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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9/02/15  김보옥
삶은 찰옥수수 팔던 희열

1983년 중국 녕안시 광성마을도 호도거리가 시작되여 땅을 개인이 도급 맡게 되었다. 가난에 찌들어 살던 우리도 물만난 물고기 마냥 개혁 개방의 큰 물결속에서 마음껏 헤염칠수 있게 되었다.
 
3무 되는 밭에서의 수익을 높이려고 우리 부부는 찰옥수수를 심어 풋옥수수로 삶아  팔 계획을 세웠다  .우선 토종 찰옥수수 종자를 좋은것으로  선택하고 파종도 두번으로 나누었다.첫번째는 좀 일찍 심고 두번째는 늦추어 6월중순 쯤에 심었다.
 
옥수수 알이 들자 우리는 마을에서 4키로 떨어진 동경성진 시장에서 팔기 시작했다.남편이 자전거로 날라주면 나는 시장에서 오고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솥에서 금방 꺼낸 따끈따끈한 찰옥수수를  사세요"라고 외쳤다. 사람들이 모여 들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샛노란 찰옥수수는 기름끼가 자르르하여 먹음직스러웠고  옥수수 향이 침샘을 자극했다.
한시간 남짓한 동안에 100여 이삭을 다 팔때면 기분이 너무 좋고 마음도 뿌듯했다.
 
그런데 매일 그런것은 아니였다. 잘 팔리지 않는날도 많았다.오전에 삶은것은 오전에 다 팔아야 맛도 그대로이고 오후에 오는 찰옥수수를 받아서 팔수 있었다.할수없어 머리에 이고 동경성진 림업국 사택을 골목골목 누비며 "따끈따끈한 찰옥수수를 사세요"라고 목청껏 외쳤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와 "당신 목소리는 어쩌면 그리 듣기좋아요.찰옥수수도 먹음직스럽게 잘 삶았네"하면서 사 갔다. 무척 힘들지만 고객들의 칭찬에 마음은 즐거웠다.
 
일찍 파는 날은 그래도 괜찮았다. 때론 땅거미 질때까지 애타게 팔때도있었다.
교통이 좋지않은 우리 마을은 늦으면 집까지 가는것이 참 걱정이였다 .어슬어슬한 저녁,길 량옆에 곡식이 우거진곳을 지날때면 무서웠다.이런 내 마음을 헤아려 남편이 자전거 타고 마중왔다.구세주를 만난 기분이다.
 
남편도 눈코뜰새없이 바쁘다.아침에 나를 시장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가서는 인차 밭에 가서 찰옥수수 따다가 까서 큰솥에 쪄내여 제때 시간 맞춰 시장까지 가져다 준다.

아무리 힘들어도 군소리없이 묵묵히 뒤바라지 해주는 그이가 가슴 찡하게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집으로 가는 길은 홀가분하고 기분도 짱이다. 적지 않은 물량을 다 팔았으니 몸도 마음도  가볍다.늦여름의 훈훈한 바람이 페부를 스친다. 달리는 자전거 뒤에 앉아  가노라면 남편 몸에서 풍기는 땀냄새는 그의  하루의 노고를 말해 준다.
 
집에 오면 방학간이라 4남매가 반겨준다.
우리 가족은 빙들러 앉아 불룩한 돈주머니에 든 돈을 방바닥에 쏟아 놓고 정리해 본다.큰돈은 큰돈대로 잔돈은 잔돈대로. 많이 버는 날은 50원, 적게 버는 날은 30원 한달 동안 열심히 벌면 1000원 ~ 1500원을 수입하군했다. 도시에서 출근하는 공인 한달 월급이 몇십원이던 시절 적은 돈이 아니였다.
 
이 돈으로 개학에 학교가는 자식들 뒤바라지 하고 남은 돈으로 그때 농촌에서 제일 큰 재산이였던 티비, 녹음기도 사고 나머지는 적금하였다. 정말  재미 쏠쏠, 행복 쏠쏠이였다. 이렇게 7년을 견지하였다.
 
1988년3,8세계여성의날 내가 마을 치부 모범으로 당선 되였을 때였다. 다음해엔 치부부부를 표창하여 남편공로도 인정해야 한단다. ㅎ ㅎ
 
지금 추억해도 참 행복하고 희열 넘치는 시절이였다.
/고 정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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