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를 편안히 하늘나라로 보낸 며느리

외팔작곡가 최시렬을 기리며

 

  길림성 왕청현에는  81세에 나는 시아버지(최시렬)를 친부모처럼 살뜰히 보살펴 아쉬움 없이 하늘나라로 보낸 며느리가 있는데 그가 바로 올해 43세에 나는 리금연씨이다.

 

   2017년 정월 초 사흔날은 리금연씨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정월 초 하루날 도문시 석현진에 있는 가시집에 설 쇠러 갔다가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왕청현병원으로 호송된 남편이 사흘 만에 아들과 아내를 버리고 저 세상으로 영영 떠나갔다. 뜻밖에 가정의 기둥이 넘어지면서 들이닥친 재난으로 리금연씨는 물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앞세운 최시렬도 눈앞이 캄캄해 지면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수십 년래 외팔작곡가 최시렬은 민족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시대의 발자취를 따라 광범한 군중들과 고락을 함께 하면서 금싸락 같은 수많은 노래를 창작해 아름다운 선률로 왕청을 노래하고 민족을 자랑하며 민족문화를 세상에 널리 홍보해 중국 조선족음악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192페지로 된 이 작품집에는 최시렬선생이 수십년 동안 창작한 노래 '타향의 봄', '울지 마라, 밤새야', '황금벌 좋을시구', ‘나의 집은 연변이라’등 88수의 노래와 자체로 창작한 12폭의 인물화 '삶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피에 물든 유서', '두 몸에 한 팔'등 22편의 문학작품이 수록되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즐겼던 최시렬은 산서사범대학 음악학원을 졸업하고 태원광무국 문공단 창작원으로 배치 받아 음악재능을 발휘하면서 작곡가로 되려는 꿈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으로 문공단의 창작원과 배우들은 모두 탄광에 내려가 노동개조를 하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탄광의 의외 사고로 그는 오른쪽 팔을 잃게 되였다. 모든 꿈이 산산이 부서지고 절망과 고통 속에서 방황하던 그는 생명까지 포기하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죤을 통해 두 손이 없는 한 소녀가 발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본 최시렬은 "두 손이 없는 소녀도 저렇게 굳세게 살아가는데 나는 그래도 한손은 있지 않은가... 이렇게 자포자기해서야..." 그때로부터 그는 미술에 미련을 두고 51살까지 10년간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 속에서 삶의 희열을 느끼군 하였다. 하지만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였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미술을 단연히 포기하고 1988년에 왕청현 동진사구에 와 두부 장사를 하면서 돼지치기를 시작했다. 왼손으로 두부를 앗고 돼지치기까지 한다는 것이 힘에 부치는 일이였지만 매일 적은 수입이나마 제 힘으로 살아가게 되여 마음이 뿌듯했다. 그 후 아들애의 공부뒷바라지를 위해 1993년에 러시아 장사 길에 올랐다. 러시아 우수리스크로 간 이듬해, 우연한 기회에 놀이 감 전자풍금을 보았다. 급급히 왼손가락으로 전자풍금을 쳤더니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삽시에 동년시절의 꿈이 되살아나 전자풍금 장사를 하면서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들으며 살고 싶어 놀이 감 전자풍금을 구입, 판매하기 시작했다.

 

1994년 3월, 원호원의 '타향의 봄' 가사를 보고 작곡, 이튿날부터 그는 시장에서 전자풍금으로 '타향의 봄'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러보았는데 우수리스크 중국시장은 '타향의 봄'노래로 들썩하였다. 며칠 후 최시렬은 김영자씨와 함께 이 노래를 불러 1만 3000개의 록음테프로 제작해 팔았는데 하루 판매액이 500~600원이 되였다. 그가 제작한 록음테프는 러시아의 고려인은 물론 조선, 한국에서 온 분들과 일본, 미국 등 여러 나라의 조선족들도 다투어 사갔다. 이렇게 '타향의 봄' 노래는 온 지구촌에 울려 퍼졌다.

 

2년 후인 1996년 9월 30일 '타향의 봄'노래는 연변인민방송국 음악부 성기화주임의 반주에 김성삼 가수가 불러 매주일가로 방송되었는데 노래요청편지가 눈꽃처럼 음악편집부로 날아왔다. 그때 최시렬은 "장애자이지만 절망 속에서 헤매다가 저 세상으로 갔더라면 이런 삶의 보람을 느껴볼 수 있었겠는가!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굳은 신념을 지켜왔기에 나의 삶에도 이런 보람이 있게 된 것이 아닌가!"며 진정 삶의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2002년에 왕청으로 돌아온 그는 예술의 어린 꿈나무들에 미련을 두고 어린이전자풍금강습반을 꾸렸다. 지금까지 그의 제자는 120여명으로 그중 심선영, 최복화, 왕정 등 18명 학생은 전국 전자풍금 10급시험에 통과 되여 자격증을 탔고 15명 학생이  선후로 길림성전자풍금콩클에서 금상 18개, 은상 22개를 따냈으며 2004년에 최복화, 장혜신, 심선영 등 11명 학생들은 연변을 대표하여 그해 2월 19일부터 20일까지 이틀 동안 북경에서 열린 전국 텔레비죤선발경연에 참가해 금상 세 개, 은상 6개를 수상했다.

 

 지금까지 그는 총 820여수의 가요를 창작했는데 그중 '울지 마라 , 밤새야'는 전국 유행가곡 콩클에 입선 되여 증서까지 받아 왕청현 후대관심사업위원회와 왕청현문련에서는 2004년 1월에'왕청현 최시렬 전자풍금양성기지'라는 간판을 걸어 주었다.

 

 왕청현문련주석 홍미란, 현후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김춘섭은 축사연설에서 "외팔 작곡가 최시렬이 새 세기, 새 생활을 반영한 우수한 노래, 그림, 문학작품들을 계속 창작해 왕청의 노래가 유유히 동으로 흘러가는 가야하 강반에서 연변 나아가 중화대지의 방방곳곳에서 울려퍼지게 할 것을 바란다."고 격려했다.

 

 노래집출간에 대한 감수발언에서 작곡가 최시렬(81세)은 "육체의 불구가 두렵지 않다고 본다. 두려운 것은 정신상의 불구이다. 삶의 의욕을 품고 자신의 삶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간다면 장애자라 해도 정상적인 사람이 해내지 못하는 일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며 감개무량해 하군 하였다.

 

  남편을 보낸 슬픔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리금연씨는 자기보다도 불구자인 시아버지가 불쌍하고 살아갈 앞길이 더 막막해 시아버지 품에 안겨 울고 또 울었다.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리금연씨는 열일곱 살 나는 아들을 데리고 단연히 한국 노무 길에 올랐다. 그는 한국에 간 후 한 자동차부속품회사에서 하루에 열두 시간씩 고된 일을 하면서 번 돈을 달마다 시아버지한테 생활비로 2천5백원씩 부쳐 보내고 자기의 친구더러 한 달에 1200원씩 보모비를 주겠으니 하루에 한 끼씩 밥을 해 대접하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그는 만 2년 동안에 시아버지한테 6만원의 돈을 보내주고도 생일 때마다 찾아와 생일을 차려주고 갔다. 지난해 7월에 시아버지가 뇌출혈로 왕청현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보름동안이나 청가를 맡고 와서 시아버지를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2018년12월31일, 시아버지는 뇌출혈로 영영 이 세상을 떠났다)  

 

외팔작곡가 최시렬선생의 명목을 빕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라도 아프지 말고 무사히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리강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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