복회의 목적은 독립전쟁을 통해 조국을 독립시키는 것이었다. 광복회원들은 원수 일본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의무이며 강토회복과 광복은 당연히 도래한다는 신념을 잃지 않았다.

 

대한광복회 부 사령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만주로 떠난 김좌진은 1919년 3월 “대한독립선언서”에 대표로 서명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해 8월 서일총재의 초빙으로 대한 정의단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군사부문을 전담했다. 12월 대한 정의단이 대한군정서로 개칭됨에 따라 대한군정서의 사령관이 되었으며 왕칭현 서대파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1920년 10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홍범도 부대와 함께 러시아 이만(현 Dal’nerechensk)으로 이동했다. 1922년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을 맡았으며 1925년 3월, 녕안현에서 북만지역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해 조직된 신민부의 군사부위원장을 역임했다.

 

1927년 12월, 신민부가 교육과 산업에 치중하자는 민정파와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군정파로 나뉘게 되자 중앙집행위원장에 임명되어 군정파를 이끌었다. 이후 삼부三府 통합운동에 참여하였으며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30년 1월, 독립운동 노선을 달리하는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금성정미소에서 순국했다. 순국 장소인 흑룡강성 해림시 산시진 도남촌 문명로에 백야장군의 흉상이 중국에 처음으로 옥외에 건립되었다.

/노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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