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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3/10/13  한민족신문
모국어는 내 혈액속에서 흐르고 있었다

한마디도 알아 들을 수 없지만, 한 글자도 쓸 줄 모르지만...

나의 모국어는 백여년 전에 사라졌지만..)

 

2019년 연변자치주작가협회 문학창작 작가양성반에서의 만족작가의 강의중의 한 대목이다. 너무도 진한 울림을 주는 강의어서 모어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나에게 벅찬 감격을 주어 어느새 눈가에 이슬이 맺히면서 우리민족의 언어와 글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를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저도 몰래 나와 우리말과 글과 함께해온 나의 전반생을 회고하면서 추억의 쪽문을 살며시 열었다.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민족문화를 가장 잘 유지하고 자긍심을 지켜온 민족은 우리 조선족이었다. 손이 귀한 집의 맏딸로 내가 태어난 시기는 문화대혁명이던 1965년도었다.

 

어릴 때부터 우리민족음식에 각별한 사랑을 몰 부으시던 할머니, 우리 말, 우리글을 사랑하는 부모님을 보면서 우리말과 글에 대한 이해보다는 할머니, 부모님이 좋아하는 것이기에 난 무조건 이유없이 좋아했다.

 

맏딸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셨던 아버지는 내가 여섯 살 때 북경가는 인편에 부탁하여 그때 돈으로 25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바이올린을 사주었다. 그래서 소학교 입학하기 2년 전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글도 함께 배우게 되었다.

 

우리 나이에 더우기 시골에선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우리부모님의 자식사랑, 우리글에 대한 사랑은 다른 사람보다 늘 각별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매일 바이올린과 글을 배우고 와서는 바이올린은 한쪽에 팽개치고 글공부를 열심히 하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우리 봉화는 글공부가 더 재미있나봐》라고 하시면서 연필과 공책을 사주시군 하셨다. 그 덕에 소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받침까지 다 배워서 글자를 줄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교과서외에 제일 먼저 접한 책이 소학교 2학년 때에 아랫집 보배엄마가 빌려준 프랑스 엑도르 말로의 아동명작 《집없는 소년》이었다. 그시기 이런 명작들은 금지도서었다. 후에 철이 든 다음 알게 된 일이지만 아래집 보배네는 엄마가 우파로 몰리어 시골에 내려왔는데 보배엄마는 원래 사범을 졸업한 선생님이었단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는 내가 기특해서 책을 빌려주면서 가만히 보되 빨리 보고 돌려줘야한다고 해서 엄마가 밥하는 것을 도와 부뚜막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때면서 책을 보다가 (불이야)하는 엄마의 아우성에 놀라고 보니 한쪽 발앞이 불에 타서 물을 끼얹고 야단법석 했다. 책속에 푹 빠져버린 나는 저녁에는 등잔불(그 시절에는 자주 정전되어 석유등잔을 사용했음)밑에서 책을 보다가 머리카락 타는 냄새에 할머니께서 발견했을 망정이지 하마터면 앞머리가  불에 다 탈번 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로부터 책벌레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소설의 주인공 삐린느에게 푹 빠져버렸다. 때로는 삐린느의 불쌍한 모습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로는 어른들과 사회의 부정함에 화도 내고 때로는 순진한 삐르노의 태도에 미소도 지으면서 그렇게 이틀 동안 책을 다 본 후 아쉬운 대로 품에 꼭 껴안고 가서 보배엄마에게 돌려드렸다. 그렇게 보배네 집은 나의 도서관이었다. 책을 보고 싶어서 때로는 할머니가 맛있는 떡을 하면 할머니가 담기전에 내가 먼저 한 사발 가득 담아 보배네 집에 달려가군 했다. 그러면 보배엄마가 자애롭게 웃으면서(오늘은 봉화에게 무슨 책을 보여줄가?)하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삼국연의, 수호전 등 고전명작, 안나까레니나, 붉은 것과 검은 것 등 세계명작들을 초중때 보배엄마에게서 빌려다볼 수 있었다.

 

나에게 우리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님의 이야기도 보배엄마에게서 들었다. 그래서 세종대왕님은 내가 젤 존경하는 위인중의 한분이었다. 보배엄마는 나의 문학계몽선생님이었다. 책을 빌려주는 외에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면서 한민족의 언어와 문자, 풍속습관을 지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하신 말이 어린 나의 가슴에 신성한 사명감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게다가 양반집 규수로 봉건통이셨던 할머니의 엄한 손끝에서 자란 나였기에 어려서부터 할머니에게서 우리민족의 예의범절과 음식 만들기를 배우게 되었다.

 

언제나 맛있는 색다른 음식을 하게 되면 먼저 이웃들에게 돌리게 하였고 아무리 맛있는 밥상이어도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할머니와 아버지께서 먼저 수저를 들기 전에는 절대 먹을수 없는 것이 또 할머니의 밥상머리 훈육이었다. 할머니의 밥상은 어린 시절 우리 삼형제에게 서로를 배려하고 웃어른을 존경하고 나눔과 베품을 알게 해준 그런 계몽밥상이었다. 그렇게 할머니가 했던 걸 엄마가 엄마의 뒤를 이어 내가 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민족의 음식문화와 풍속습관은 우리말과 글과 함께 세세대대 내려가는 것이다.

       

1977년 전국 대학시험 입시제도가 회복되었을 때 난 초중에 입학하였을 때었다. 우리 부모님은 상론 끝에 나를 당시 대학입시입학율이 인근에서 제일 높은 밀산조선족중학교로 전학시켰다. 처음으로 부모 곁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게된 것이다. 열독을 열심히 해왔고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덕에 시골에서 현성학교에 가서 우리말 랑독, 랑송, 습작에서 재주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줄곧 반급에서 어문과 대표, 학교 교내 방송원을 맡았으며 성급, 현급 작문경색에서도 여러번 상을 받았으며 흑룡강신문에도 글을 발표했다.

 

엄마가 주는 생활비는 밥표를 사는 외에 서점에 가서 책을 사는데 몽땅 쓰군 했다. 내가 고중 다닐 때 서점에 우리말로 된 세계명작, 그리고 수호전, 삼국연의, 홍루몽 또 아리랑, 진달래 등 우리글 책들이 엄청 많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책 때문에 하마트면 목숨을 잃을 번한 적이 있었다.

 

바로 1982년 11월 28일, 양력으로 10월 14일 할머니의 생신날이었다. 평시에는 학업에 열중하다보면 늘 휴식 일에 집에갈 때 기차에서나 집에 가서 책들을 보군했기에 그날도 책가방에 책을 한가득 넣었다. 토요일이라 반날 상과하고 오후에는 자습인지라 청가 맡고 집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눈이 펑펑 내렸다. 기차에서 내려 십여리 길을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걸음을 다그치던 중 그만 눈 덮인 강을 지나다가 강 중심에 이르렀을 때 우찌근 하는 소리와 함께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해따라 날씨가 좋아서 강물이 꽁꽁 얼지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눈이 덮여있어 길을 잘못 들어섰던 것이었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책가방은 버리지 않고 꼭 붙들고 있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고마운 향병원의 의사선생님이 구해주어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물에 젖고 언책을 그 와중에도 집까지 가져온걸 보고 할머니와 엄마는 눈물을 보이면서 《이 책이 네 목숨보다 중하더냐?》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솔직히 사명감이요, 책임감이요 보다는 우리말, 우리 글애 대한 애착이 나로 하여금 졸업 후 조선어문교원이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했다.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우리말, 우리글을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가르친다고 생각하니 절로 미소를 떠올리며 마음이 넘치도록 행복했다. 열심히 교원사업을 하며 짬짬이 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작가가 되려는 야무진 꿈도 가지게 되었다.

        

여자는 때론 사업과 가정을 오가느라면 자기의 꿈은 한쪽으로 밀어버리 군 하는 것 같다. 1988년 결혼과 함께 년로하신 시부모님을 모시게 되었다. 결혼 후 학교와 가정사이를 팽이처럼 돌면서 아이 키울랴, 시부모님을 모시랴, 교학할랴, 게다가 남편이 한국수속에서 사기당하여 진 거액의 빚을 갚으랴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의료사고로 사랑하는 딸아이를 의료사고로 저세상에 보내는 모진 아픔을 겪게 되었다.

 

세상의 모진 풍파에 얻어맞고 넘어졌을 때, 자연의 가혹함에 쓰러졌을 때 스스로 일어나고 자신의 의지로 버티고 노력하는 《집없는 소년》의 삐린느가 항상 내 삶의 본보기었다. 아니, 바로 문학이 내가 모진세파에도 쓰러지지않게 해준 힘이 아니었을가? 그러던 중 나의 문학의 길에서 또 한분의 귀인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1998년 제2회전국 조선족여성 백일장에서 였다. 힘든 일상의 휴가라면서 남편이 등을 떠밀며 용기를 주어 연길에서 진행하는 백일장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문학, 더욱이 한국작가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을 때었다. 그때 처음으로 접촉한 한국작가분이 바로 박완서 작가님이셨다. 눈앞에 계시는 인자하신 할머니 작가분이 그처럼 대단한 작가인줄은 주최 측의 소개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그날 박완서 작가님의 책을 읽는 즐거움과 마지막까지 글을 쓰게 된 것은 시골뜨기의 근성에 힘 입은바가 크다고 하신 말씀이 늘 자비심을 가지고 주저하던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부지런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하여 1999년 제3회 전국조선족여성백일장에서 가작상을 받게 되었다. 1992년 중한수교이후 거센 한국출국바람과 연해도시 진출 붐이 일어나면서 시골학교의 학생수는 점점 줄어 결국은 페교되어 향소재지 학교로 또 페교되어 현성학교와 합병하게 되었다.매번 정성과 땀을 쏟은 학교가 페교될 때마다 저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 얼마었는지 모른다.

  

2003년도에 전근되어간 학교가 계림조선족중학교었다. 연해도시 잔출, 한국출국열풍은 우리 조선족아이들에게 하나의 신조어 결손가족 류수생이라는 단어를 선물하였다. 한쪽 혹은 양쪽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반급마다 반수이상 넘었다. 조부모 혹은 친척집 혹은 돈 내고 생판 남의 집에서 얹혀살면서 눈치 밥을 먹으며 공부하는 아이들 볼 때마다 늘 말 못할 아픔을 느꼈다.

 

매주 수요일 날 오전은 조선어문 수업시간이 네 번째였는데 아침밥을 대충 설친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며 집중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요일 날만 되면 아침 일찍 일어나 김밥도 하고 찰밥에 김 가루, 참기름을 넣고 소고기 졸임이나 맛있는 반찬을 넣어서 주먹밥을 만들어가지고 가군했다.

 

수업전 김밥 한 줄이나 주먹밥을 한 덩이씩 주면 얼마나 맛있게들 먹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 모습들은 괜스레 그렇게도 마음이 아프고 짠해나면서 진정 자식을 위한 길이 무엇일가? 아이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일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명절이나 휴식 날이면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가 이것저것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들을 챙겨먹이군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이들에게서 공동으로 존재하는 문제점을 발견하였다. 바로 밥상머리에서의 예절, 우리민족의 음식예절, 인사법 등이 너무나 결핍한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부모와 떨어져 밥상머리훈육 등 옳바른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였다. 교육자로서 더욱이 조선어문 교원으로서의 책임감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학교와 상의하였더니 학교령도의 동의와 대폭적인 지지하에 우리민족예의범절시간과 우리민족음식 만들기 시간을 가지기로 하였다.

 

학교에서는 전문 한 칸을 내어 음식 만들기에 편리하게 모든 시설을 갖추어 주기까지 하였다. 매주 금요일로 시간을 정해서 우리민족풍속습관 음식, 예절 등을 가르쳤다. 특히 음식 만들기 시간이면 아이들은 열심히 강의 듣고 만들기에 열중했다. 무릇 어떤 음식이든지 다 만든 다음 시식은 꼭 먼저 선생님이 한 다음 학생들을 맛보게 하였다. 그러면서 집에서 밥 먹을 때 꼭 어른들이 먼저 수저를 든 다음 밥을 먹는 습관을 가지도록 일깨워주었다. 소위 밥상머리훈육을 결부시켰더니 효과가 너무 좋았다. 다음 다 만든 음식은 이쁘게 담아서 교장선생님 교무실로부터 선생님들의 교무실로 한 칸씩 돌리게 하였다..

 

(너희들 참 맛있게 만들었구나. 고마워.)라는 칭찬과 인사말들에서 학생들은 나눔과 베품의 즐거움, 노동의 희열을 만끽하게 되었다. 그렇게 배추김치 만들기, 송편 빚기 등 여러 가지 우리민족의 전통음식 만들기를 하나하나씩 배워주자 아이들의 음식솜씨는 부쩍 늘었고 따라서 우리민족의 음식문화와 예의범절도 알게 되었으며 여러차례 성, 시급 시범과로 내놓아 긍정을 받게 되었고 부모들의 한결같은 호평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산재지구여서 우리말, 우리글을 가르치는데 애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습작시간이면 조선어문교원인 나는 한어를 조선어로 번역하는 번역담당이었다. 그래서 무조건 일주일에 일기 세편쓰기, 책 한권 읽기를 견지하게 했더니 효과가 좋아. 학생잡지와 간행물에 학생들의 글도 많이 발표하게 되었다. 그러나 점점 줄어드는 학생수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전성 유일한 조선족 향진중학교였던 계림조선족중학교도 현성학교에 합병되었다.

    

30여년 교원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퇴직하는 순간 인젠 우리말과 우리글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생각하니 섭섭함과 서운함에 마음이 허전해지면서 끝내 눈물을 쏟고 말었다. 매일 매일 무료함과 허탈로 퇴직 후의 일상을 보내던 중 2018년 8월 흑룡강성 조선족 문학교류작가양성반 목단강 필회에 참가하여 저명한 작가, 편집들 그리고 우리조선족문단의 작가님들애게서 많은 소중한 가르침을 받게 되면서 다시금 필을 들게 되었다.

 

나를 매혹하는 것이 나의 일이 될 때 일은 삶의 각별한 일부가 된다. 그 일은 바로 글 쓰는 것이었다. 내가 열심히 쓴 글이 활자체로 간행물에 나의 이름 석자와 함께 나올 때 그리고 독자들이 나의 글을 읽어주고 긍정해줄 때가 가장 행복한 때이기도 했다.

 

그렇게 연속 송화강, 청년생활, 연변여성, 흑룡강신문, 조선말방송 등에 많은 글들을 발표했으며 운이 좋게도 2018년 12월 <할빈의 문학의 밤>에 참가하여 개혁개방 40주년 기념 록환컵 수필공모전에서 나의 글 《내 인생의 봄날》이 장려상과 흑룡강성조선족작가협회 우수회원 상 두가지 상을 받게 되었고 2019년 2월 중앙인민방송국 조선말방송 디카시 공모전에 당선되었으며 4월에 또 학창시절을 회상해 쓴 글 《색 바랜 사진, 진한 그리움》이 재차 중앙인민방송국 조선말방송 공모전에 당선되었고 2019년 9월 7일 연길에서 진행된 제5회 애심컵 전국여성생활수기 시상식에서 나의 글 《아픔의 끝은 절망만이 아니었다》가 입선상의 영예를 따내게 되었다. 뿐만아나라 2019년 연변자치주작가양성반에 참가하는 행운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글쓰기는 아니 우리말과 우리글은 내 인생의 제일 소중한 삶의 한 부분, 아니 삶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백년 전의 세종대왕님께서 창제하신 모국어가 내 혈액 속에서 이렇게 흐르고 있다. 영원히, 영원히...

/김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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