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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3/10/13  한민족신문
타향살이 여든셋 해

나의 타향살이 몇해이던가? 손꼽아 세여 보니 여든 셋 해가가 된다. 나는 왜 이처럼 기구한 타향살이를 해야 했나? 고향이 나빠서인가?

 

아니다.

 

비록 다섯 살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머리 속에 남아있는 고향이 어렴풋하거나 기억에 없으련만 타향에서 할머님의 고향자랑을 들으며 자랐다. 하여 머리 속의 고향은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아 있다.

 

내가 7년 전에 딸과 함께 고향마을을 찾아 갔을 때 눈앞에 그 아름다운 고향이 펄쳐 졌다. 산새들이 지저귀는 푸른 동산, 졸졸 노래하며 흐르는 맑고 시원한 개울물, 흉년을 모르는 비옥한 토지, 나무람이 끝없는 고향마을이다. 이 고향마을은 북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매월리에 자리 잡고 있는 장작터이다.

 

개울가에 이른 나는 어릴 때처럼 옹크리고 앉아 손바닥을 붙인 두 손으로 개울물을 떠 꿀꺽 꿀꺽 마셨다. 고향의 시원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나는 동행한 딸과 함께 내가 태여나 5년간 자란 고향집을 찾아갔다. 초가 3간 고향집은 그 모양대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일본 놈에게 잡혀가더라도 집을 잊지 않으시려고 손수 심으신 팽나무는 나와 딸이 팔을 벌렸지만 손을 잡을수 없게 자랐다.

 

증조할아버지께서 지으신 8간 기와집터도 가 보았다.

 

이처럼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고향을 우리는 왜 떠나 기구한 타향살이를 해야 했나? 답은 하나다. 1905년부터 1945년8월 중순까지 왜놈한테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왜놈들이 우리나라로 쳐들어오자 마을에서 남보다 공부를 많이 하신 이종면 할아버지께서 마을사람들에게 망국노로 살 수 없다면서 1919년 3월 1일에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민국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셨다.

 

이런 할아버지를 일본 놈들이 가만 둘리 만무하다. 일본헌병대에 끌려가신 할아버지께서 반년 후에 풀려나셨으나 두 다리가 병신 되셔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집으로 오셨다.

 

더는 밭일을 할 수 없었다. 8간 기와집을 팔고 초가 3간 집을 사셨다. 웃돈으로 서울을 오가시면서 한의술을 배우셨다. 그 후 마을에 자그마한 한의원을 차렸다.

 

가정살림이 갑자기 기울어지자 제일 큰 타격을 받으신 할머니께서 시력감퇴 증에 걸리셨다. 할아버지께서 치료하셨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시고 소경으로 되셨다.

 

집안 살림을 주관하신 할머니께서 집안일을 하지 못하시자 아버지(이철우)께서 16세에 어머니와 결혼하셨다. 그럭저럭 지내던 중 언니와 오빠가 태여난 후 아버지께서는 일본봉사대에 끌려가 군마 사양실에서 말사양일을 하셨다. 일이 힘든데다가 사양실이 더러워 아버지께서는 전염성이 빠른 옴병에 걸렸다. 일본 놈들은 치료를 해주지 않고 집으로 쫓아 보냈다.

 

집에 오신 아버지께서 할아버지의 치료를 받고 재빨리 나으셨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 놈들이 다시 아버지를 붙잡아가려 하자 할아버지께서는 그날 밤으로 중국 만주 송강성 목릉현 평성촌에 있는 동생네 집으로 피신시키셨다.

 

아버지께서 작은 할아버지가 사시는 평성조선인 마을에 와보니 살만한 고장이었다. 비록 집성촌이지만 일본 놈의 통치가 고향보다 심하지 않아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마을은 넓은 벌 복판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마을주변은 온통 벌판이었다.

 

그런데 이 고장은 기후가 냉하고 무상기가 짧고 또 강물이 아니라 찬 개울물로 논농사를 짓기에 소출이 낮았다.

 

아버지께서는 작은 할아버지가 소작 맡은 이웃 한족마을인 광대촌 지주의 땅에서 농사지으셨다. 일년 농사를 지어서는 먼저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치고 국가에 공량을 바치는데 결국 일본 놈에게 바치는 것이였다. 다 바치고 나면 이듬해 농사 할 종자와 식량이 판 부족이었다.

 

일본 놈들이 싼 가격으로 벼를 수매하기에 돈 벌기 힘들다. 아버지께서 3년간 뼈 빠지게 일하셨으나 고향에 있는 가족을 데려올 로비가 모자랐다.

 

그래서 3년 만에 고향으로 가신 아버지께서는 엄마와 우리 3남매만 데리고 떠나려 하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소달구지에 우리 3남매와 짐을 싣고 양평 기차역까지 우릴 배웅하셨다.

 

그땐 겨울이어서 우리 3남매를 달구지에 눕히고 이불을 씌웠다.

 

양평역에 이르자 우리가 덮었던 이불을 젖긴 엄마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셨다.

 

홍역에 걸린 줄도 몰라 길을 떠난 우리의 얼굴은 온통 홍진으로 검붉어 있었으며 온 몸은 고열로 불덩이 같았다. 별 수 없는 아버지는 소달구지를 되몰고 집으로 갔다.

 

하여 아버지께서는 이듬해 봄에 혼자 만주 평성촌으로 떠나셨다.

 

2년 후 아버지께서는 다시 고향으로 가셔 로비 부족으로 할아버지를 강원도 횡성에 계시는 고모 집에 남게 하셨다.

 

그 후 소경이신 할머니, 엄마와 우리 4남매를 데리고 타향살이 길에 올랐다. 그때 언니는 12살, 오빠는 7살, 나는 5살, 여동생은 2살이었다. 우리가 평성에 도착한 이듬해인 1941년 겨울에 할아버지께서도 평성에 도착하셨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일제가 망하기 전해인 1944년 봄에 타향에서 세상을 뜨셨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투항한후 한반도에서 쫒기우자 타향에서 살던 한인들은 한 고향길에 올랐다. 우리가 한 고향 길에 오르자면 7명의 로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곳에 오느라고 번 돈을 다 썼기에 돈이 없다. 아버지께서는 3년 후에 환고향 할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일하셨다.

 

세상은 이런 아버지께 너무도 무정했다. 1948년에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졌다. 더 심한 것은 1950년 6월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형세가 악화됐으나 아버지의 환고향계획은 변함없었다. 당시 17세인 오빠가 중국 지원군에 참군해 북한 전쟁터로 가는걸 막지 않으셨다. 그때 아버지께서 동의하지 않으시면 외동 아들인 오빠는 참군할 수 없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는 전쟁 끝에 남북이 통일되리라고 믿으셨다. 아버지는 헛 믿으셨다. 3년 후 전쟁 끝은 38선에서 남북은 정전했다.

 

그 후 오빠는 북한인민군에 편입됐지만 집이 중국에 있기에 제대 후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때도 아버지께서는 오빠더러 계속 북한에 있으라고 하셨다. 까닭은 북한에 있으면 앞으로 남북이 통일되면 중국에 있기보다 고향으로 가기 쉽다는 것이었다.

 

남보다 공부를 잘한 오빠, 남 못지않게 건강한 오빠는 부모님의 곁에 돌아오지 못하셨다. 결국 북한에서 타향살이를 했고 2005년 2월6일에 부모님이 계시는 저승으로 가셨다.

 

2016년 4월 1일에 고향을 방문한 나는 생전에 끝끝내 고향에 오시지 못하신 아버지를 사무치게 그리며 이런 환고향계획을 세웠다.

 

우리 가족의 생과 사와는 상관없이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엄마, 언니, 오빠를 모시고 여동생과 함께 고향집의 팽나무 옆에서 오손 도손 재밌게 살아가련다.

 

오늘도 남북통일에 기도드리면서 이 글을 쓴다.

/리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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