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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9/05/06  초원이
오늘도 불러보는 우리 아버지

어버이날을 맞으면서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어버이날 엄마를 모시고 무엇을 할까하고 생각하다가 문뜩 아버지 생각이 나면서 가슴이 뭉클해 났다.

 

아버지,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존재, 하지만 아버지는 십 이년 전 우리 곁을 영영 떠나셨다. 아버지가 생전에 우리에게 부탁 하셨던 대로 중국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신 선산에 모시다보니 한국에 있는 저로서는 자주 찾아뵐 수 없는 상황이라 마음이 항상 무겁기만 하다.  내가 다섯 살 때의 일이였다. 일하러 다니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연로하신 할머니께서 사촌형제들과 우리형제들을 돌봐주셨다.

 

어느 날, 사촌오빠가 장난으로 나의 팔을 비틀었는데 그만 골절이 되고 말았다. 저녁에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신 부모님들이 나를 동네병원으로 데리고 갔는데 의사선생님은 자신은 치료할 수 없다면서 마을에서 60여리 떨어진 골절전문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빨리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였다.

 

하루 종일 들에서 일하시고 돌아오셨는데 힘들 법도 하지만 아버지는 띠로 나를 등에 업고 그날 밤 길을 나섰다. 어린 동생과 할머니를 돌봐야 함으로 엄마는 부득불 집에 남기로 하고 아버지 혼자 나를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병원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려면 마을에서 배를 타고 큰 강을 건너서 오리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그때가 장마철이라 비가 많이 내려 강물이 불어 배를 건널 수 있을지 걱정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아버지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재촉했다.강변에 이르니 아니나 다를까 배사공이 배를 모는 특수공구를 거두어 퇴근하고 굵은 쇠 바줄에 걸어놓은 큰 배만 물살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강물이 불어 아무런 공구도 없이 큰 배를 맨손으로 혼자 줄을 당기면서 건너가기엔 힘든 것도 힘든 것이지만 물살이 세면 줄이 끊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 위험한 상황 이였다. 아버지는 배를 고정해둔 줄을 풀고 두 손으로 줄을 잡아당기면서 겨우 큰 배를 움직여 갔다. 강 중간도 채 못 갔는데 아버지의 이마에서는 콩알 같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숨소리도 점점 가빠지시더니 갑자기 손을 멈추셨다. 나는 무서워서 아버지 등에 바짝 기대어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뿌리 채 뽑힌 나무들이며 풀들이 흙탕물에 떠내려가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숨을 죽이고 겁에 질려있는 나를 의식해서인지 업혀있는 나의 엉덩이를 손으로 톡톡 다독이면서 "금화야 괜찮아? 아버지가 담배 한대만 피우고 가자~" 라고 하시더니 주머니에서 쌈지를 꺼냈다. 초담배를 종이에 말아 불을 붙인 후 두어 모금 빠시더니 나머지 담배를 강물에 던지시고는 또다시 힘을 내서 줄을 잡아 당기셨다. 조금 가다가 쉬고 도 가다가 쉬고를 몇 번 반복하여 겨우 강을 건넜다. 배를 단단히 고정시켜 놓은 후 아버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더니 논밭 사이 길을 따라 기차역으로 향했다.

 

한참을 가다보니 앞에 길이 보이지 않았다. 길옆의 물이 넘쳐나면서 20미터정도의 길이 세찬 물길로 끊긴 것 이였다. 원래 도로였던 곳이라 깊지 않을 것 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아버지는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리시고 물에 들어가서 몇 발자국 가시더니 되돌아 나오셔서 띠를 풀고 나를 내려놓았다. 갑자기 아버지 등에서 내린 나는 싸늘한 느낌에 온몸이 오싹해 나서 두 눈이 동그래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는 바지를 벗어서 신발과 돌돌 말아서 한쪽 옆구리에 끼고 나를 업고 또다시 물로 들어섰다. 나는 어두움과 물소리가 무서워서 "아버지 물 안에 귀신이 있으면 어떻게 해요?" 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귀신은 없단다. 그래도 무서우면 눈을 꼭 감고 아버지 등에 기대고 있다가 아버지가 됐다 하면 눈을 떠보아라. 귀신이 있나 없나. 절대 없을 걸.” 하고 안심시켰다. 나는 아버지가 시켜준 대로 눈을 꼭 감고 아버지 등에 얼굴을 묻은 채 아프지 않은 한손으로 아버지 옷을 꽉 잡았다. 그랬더니 정말 신기하게도 두려움이 점차 사라졌고 아버지의 등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느껴졌다. 거센 물살과 울퉁불퉁한 바닥 탓에 아버지는 몇 번이나 비틀거리면서 넘어질 뻔 하셨지만 한손으로 나의 발을 꼭 잡고 내가 등에 잘 붙어있게 도우셨다. 넘어질 뻔 할 때에도 나는 나를 보호해주는 아버지가 있다는 믿음 때문에 전혀 무섭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겨우 기차 시간에 맞추어 기차역에 도착했다. 제때에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은 덕에 나의 팔은 아무 이상 없이 잘 치료 되였다.

 

이렇게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위험과 고난이 있더라도 묵묵히 헌신하는 그런 분이셨다. 그때는 아버지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줄로만 알았다. 누군가 그랬다. 어머니의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나는 그 말에 동감하면서 한마디 더 보태고 싶다. 가족의 생계와 가족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아버지의 사랑 역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훗날 내가 어른이 되여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점차 이런걸 알게 되였지만 그때는 무엇이 그리 어려웠는지 아버지 살아생전에 사랑한다는 표현을 한 번도 하지 못한 채 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말았다.

 

아버지는 항상 우리에게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하셨지만 또한 엄한 분이셨다. 밥을 먹을 때는 뒤적거리지 말고 중간을 파먹지 말고 한쪽으로 부터 차례차례 먹어야 한다. 또한 쩝쩝 소리를 내거나 입안의 음식이 보이게 입을 벌리지 말아야 한다. 걸을 때에는 발뒤꿈치를 질질 끌지 말고 가볍게 걸어야 한다. 여자는 말소리가 낮아야 하고 웃음소리가 담장 밖을 넘으면 안 된다. 여자는 밖으로 나돌면 안 되고 해가 지기 전에는 꼭 집으로 돌아와야 하고 밖에서 잠을 자면 절대 안 된다. 여자는 항상 조신하게 행동해야 하고 마구 뛰어다녀도 안 된다. 어른들을 보면 꼭 허리 굽혀 인사를 해야 한다. 오전에는 여자가 남의 집에 다니지 말아야 한다 ... 여하튼 안 되는 일과 해야 하는 일들이 많고도 많았다.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하기가 그리 어려운 일들은 아니었지만 자기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가 없어서 우리 형제들은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당신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엄격하게 우리를 키우셨는데 우리 형제들은 뒤에서 아버지를 잔소리쟁이 라고 불렀다. 그렇게 아버지는 항상 우리들에 대한 요구가 엄격하셨지만 우리가 잘못을 했을 때 손찌검을 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엄마와 부부싸움은 하셨지만 자식들에게는 항상 말씀으로 타이르는 자애로운 분이셨다. 그래서인지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하면서도 아버지를 잘 따랐다.

 

아버지는 또한 봉건적인 사상으로 꽉 차있는 분이셨다. 옛날부터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씀을 늘 하시면서 우리 자매가 남자애들과 휩쓸려 다니는 것에 대해 절대 엄금 하셨다. 다른 친구들은 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어느 친구 집에 어른들이 일 때문에 며칠 씩 집을 비우면 집을 지켜준다고 남녀친구들이 그 집에 모여 되놀이를 하기도 하고 같이 시내에 영화 보러 다니곤 하였다. 그런데 우리 형제들은 그런 모임에 한 번도 참석 해보지 못해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대로 행동하는 다른 친구들이 엄청 부러웠고 아버지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사회에 나온 후에도 친구들은 남자여자 어울려 다니면서 놀고 하였지만 나는 그나마 엄마의 도움을 받아 누구누구랑 모인다는 것을 이야기 한 후에야 겨우 몇 번을 친구들과 놀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주시려고 매일 잔소리를 하셨던 것이었다. 한평생 농군으로 사시면서 박식하지는 못하셨지만 나름 인간미를 갖추신 분이셨다.한국에 와서 생활하던 중 한국인 직장동료들로부터 “금화씨는 중국에서 공부를 많이 했거나 아니면 가정교육을 잘 받은 사람 같다”는 말을 듣곤 하였다. 내가 다른 이들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온통 봉건적인 생각으로 똘똘 뭉친 아버지의 잔소리가 어느새 내 몸에 배여 시시각각 나의 행동거지를 바로 잡아주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였다. 나의 여동생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참 여성스럽고 교양이 있다는 칭찬을 받을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한다고 나한테 외우군 한다. 이젠 우리형제들이 모이면 아버지에 대한 호칭이 “봉건통” “잔소리쟁이” 에서 “양반 서 노인”으로 바뀌었고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고마움과 존경과 그리움으로 변하였다.

 

아버지! 한평생 아버지한테서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서금화

                                                                                              20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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